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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규 교수의 풋볼 오디세이] (1) 아이비리그 '타협'에서 움튼 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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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규 교수의 풋볼 오디세이] (1) 아이비리그 '타협'에서 움튼 싹
  • 박경규
  • 승인 2015.03.26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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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축구의 탄생...럭비·축구와 비슷하지만 미국 대학생들이 머리 맞댄 타협의 산물

<편집자주> 해마다 2월을 맞으면서 미국은 북미프로풋볼리그(NFL) 슈퍼볼로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든다. 슈퍼볼이 지구촌에 생중계되지만 요즘 한국에서는 중계방송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운 현실이다. 럭비와 비슷하게 보이는 이 스포츠가 왜 미국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일까. 열정과 냉정이 맞물린 미식축구 이야기 속에서 그 매력을 따라잡아보자. 한국 미식축구 선구자 박경규 경북대 명예교수가 들려주는 풋볼 오딧세이와 동행한다.

[박경규 경북대 명예교수] 풋볼, 즉 미식축구가 미국에서 어떻게 생겨났는가. 세계 최초의 미식축구 경기는 어떤 것일까.

미국 인디애나주 사우스밴드에는 미식축구로 유명한 노틀댐대학이 있고 대학미식축구 명예의 전당이 자리하고 있다.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는 최초의 미식축구 경기는 1869년 11월 6일 뉴저지 뉴브룬스윅에서 벌어진 프린스턴과 럿걸즈의 경기로 돼 있다.

당시 경기는 지금의 미식축구와 아주 달랐다. 축구와 유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리처드 위팅엄은 자신의 저서 '가을 제전(Rites of Autumn)'에서 기술하고 있다.

"참가 선수는 각각 25명이었고 둥근 공을 사용했다. 발, 머리, 어깨로만 공을 전진시킬 수가 있었고 한 팀이 먼저 6점을 얻으면 경기는 종료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경기 시작 전에 각 팀의 2명이 상대 골대 앞으로 가서 대기하고 있는데 이들의 역할은 자신의 진영에서 볼이 오면 받아서 골포스트 사이로 득점을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마 오늘날 축구에는 골키퍼가 있어 볼을 방어하지만 이 경기는 그와 반대인 것 같다. 나머지 선수들은 팀별로 2그룹으로 나누었는데 한 그룹은 각각 정해진 지역을 방어하고 정해진 루트로만 달리는 필더로 불렸다. 불독이라고 부르는 다른 그룹은 구장 전체를 볼을 따라 다니며 플레이를 했다. 상대 팀이 접근을 못하게 하는 현재의 리드불록과 유사한 기능의 가진 역할을 하며 볼을 전진시켰는데 필자 역시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또 경기 내용 면에서는 럿걸즈 선수들이 볼을 둘러싸고 상대팀 선수들이 볼에 접근을 못하게 하면서 거칠게 전진을 했다. 럿걸즈의 6-4 승리로 기록돼 있다.

▲ 초창기 미식축구는 축구와 많이 닮아있었다고 한다. 프린스턴과 럿걸즈의 맞대결이 최초의 대학팀 맞대결로 기록된 이후 인근 아이비리그 대학이 참여하면서 오늘날의 미식축구로 발전하게 됐다. 사진은 최초의 미식축구 경기 상상도. [출처=리처드 위팅엄 저 '가을 제전(Rites of Autumn)']

실제로 이 경기는 미국에서 최초의 대학간 경기로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 경기 후에 인근의 다른 아이비 대학들이 참여하면서 오늘날의 미식축구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미국 대학생들의 부단한 노력과 타협 끝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이다. 미식축구의 기원은 영국의 럭비와 축구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지만 미국 대학생들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800년대 중반 남북전쟁 후 하버드, 콜럼비아 등과 같은 아이비리그 대학의 학생들은 영국에서 온 축구나 럭비를 무척 싫어했다. 이들은 축구나 럭비와 다른 어떤 다른 고유한 방법을 고안해 경기를 했다. 대학간 교류 경기 대신 대부분 교내 또는 학급간 경기를 통해 자기 대학 고유의 경기 방식으로 진행하면서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던 중 프린스턴과 럿걸즈의 대학간 경기가 벌어졌다. 이듬해인 1870년에는 콜롬비아대, 2년 뒤에는 예일대가 합류했다. 새로운 대학이 합류할 때마다 경기 방식 및 규칙이 서로 달라 다소 진통이 있었지만 1873년 각 대학 대표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통일된 규칙을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축구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하버드대는 자신들이 개발한 볼을 잡고 전진하는 일명 '보스톤 게임'이라는 경기를 고집하면서 타 대학들의 경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 영국에서 유래한 축구나 럭비를 싫어했던 아이비리그 대학생들에 의해 고안된 미식축구는 1876년 미식축구의 아버지인 워터 켐프가 예일대에 입학하면서 오늘날의 미식축구로 변화하게 된다. 사진은 '가을의 격투'로 불렸던 1870년대 초반의 대학 미식축구 경기.  [출처=리처드 위팅엄 저 '가을 제전(Rites of Autumn)']

1874년 하버드대가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는 맥길대와 3연전을 갖게 된다. 첫 경기는 하버드 룰에 따라 둥근 공으로 차고 잡고 뛰는 방식, 둘째 경기는 맥길대 방식으로 럭비공으로 럭비와 유사한 룰로 경기를 했다.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는 15명씩으로 합의했지만 두 번째 경기부터 11명으로 바뀌었다. 첫 경기에서 4명이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하버드대는 세 번째 경기에서 드롭킥을 허용하는 럭비와 유사한 룰을 받아들였다.

하버드대는 비록 규칙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듬해 11월 예일대와 경기를 갖게 되는데 경기장 길이는 140야드(128m), 폭은 70야드. 선수 숫자는 15명이었다. 이날 관중은 2000명이었고 입장료는 50센트였다니 당시로는 무척 비싼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경기는 하버드대의 4-0 승리.

이런 과도기를 거쳐 1876년 하버드대와 기존의 4개 대학이 모여 럭비를 모방한 규칙을 만들어냈다. 주요 내용은 볼을 잡고 전진이 가능하고 또한 킥도 가능한 것이지만 여전히 엉성했다. 또한 이들은 대학축구협회(Intercollegiate Football Association)을 결성하게 되는데 이 협회는 1895년까지 지속됐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그해 미식축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워터 캠프가 예일대에 입학한 것이다. 미식축구는 그로 인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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