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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스페셜] 썰매 탄 독수리들의 15년 '압축성장', 그것은 눈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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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스페셜] 썰매 탄 독수리들의 15년 '압축성장', 그것은 눈물의 기록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5.03.23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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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아이스슬레지하키 클럽 '서울 연세 이글스'...빙판에 헤딩, 일본 드나들며 개척

[300자 Tip!] 2부 리그라고는 하지만 한국 아이스슬레지하키가 세계선수권 B풀 대회에서 전승 우승을 차지하면서 주목받고 있다. 아이스슬레지하키는 척수장애나 하반신 절단 또는 마비 등의 장애인들이 썰매(sledge)를 타고 2개의 스틱을 들고 펼치는 아이스하키다. 썰매를 타고 하기 때문에 '썰매 하키'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국 아이스슬레지하키의 시초는 누구였을까. 한국 아이스슬레지하키는 2000년에 시작해 이제 15년를 맞고 있다. 그 짧은 역사에도 한국이 세계적인 강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최초의 '그 누군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팀, 그리고 현재 국가대표 선수들을 배출해냈던 아이스슬레지하키 선구 클럽 서울 연세 이글스를 만나본다.

▲ 서울 연세 이글스 아이스슬레지하키 선수들이 경기 성남 탄천종합운동장 빙상장에서 훈련을 마친 뒤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2000년 창단된 서울 연세 이글스는 현재 대표팀에서 뛰고 있는 한민수 등을 배출한 아이스슬레지하키의 선구자다.

[성남=스포츠Q 글 박상현·사진 이상민 기자] 한국 아이스슬레지하키가 세계선수권대회에 처음 출전했던 때는 2009년. 당시 한국은 8개팀 가운데 독일에 앞서 7위에 그쳤지만 희망을 봤다. 2010년 밴쿠버 동계패럴림픽에 나간 한국은 2012년 세계선수권에서 결승까지 오르며 미국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다. 2013년에는 고양에서 세계선수권 A풀 대회를 열 수 있었다.

현재 한국의 위치는 B풀. 2013년 대회에서 7위에 그치면서 B풀로 강등됐다. 하지만 22일(한국시간) 스웨덴에서 끝난 세계선수권 B풀 대회에서 스웨덴을 4-2로 꺾고 전승 우승을 차지하면서 2위까지 주어지는 A풀 승격권을 거머쥐었다. 이제 2017년 세계선수권은 A풀에서 뛰게 된다.

한국 아이스슬레지하키가 다시 A풀로 올라간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한국은 2018 동계패럴림픽 개최국 자격으로 주어지는 본선 진출권을 마다했다. 당당하게 본선 티켓을 따내겠다는 의지였다. 2017년 세계선수권 A풀 대회에서 5위 안에 들면 평창 패럴림픽 본선티켓을 확보하게 된다.

한국 아이스슬레지하키가 세계 정상에서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는 것은 서울 연세 이글스의 2000년 창단이 발단이 됐다. 이후 강원도청 실업팀이 창단하고 인천 바로병원, 아산시장애인복지관, 전라북도장애인체육회, 아이스워리어스 등 새로운 클럽이 만들어졌다.

◆ 무작정 덤벼든 선구자들, 한국 아이스슬레지하키의 산증인

서울 연세 이글스는 클럽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 1998년 일본팀 초청 시범경기와 워크샵을 통해 한국에 처음 소개됐고 1999년 척수 장애인인 고(故) 이성근 감독의 주도로 서울 연세 이글스가 만들어졌다.

현재 연세 이글스를 이끌고 있는 하진헌(49) 감독도 초창기 멤버다. 하 감독은 창단 당시 코치로 일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연세 이글스의 선수들을 직접 지도하고 있다. 하 감독은 창단 당시를 '맨땅에 헤딩'으로 기억한다.

"장애인 농구팀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을 추려서 1999년 아이스슬레지하키를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그리고 오는 길에 썰매를 하나 얻어와서 본격적으로 아이스슬레지하키를 하기 시작했죠. 현재 국가대표팀에 있는 한민수(45·강원도청), 홍재화(42·서울 연세 이글스) 같은 선수가 초창기 멤버였어요. 아무래도 장애인 농구팀 선수들을 중심으로 구성됐던 것은 똑같이 5명(필드플레이어)이 뛰고 포메이션도 비슷했기 때문이었죠."

▲ 연세 이글스 아이스슬레지하키 선수들이 경기 성남 탄천종합운동장 빙상장에서 훈련을 하기 직전 하진헌 감독(가운데)의 지시를 듣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는 아이스슬레지하키를 가르쳐줄 수 있는 지도자가 없었다. 아이스하키와 똑같기 때문에 포메이션이나 드리블 같은 기술 지도는 가능했지만 썰매를 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지도자가 썰매를 경험하기 전에는 아이스슬레지하키 특유의 지도를 하기가 무리였다. 이 때문에 초창기 멤버들이 자주 일본을 드나들면서 배웠다. 영상 자료를 통해 분석하면서 조금씩 실력을 쌓아갔다. 독학을 했던 셈이다.

"불과 15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가 일본에 배우는 입장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일본을 멀찌감치 따돌렸어요. 아시아에서는 아이스슬레지하키를 한국과 일본이 하는데 우리가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세 이글스의 탄생은 본격적인 한국 아이스슬레지하키의 시작이었다. 이것이 밑바탕이 돼 강원도청 실업팀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던 선수들은 그대로 연세 이글스에 남았지만 엘리트 선수의 꿈을 갖고 도전한 선수들은 모두 강원도청으로 건너갔다. 대표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초창기 멤버 한민수가 바로 그런 예였다.

◆ 클럽팀으로 겪는 고충, 실업팀으로 재창단되길 기대

실업팀인 강원도청과 달리 다른 아이스슬레지하키 팀은 모두 클럽팀이다. 실업팀은 엘리트 스포츠의 영역인 반면 클럽팀은 생활체육이다. 아무래도 훈련량에서 큰 차를 보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운동을 직업으로 삼는 선수들과 주말에만 모여 훈련하는 선수들의 차이다.

그럼에도 워낙 팀이 없다보니 동계장애인전국체전에서는 강원도청과 클럽팀이 맞붙는다. 전국체전에서 실업팀과 생활체육 클럽 또는 조기축구팀이 경쟁하는 것과 같다. 제대로 경기가 될 리 없다.

"강원도청이 생겨나면서 한국 아이스슬레지하키의 수준이 부쩍 높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젠 강원도청과 클럽팀이 경쟁하는 것이 무의미해졌어요. 매일 훈련하는 선수들과 어디 같나요. 게다가 클럽팀 선수들은 모두 직장 생활을 하기 때문에 일이 있으면 그나마 잡아놓은 주말 훈련도 나오지 못해요. 실력차가 많이 날 수밖에 없죠."

▲ 연세 이글스의 창단부터 함께 했던 홍재화가 경기 성남 탄천종합운동장 빙상장에서 썰매를 타고 빙판을 누비고 있다. 홍재화도 한국 아이스슬레지하키의 산증인으로 대표팀 선수로도 활약했다.

하진헌 감독이 바라는 것은 연세 이글스가 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인수해 실업팀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래도 서울 연세 이글스가 가장 오랜 팀이다보니 노하우도 많고 클럽팀 가운데 전력과 조직력이 가장 뛰어나죠. 하지만 강원도청에는 대적할 수가 없어요. 강원도청도 국내에서는 무의미한 경기만 해야 하니까 아쉬울 거예요. 한국 아이스슬레지하키가 더욱 발전하려면 실업팀이 한두 개 더 만들어져야 합니다. 우리도 실업팀이 됐으면 좋겠고요."

하진헌 감독이 실업팀이 됐으면 하는 이유에는 운영난과도 관계가 있다. 아무래도 클럽팀이다보니 경비가 크게 문제가 된다. 현재 성남 탄천종합운동장 빙상장에서 주말마다 훈련하고 있는 연세 이글스는 각종 장비 구입비를 비롯해 경비가 만만치 않아 고민을 하고 있다.

"대한장애인아이스하키협회 차원에서 클럽에 좀 더 지원을 많이 해줘 원활한 운영이 될 수 있게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2010년까지는 경기장 대관료나 임차료, 창고 이용료 등을 지원받았는데 지금은 매달 20만원 보조를 받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도 장비는 장애인체육회에서 보조를 해주기 때문에 그나마 낫습니다. 동계장애인체전에 나갈 때 유니폼이나 글러브 등 장비 구입비를 신청하죠. 이번에는 하나에 150만원 정도 하는 썰매 3대도 보조받아서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훈련 끝나고 나면 선수들과 저녁이라도 함께 먹어야 하기 때문에 지인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지원받을 때가 많아요."

▲ 서울 연세 이글스 아이스슬레지하키 선수들이 경기 성남 탄천종합운동장 빙상장에서 훈련 직전 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서울 연세 이글스는 한국 최초의 아이스슬레지하키 팀이다.

◆ 세계 5~6위권 한국 아이스슬레지하키, 세대교체 성공에 평창 메달 여부 달려

연세대 84학번인 하진헌 감독은 2000년 창단 때부터 서울 연세 이글스를 계속 지도해오고 있다. 2008년에는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한국을 세계선수권 B풀에서 A풀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2013년 대회에서 7위에 그치는 바람에 다시 B풀로 떨어지기도 했지만 2012년 준우승에는 그의 지도력이 큰 몫을 했다.

그런만큼 하 감독 역시 한국 아이스슬레지하키의 평창 패럴림픽 도전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홍재화, 정영훈(41), 이해만(43) 등 2000년에 함께 했던 초창기 멤버들이 아직까지 팀에서 뛰고 있어요. 어느덧 40대가 됐지만 새로운 선수들이 나오지 않으니 계속 뛰고 있는 것이죠. 강원도청도 마찬가지예요. 뛰고 있는 선수들이 나이가 많아요. 강원도청에서 이번에 20대 신인 선수를 발굴했는데 앞으로 이들이 평창 패럴림픽이 벌어지기 전까지 얼마나 기량을 끌어올릴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이들이 잘 성장해준다면 밴쿠버와 소치에서 따내지 못했던 패럴림픽 메달권에 근접할 수 있겠죠."

현재 세계 아이스슬레지하키는 미국과 캐나다의 절대 우세 속에 러시아, 이탈리아, 노르웨이 등이 한국과 대등한 전력을 갖고 있다. 미국이나 캐나다는 한국보다 아직 두 수 정도 위라는 것이 하 감독의 설명. 하지만 러시아와 이탈리아, 노르웨이와 함께 최근 전력이 급상승한 체코와 경쟁에서 이겨낸다면 평창에서 메달은 문제 없다는 분석이다.

"한국의 실력은 세계 5~6위권이라고 봐야죠. 한국이 B풀로 밀려나긴 했지만 일시적인 부진 때문에 잠시 밀려났던 것이고요. A풀에서 중위권 실력이라고 봐야죠. 하지만 러시아와 체코가 전력이 급상승했기 때문에 한국도 전력을 키울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야 합니다. 강원도청 실업팀 창단으로 발전을 이뤘듯이 또 하나의 실업팀 창단으로 다시 한번 발전에 속도를 붙어야죠."

▲ 연세 이글스의 하진헌 감독은 팀 창단 때부터 역사를 함께 했던 산증인이다. 창단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을 들락날락거리며 아이스슬레지하키의 정보와 훈련 방법을 습득했지만 지금은 일본을 제칠 정도가 됐다고 말한다.

하진헌 감독의 또 하나 바람이 있다면 역시 선수가 많아져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협회 차원의 홍보 대책이 절실하다.

장애인을 자녀로 둔 부모들은 아이스슬레지하키가 격렬해보여 자칫 위험한 스포츠가 아니냐고 걱정하는 경우가 많아 좀처럼 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종목과 마찬가지로 위험해보일 뿐이지, 장비를 다 갖추고 하기 때문에 절대 그렇지 않다. 그는 15년 넘게 아이스슬레지하키를 지도하면서 크게 다쳐서 문제가 됐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했다.

"학교팀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가장 아쉽죠. 우리 형편도 어려운데 학교팀을 지원해준다는 것은 언감생심이고요. 학교에서 팀을 창단한다는 의지를 갖고 지원만 한다면 우리가 나서서 도와줄 수도 있겠죠. 학교 장애인 선수 외에도 만약 아이스하키를 경험했던 후천적 장애인 선수가 있다면 아이스슬레지하키에 도전해봤으면 좋겠습니다. 큰 도움이 될거예요."

서울 연세 이글스는 클럽팀으로서 한계가 있음에도 그 명맥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그들 스스로 선구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연세 이글스는 어려운 운영 여건 속에서도 꿋꿋하게 팀을 지켜가고 있다. 하진헌 감독의 바람처럼 실업팀으로 변신한다면 한국 아이스슬레지하키는 또 한번의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취재후기] 역대 동계패럴림픽에서 한국이 메달을 딴 것은 스키 종목만으로 단 두 차례.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은메달)와 2010년 밴쿠버(은메달)에서였다. 한국은 2018년 동계올림픽과 동계패럴림픽을 유치했지만 아직 동계 장애인스포츠의 저변은 충분하지 못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이스슬레지하키의 첫 메달 획득 가능성은 고무적이다. 한 단계 더 성장한다면 메달권에 진입할 수 있는 실력인데 그것이 이뤄지지 않아 밴쿠버와 소치에서 모두 메달권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이를 위해서는 지원과 저변 확대가 절실하다. 한국 아이스하키가 '평창 프로젝트'를 통해 올림픽 자동출전권을 따냈듯이 아이스슬레지하키가 아이스하키가 했던  지원의 절반만 받는다면 미국과 캐나다를 제칠 수는 없어도 충분히 메달을 따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3년이 남았다.

tankpark@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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