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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생각] A매치의 진화와 슈틸리케의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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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생각] A매치의 진화와 슈틸리케의 상상력
  • 김한석
  • 승인 2015.04.10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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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김한석 스포츠국장] 2015년 봄. 한국축구 남녀 대표팀이 국내에서 유례없이 릴레이로 A매치를 2연전씩 치렀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이끄는 남자 대표팀은 호주 아시안컵 준우승의 감흥이 채 가시지 않은 가운데 오는 6월 시작되는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을 앞두고 2연전을 가졌다. 윤덕여 감독이 지휘하는 여자 대표팀은 실로 17년 만에 국내에서 단일 A매치를 치르며 두 달 앞으로 다가온 2015 캐나다 여자월드컵 본선에 대비해 소중한 최종 점검 기회를 가졌다.

한국축구는 A매치 변곡점에 서 있다. 2015년 봄맞이 릴레이 남녀 A매치가 갖는 의미는 새로운 출발에서 찾을 수 있다.

남자 대표팀의 경우는 국제축구연맹(FIFA)의 A매치 소집일정 변경과 2018 월드컵 아시아 예선- 2019 아시안컵 예선의 통합에 따른 시스템 변화로 올해부터 A매치 폭이 줄어들게 된다. 선택과 집중이 중요해졌고 흥행과 경기력 향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좇는 치밀한 전략 수립이 더욱 필요해졌다.

▲ A매치 환경 변화로 한국축구가 변곡점에 섰다. 부임 이후 보여준 슈틸리케 감독의 상상력이라면 A매치의 스토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 것으로 기대된다. 사진은 지난달 17일 올해 첫 A매치를 앞두고 대표팀 명단을 발표하고 있는 슈틸리케 감독. [사진=스포츠Q DB]

여자 대표팀은 12년 만에 본선 진출을 이룬 여자월드컵을 통해 도약을 노리는 단계에서 A매치의 효용성이 부각되고 있다. 특히 지난달 한국의 2019 여자월드컵 유치 실패를 계기로 여자축구 저변 확대와 세계적 수준을 지향하는 경기력 확보 등 펀더멘털 재구축이 중요해진 터라 A매치 확대가 절실하다.

1948년 런던 올림픽을 통해 국제무대에 데뷔한 한국축구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A매치의 성장을 이뤄냈다. 굴곡도 많았지만 세계적인 흐름에 뒤늦게나마 발맞춰 성장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그 결과 A매치는 대한축구협회의 1년 예산 1000억원대 시대를 이끌어내는 축구산업의 전위병이 될 수 있었다.

한 국가의 가장 우수한 축구선수들이 출전하는 국가대표팀간 경기인 A매치(International A Match)란 개념이 확고하게 적용되기 전까지 한국축구는 월드컵, 아시안컵, 아시안게임 등 정식대회 외에 외국 클럽과 초청경기가 흥행을 부르는 효자손이 됐다.

#01 월드컵 유치 논리에 가려진 비정상의 시대

국제축구계에선 1991년부터 A매치가 본격적으로 적용됐다. 유럽 남미가 아시아와 대표팀간 교류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1978년 재팬컵을 통해 본격적으로 해외 유명 클럽을 초청했으나 1991년 A매치 대회로 발바꿈했다. 1972년부터 해마다 개최했던 한일정기전도 1991년으로 끝내고 시야를 유럽과 남미 대표팀으로 넓혔다. 재팬컵의 후신인 기린컵에선 1991년 아르헨티나를 초대해 경쟁력을 강화했다. 이듬해 처음으로 아시안컵까지 제패한 일본이다.

한국은 1962년 브라질 마두레이아 초청 경기를 시작으로 1970~1980년대 러시를 이뤘던 유럽 남미 클럽의 초청 경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한축구협회는 한국의 첫 센추리클럽(A매치 100회 이상 출장) 헌액 대상자로 최순호의 A매치 기록을 FIFA와 서로 체크하는 과정에서 A매치의 중요성을 인정하고도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명분은 2002년 월드컵 유치 작업의 일환으로 전 세계에 한국축구를 알리기 위해 유명 클럽들의 초청이 필요하다는 것. 1995년부터 정부의 지원 속에 11차례 외국 대표팀과 클럽을 초청했다. 당시 그 비용은 1000만 달러선으로 추정됐다.

1995년 9월 마라도나가 속한 보카 주니어스를 초청했다. 개최지 발표를 코앞에 둔 1996년 5월에는 이탈리아의 양대 명문클럽 AC밀란과 유벤투스와 잠실에서 초청경기를 가졌다.

▲ A매치의 진화는 거듭돼 2011년부터는 월드컵경기장이 아닌 수도권지역 도시로 문호가 개방됐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10일 천안종합운동장에서 슈틸리케 감독의 데뷔전으로 치러진 파라과이전에서 골을 넣은 뒤 환호하는 한국 대표선수들. [사진=스포츠Q DB]

반면 일본은 1995년 잉글랜드에서 단일대회로 마련된 엄브로컵에 출전, 잉글랜드, 브라질, 스웨덴을 상대로 당당히 경쟁력을 시험했다. 아시아국가가 이렇게 단일 친선대회에서 세계 강호들과 연속 경기를 벌인 적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월드컵 유치만이 최대의 지상과제였다. 당시 대한축구협회 고위 관계자에게 ‘월드컵 하겠다는 나라에서 언제까지 대표팀이 클럽 초청경기에 내몰려야 하는지’하고 문제 제기를 할 때마다 “월드컵 유치하면 무조건 A매치로 돌아선다”는 답만 매번 돌아왔다.

필자는 유벤투스전을 잠실에서 취재한 뒤 이튿날 스위스 취리히로 건너갔고 FIFA 집행위원회 결과 마침내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 결정을 현장에서 접했다. 막바로 영국으로 건너가 유럽축구선수권인 유로96를 현장 취재하면서 한일 공동개최와 관련해 질문해오는 프랑스 기자에게 반문했다. 이탈리아 빅 클럽들이 얼마 전 한국대표팀에 연패한 사실을 아느냐고. 그는 몰랐다. 유럽 클럽이 시즌이 끝난 뒤 아시아, 미주 투어를 가서 관광을 겸해 친선경기를 치르기에 크게 주시하지 않는다는 것. 유럽선수권 개막 분위기가 유럽을 달구고 있는 시기에는 더더욱. 그는 오히려 일본의 수준에 관심이 컸다. 1년 전 잉글랜드에 1-2로 지고 스웨덴과 2-2로 비기는 등 선전해 왜 일본이 아시아챔피언인지 알게 됐다고 했다.

대표팀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상대팀의 성격을 파악하기보다는 월드컵 유치 붐을 고조시키는 차원의 정치공학적 실적주의에 치우쳤던 진통기다. 월드컵을 앞둔 평가전마저 외국 클럽을 상대로 해야 했던 때다. A매치의 경쟁력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돈은 돈대로 쓰고도 국내용, 전시용이란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비정상의 시대였다.

#02 뒤늦게 축구산업 키운 정상의 시대

월드컵 개최지 발표 하루 뒤인 슈투트가르트전이 수원에서 예정대로 열린 뒤로는 한국축구에서 클럽과 벌이는 대표팀 공식경기는 사라졌다. 유럽과 남미에서 모두 70여개 클럽이 한국대표팀과 벌인 클럽대항 시대가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IMF 외환위기가 몰아닥친 1998년 상반기 호주, 유럽 전지훈련에서 현지 클럽팀과 벌인 평가전을 제외하고는 적어도 국내에서 공식경기는 모두 A매치로 치러오고 있다.

2001년 월드컵경기장들이 속속 개장한 뒤 세계 강호들과 초청경기까지 성사되면서 A매치의 질적 발전이 급속히 이뤄지기 시작했다. 특히 2002 월드컵 직전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프랑스와 연이어 벌인 평가전은 히딩크호의 돌풍을 예고하는 귀중한 담금질이 됐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한 뒤에는 10개 월드컵경기장을 전용으로 활용해 A매치의 활용도를 넓혀갔다. 유럽파가 늘어나면서 원정경기가 아니라 제3국에서 단발로 실전을 치르고 해산하는 새로운 A매치 모델도 개척했다. 2007년 2월 런던에서 그리스와 제3국 A매치를 벌인 것을 시작으로 세르비아, 코트디부아르, 크로아티아(이상 런던), 스페인(베른) 러시아(두바이)와 대결하며 유럽파들을 중심으로 전력을 점검하는 기회를 가졌다.

▲ 지난달 27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우즈베키스탄과 평가전에서 백혈병과 싸우는 이광종 전 올림픽대표팀 감독의 쾌유를 비는 뜻에서 슈틸리케 감독의 아이디어로 '우리에게 돌아오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센터서클에서 도열해 응원의 박수를 치고 있는 한국 대표팀. [사진=스포츠Q DB]

2011년부터는 국내 개최 A매치 장소도 월드컵경기장이 아닌 곳으로 다변화되기 시작했다. 고양(3경기) 안양(1경기) 화성(2경기) 천안(2경기) 부천(1경기) 등 수도권 지역 도시가 지자체의 노력과 축구열기를 앞세워 유치에 성공했다.

한국축구가 10개 월드컵경기장의 인프라 활용, 대표팀 차출의 국제교섭 노하우 축적, 상대팀의 대륙별 안배 등을 통해 A매치의 틀이 정착된 시기였다. 축구산업적인 개념으로 A매치를 바라보기 시작해 메인 키트 서플라이어의 연간 후원금도 150억원까지 늘어났다.

#03 슈틸리케 감독의 상상력

향후 A매치에 내심 기대를 걸게 하는 것은 ‘비정상의 시대’에서 ‘정상의 시대’로 넘어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울리 슈틸리케라는 남다른 감독이 있는 까닭이다. 지난해 9월 한국 축구대표팀 사령탑으로 부임한 슈틸리케 감독은 그동안 멋진 상상력으로 큰 인상을 남겼다.

선수들을 치밀하게 분석도 하지만 그들의 용기를 깨우는데 탁월한 힘이 돋보인다. 지난 1월 호주 아시안컵에서 슈틸리케 감독이 대한축구협회에 요청해 만든 동영상을 통해 보여준 리더십이 대표적이다. 준결승을 앞두고 난치병 환자를 돕는 봉사활동을 담은 영상을 선수들에게 보여주면서 ‘여러분들이 흘린 땀방울이 이들을 기쁘게 하고 희망을 전해줄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결승을 앞두고는 미용관리사, 통신사판매원 등 호주에 이민 와서 어렵게 살아가는 교민들의 인터뷰 영상을 보여주면서 투혼을 자극했다. '대한민국은 지금 여러분들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는 엔딩 자막과 함께.

지난달 27일 대전에서 열린 우즈베키스탄전에선 백혈병과 싸우고 있는 이광종 전 올림픽대표팀 감독의 쾌유를 비는 응원 세리머니가 펼쳐졌다. 슈틸리케 감독의 아이디어로 선수들은 ‘우리에게 돌아오라’는 문구와 이광종 감독의 얼굴이 새겨진 단체 티셔츠를 입고 센터서클에 도열해 28년 만에 아시안게임 우승을 이끈 언성 히어로(Unsung Heroㆍ소리 없는 영웅)를 응원했다.

나흘 뒤 뉴질랜드전에선 국가대표팀을 떠나는 차두리가 단순한 은퇴식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슈틸리케 감독의 배려 속에 은퇴경기로 아름다운 피날레를 장식할 수 있었다. 2013년 이영표가 A매치에서 피치도 밟지 못하고 쓸쓸한 은퇴식만으로 작별을 고한 것과 묘한 대조를 이뤘다.

지난해 12월 제주도에서 가진 자체 청백전도 슈틸리케 감독의 제안에 따라 불우이웃돕기 자선경기로 열린 것도 팬들의 볼 권리에 부응하고 나눔을 실천한 사례. 축구를 통해 팬들과 끊임없이 공감하고 또 나눔과 배려를 실천하는 그의 의지는 화수분처럼 마르지 않는다.

▲ 지난달 3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뉴질랜드전에서 슈틸리케 감독의 배려로 전반 43분까지 뛰며 은퇴경기를 치른 차두리가 관중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사진=스포츠Q DB]

지난해 브라질 월드컵의 추락 이후 대한축구협회는 팬들과 소통을 강화했다. ‘I’m KFAN’ 프로그램으로 팬들의 참여를 넓히고 대표팀 오픈 트레이닝도 도입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소통하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선다. 유소년, 아마추어, K리그 현장 등으로 전방위 행보를 넓혀 한국축구의 저변과 문화를 익히면서 아이디어를 내놓고 그 실현책도 고민한다. 여자축구대표팀 A매치 현장도 찾아 윤덕여 감독을 격려하며 여자월드컵 출정을 축하했다.

축구협회 관계자들도 슈틸리케 감독의 이런 축구 열정과 소통력에 매료됐다. “슈틸리케 감독과 함께 일하기 편하다”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04 A매치의 변곡점, 새로운 대응논리는

올해 FIFA의 A매치 규정이 새롭게 바뀌었다. A매치 데이가 아니라 A매치 주간으로 운영 폭이 다소 완화됐지만 친선 A매치 가용일수는 오히려 줄어들게 됐다. 더욱이 6월부터는 월드컵과 아시안컵 예선이 통합해 치러지기 때문에 친선 A매치를 치를 수 있는 날짜가 대폭 축소된다. 강호와 친선 A매치는 더욱 희소성이 높아지고, FIFA랭킹이 낮은 국가를 상대하는 아시아 예선전은 관심도가 떨어지게 돼 양극화가 예상된다.

여기에서 슈틸리케 감독의 역할에 주목한다.

A매치 축소 트렌드도 유럽축구의 파워논리와 맞닿아 있다. 1970~1980년대만 해도 1년에 친선 A매치를 5경기 이상 치르는 유럽 국가는 드물었다. 국가대표팀 경기는 월드컵과 유럽선수권 예선이면 족하고 자국 리그의 활성화가 더 중요하다는 시각이며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힘의 논리를 잘 아는 이가 슈틸리케 감독이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스타 수비수로 명성을 쌓았기에 강자의 논리에 익숙하다. 반대로 아프리카, 중동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면서 변방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다. 지난달 김진수의 차출을 놓고 독일 호펜하임과 독일 언론까지 활용해 밀당을 할 줄도 아는 슈틸리케다. 강자에 대한 대응논리도 갖춘 그이기에 강단있는 A매치 운영도 기대된다.

이름값이 아니라 자신이 본 것만을 믿는 실용주의자이기에 A매치 선수운용 폭도 넓어질 것이다. A매치 흥행이나 경기 결과에 미칠 불안요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한다는 컬러가 자리잡는다면 슈틸리케호의 강인한 브랜드로 팬들의 뇌리에 각인될 것이다.

물론 슈틸리케 감독이 내건 ‘FIFA 랭킹 50위 이내 진입 목표’ 약속이 지켜지도록 축구협회가 선택과 집중의 교섭력을 더욱 끌어올려 지원해야 하는 기본전제가 따른다.

▲ 슈틸리케 남자대표팀 감독이 지난 5일 인천축구전용구장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17년 만에 국내에서 A매치 평가전을 갖는 윤덕여 여자대표팀 감독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스포츠Q DB]

9일 대한축구협회는 ‘2014 브라질월드컵 한국대표팀 출전백서’를 펴냈다. 사상 최초의 월드컵 참가 평가서다. 이 백서에 나타난 시행착오를 슈틸리케 감독과 공유, 분석하면서 2018 러시아월드컵을 향한 A매치 로드맵을 치밀하게 짜야 한다.

오는 14일 아시아축구연맹은 월드컵과 아시안컵 통합 예선 조추첨식을 갖는다. A매치의 상대에 따른 대응 시나리오와 틈새 A매치 가능성을 찾아 미리미리 교섭력을 강화해 나간다면 2018 월드컵 백서는 긍정적인 이야기로 채워질 것이다.

경기력이라는 콘텐츠에 슈틸리케 감독의 풍성한 상상력까지 보태진다면 팬들은 더욱 감동적인 A매치 스토리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편집자주> 필자는 1990년부터 스포츠서울 축구기자로 활동하며 잉글랜드 유로 96, 1998 프랑스 월드컵. 1999 미국 여자월드컵, 2002 한·일 월드컵 등을 현장 취재했다. 한국축구 명예의 전당 선정위원, K리그 30주년 레전드 선정위원을 맡았으며 FIFA-발롱도르 한국 대표 선정위원으로 활동했다. 제21회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hans@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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