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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규 교수의 풋볼 오디세이] (3) '가을 고릴라'들이 점령한 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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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규 교수의 풋볼 오디세이] (3) '가을 고릴라'들이 점령한 제전
  • 박경규
  • 승인 2015.04.10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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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해마다 2월을 맞으면서 미국은 북미프로풋볼리그(NFL) 슈퍼볼로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든다. 슈퍼볼이 지구촌에 생중계되지만 요즘 한국에서는 중계방송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운 현실이다. 럭비와 비슷하게 보이는 이 스포츠가 왜 미국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일까. 열정과 냉정이 맞물린 미식축구 이야기 속에서 그 매력을 따라잡아보자. 한국 미식축구 선구자 박경규 경북대 명예교수가 들려주는 풋볼 오딧세이와 동행한다.

[박경규 경북대 명예교수] 미식축구는 1890년대 들어 아이비리그를 벗어나 미국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1892년에는 서부까지 전파돼 캘리포니아 주립대와 스탠포드대의 경기가 벌어지기도 했다.

1894년에는 지금의 대서양해안리그(ACC)와 남동컨퍼런스(SEC)의 전신인 남동대학선수협회(SIAA)가 앨라배마, 어번, 조지아텍 등을 중심으로 결성됐다. 이듬해에는 중서부의 시카고, 미시간, 일리노이를 중심으로 빅텐(Big10) 컨퍼런스가 조직됐다.

1902년 1월 1일에는 미시간대와 스탠포드대가 패서디나의 토너먼트 파크에서 맞붙었다. 이 맞대결이 바로 패서디나 로즈볼 스타디움에서 벌어지는 대학풋볼 포스트시즌인 로즈볼의 첫 대회였다. 여기에 하버드대에는 3만명 수용 규모의 콘크리트 스타디움이 만들어지는 등 미식축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 미식축구는 1890년대 들어 아이비리그 대학을 벗어나 미국 전역으로 전파되면서 본격적인 중흥기를 맞는다. 당시 남자 대학생이라면 당연히 미식축구를 해야했고 미식축구를 통해 남자다움을 인정받았다. 사진은 2007년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한국과 호주의 미식축구 경기. [사진=박경규 교수 제공]

◆ 패드 등 보호장구 착용하면 놀림감…잔인한 남성 스포츠의 폐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남자라면 반드시 미식축구를 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특히 미식축구를 하는 남학생이 여자에게 남자로 인정받는 시절이었다.

이처럼 미식축구의 인기는 학생과 팬들에게는 즐거움을 주었지만 교육자, 학부모들에게는 걱정거리였다.

당시 미식축구는 포워드패스(forward pass)가 없는 경기로 세 차례 공격에 5야드를 전진하면 다시 공격권을 얻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 수비수를 쓰러뜨리고 앞으로 전진만 했다.

매년 가장 좋은 활약을 펼친 대학 미식축구 선수에게 주어지는 하이즈먼 트로피로 잘 알려진 존 하이즈먼은 1887년부터 1891년까지 브라운대과 펜실베니아대에서 선수생활을 했는데 당시 미식축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미식축구 선수들은 철인이었지. 1주일에 2경기를 치르곤 했는데 경기 중 교체는 허용되지 않았어. 아주 심하게 부상을 입거나 주장에게 부상당했다고 애원을 해야 겨우 경기장 밖으로 나갈 수 있었지. 우리 팀 주장은 내게 귓속말로 '네 팔이나 목이 부러지도록 해야해'라고 말하곤 했어. 간혹 집에서 만든 패드를 유니폼 안에 넣고 경기을 하면 선수들은 계집아이라고 놀림감이 됐지. 헬멧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대신 가을 시즌에 대비해 6월부터는 머리카락을 깎지 않았지. 머리카락이 머리의 쿠션 역할을 했으니까. 가을이 되면 우리들은 마치 고릴라와 같았어. 수비는 볼을 가진 러너의 옷, 팔, 머리카락 어디를 잡아도 좋았지. 또한 공격수들도 러너를 좀 더 나가게 하려고 밀어 당기고 끌고 갔어. 정말 아수라장이었지."

▲ 19세기말 미식축구를 하는 학생들은 패드를 유니폼 안에 넣으면 계집아이라고 놀림감이 됐고 헬멧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사진은 1890년대에 나타난 헬멧과 얼굴 보호대. [출처=제임스 버클리 저 '풋볼']

◆ 미식축구 폐지 움직임, 대통령 경고로 규칙 개정

미식축구 인기와 비례하게 경기는 더 잔혹해졌다. 최근 인기있는 격투기보다 더 격렬했다. 통계자료를 인용한 당시 보도에 의하면 1905년에 18명이 죽고 159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또 20여년 동안 300여명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자연스럽게 여론이 악화됐다. 국회에서는 미식축구를 금지시키자는 논의가 시작됐고 캘리포니아대는 미식축구를 럭비로 바꿨다. 콜롬비아대 역시 미식축구팀을 해체했다.

당시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식축구 팬이었지만 국회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1906년 루즈벨트 대통령은 마침내 예일대 코치였던 워터 캠프를 비롯해 하버드대, 프린스턴대 대표자들을 백악관으로 불렀다. 난폭하고 잔인한 스포츠로 알려진 미식축구를 보다 안전한 스포츠로 개혁하지 않으면 금지시키겠다고 경고를 했던 것이다.

대통령의 경고는 즉시 효과를 봤다. 기존의 대학풋볼협회(IFA)와 다른 28개 대학이 육군사관학교의 팔머 피어스 대위를 위원장으로 하는 컨퍼런스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1906년 피어스 대위는 IFA 위원장인 캠프와 만나 기존의 조직을 해체하고 새롭게 대학풋볼규칙위원회(Intercollegiate Football Rule Committee·IFRC)를 결성했다. 이 조직은 4년 후 미국대학스포츠협회(National Collegiate Athletic Association·NCAA)로 개편된다. 안전한 미식축구를 위해 만든 조직이 지금은 미국대학의 모든 스포츠를 관할하는 공룡조직이 된다.

IFRC는 먼저 포워드패스를 허용하고 공격팀의 퍼스트다운 요건을 5야드에서 10야드로 개편했다. 1912년에는 공격 기회를 3번에서 4번으로 바꿨고 플라잉태클을 금지시켰다. 또 싸움을 하거나 무릎으로 상대를 가격하는 선수는 가차없이 퇴장시켰다.

▲ 미식축구가 점차 잔혹해지면서 경기장에서 목숨을 잃는 선수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대통령의 경고에 규칙을 개정하면서 안전한 경기로 변모했다. 사진은 1910년대말 미식축구 경기. [출처='풋볼북']

 

■ 필자 박경규 명예교수는?

1948년생. 1966년 서울대학교에서 미식축구를 시작해 경북대학교 교수로 재임 중이던 1983년 경북대 미식축구부를 창단, 직접 감독을 맡아오고 있다. 1989년 한일대학교류전에서 한국 대표팀을 이끌었다. 1999년 국제미식축구연맹 창립에 관여했고 2005~2011년 대한미식축구협회장을 역임했다. 2013년 정년 퇴임 후에도 아시아미식축구연맹 회장과 경북대 미식축구부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초보자도 쉽게 알 수 있는 미식축구' '그림과 함께 이해하는 미식축구 규칙해설' 등 다수의 미식축구 관련 저서를 집필했다.

kkpark@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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