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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스페셜] 개척자 방상아 피겨사랑 40년, '가지 않는 길' 간다는 것은?(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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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스페셜] 개척자 방상아 피겨사랑 40년, '가지 않는 길' 간다는 것은?(上)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5.04.16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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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상아 피겨 해설위원...'피겨, 왜 하니?' 혹한보다 더한 냉대 이겨낸 한국 피겨 개척시대를 말하다

[300자 Tip!] 피겨스케이팅은 인기 종목일까, 비인기 종목일까. 김연아(25)가 은퇴하기 전만 해도 피겨 스케이팅은 분명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그 인기는 오직 김연아에만 국한됐다. 김연아가 없는 한국 피겨스케이팅은 다시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그럼에도 한국 피겨스케이팅은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박소연(18·신목고)과 김해진(18·과천고)이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도전장을 던졌고 그 뒤에 있는 어린 선수들도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 피겨의 저변이 넓어진 것은 김연아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김연아 이전에는 누가 있었을까. 김연아가 나오기 전까지 한국 피겨의 도약을 위해 노력하고 희생했던 세대가 있다. 온갖 설움을 받은 개척 세대가 바로 지금의 뿌리다. 피겨해설로 유명한 방상아(48) SBS 해설위원도 그 프런티어 세대다.

▲ 방상아 해설위원은 빙상 명문으로 유명한 리라초등학교에서 처음 피겨에 입문한 뒤 40년 가까이 피겨계를 떠난 적이 없다. 피겨는 그의 인생이다.

[잠실=스포츠Q 글 박상현·사진 이상민 기자] 현재 한국에는 적지 않은 피겨스케이팅 지도자들이 있다. 방상아 해설위원의 원래 직업도 피겨를 가르치는 지도자다. 피겨 국가대표를 지냈던 그는 현역에서 은퇴한 뒤 목동아이스링크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지도자의 길에 들어서 지금도 과천과 잠실 롯데월드 링크에서 피겨 꿈나무들을 지도하고 있다.

1993년부터 2013년까지 20년 동안 국가대표와 국가대표 후보선수를 거쳐 꿈나무를 지도했고 대한빙상경기연맹 기술위원을 역임했다. 2008년 1월부터는 서울시빙상경기연맹 기술위원으로도 활약하고 있으며 2012년부터는 수원시빙상경기연맹 부회장까지 맡았다. 또 숭실대학교 겸임교수이기도 하다.

또 국내 기술심판(스페셜리스트)인 그의 또 다른 직함은 SBS 해설위원이다. 2000년 처음 마이크를 잡기 시작해 벌써 15년째 피겨 해설을 해오고 있다.

그가 걸어왔던 길을 보면 피겨 분야를 개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이 선수로 뛰는 것조차 기피하던 1970년대에 방상아 해설위원은 피겨에 입문했다. 당시 피겨는 비인기 그 이상으로 생소한 종목이었다. 방 위원과 같은 개척자가 있었기에 김연아가 나왔고 김해진, 박소연에 이어 많은 선수들이 링크를 지치며 꿈을 키우고 있다.

◆ 설움 많았던 1970년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피겨 왜 하니?"

방상아 위원은 빙상 명문인 서울 리라초등학교를 나왔다. 리라초는 빙상뿐 아니라 골프 등 여러 스포츠 종목을 학생들에게 권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에서 뛰었던 박지은도 바로 이 학교 출신이다.

방 위원은 리라초등학교에서 스피드스케이팅을 했던 오빠를 따라 유치원 때부터 빙상과 인연을 맺었고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본격적으로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했다. 남자는 스피드스케이팅, 여자는 피겨스케이팅으로 나뉘어졌던 때였다.

▲ 방상아 해설위원은 학창시절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활약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피겨를 왜 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위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진하면서 한국 피겨의 개척자가 됐다.

"제가 피겨스케이팅을 하고 싶다고 졸랐어요. 제가 하고 싶어하는 것은 시켜주시던 부모님이셨기 때문에 피겨를 할 수 있게 됐죠. 집이 부유한 편은 아니었지만 오빠도 스피드스케이팅을 했고 막내 외삼촌도 용산고 스피드스케이팅 선수셨기 때문에 피겨스케이팅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었어요. 마냥 좋아서 얼음을 탔죠."

방상아 위원은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링크를 다녔다. 하지만 동대문링크는 얼음 얼리는 전기료 문제 때문에 여름에는 운영하지 않았다. 초봄만 되어도 얼음판은 물바다가 됐다. 한번 넘어지면 옷이 흠뻑 젖었다. 또 통행금지 시간이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오전 5시 대관시간에 맞추기 위해 동대문 근처 호텔을 잡아 훈련을 하기도 했다. 눈만 뜨면 어느새 옷을 입고 링크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다가 피겨스케이팅에 싫증을 생겨 잠시 그만두기도 했다.

동대문링크가 문을 닫은 뒤에는 야외에서 훈련을 했다. 어린이회관 야외 스케이트장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훈련을 해야 했다. 추위를 이겨가면서 점프를 뛰고 스핀을 돌아야 했다. 그나마 눈이 오면 훈련을 못했다. 추운 것까지는 좋았다. 이보다 더 힘들게 한 것은 온갖 설움이었다. 그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피겨, 그거 왜 하니"였다고 한다.

"대학에 들어가야 하는데 피겨스케이팅을 했다고 해서 받아주는 학교가 없었어요. 열심히 운동했는데 피겨스케이팅으로는 대학을 갈 수가 없었죠. 그만큼 비전과 미래가 없는 종목이었어요. 게다가 여성이 스포츠를 한다는 것은 유교사상이 엄격했던 1970, 1980년대였기에 인식이 좋지 않았죠. 선수하면 시집가기도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던 때였으니까요. 그런데 피겨스케이팅이라는 비전 없는 종목을 했으니 오죽했겠어요. 그런데도 '내가 있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부모님께서도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왜 가느냐가 아니라, 그 분야에서 개척자가 되라는 말을 해주셨기 때문에 용기를 얻었어요."

▲ 방상아 해설위원은 현역시절 설움과 아쉬움을 많이 받았다. 비인기종목의 설움과 함께 외국에 나가서 선진 기술을 배웠더라면 조금 더 발전했을 것이라는 진한 아쉬움을 늘 가슴 속에 안고 있다.

◆ 선수로 뛰면서 가장 큰 아쉬움, "일찍 해외에 나갔더라면"

설움 뒤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개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한국의 피겨 수준은 너무나 낮았다. 방상아 해설위원이 뛰었던 시절은 카타리나 비트가 전세계를 주름잡고 이토 미도리가 활약했던 때였다. 방 위원은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할 정도가 되지 못해 비트나 이토와 함께 경쟁한 적은 없었지만 이토와 같은 경기장에서 훈련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국제대회에 나가 느낀 것은 피겨 선수로서 느끼는 아쉬움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피겨는 인기를 몰고 다니는 종목이지만 한국은 그렇지 못했다.

"대회 출전을 위해 외국에 나가면 한국과 상황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한국에서는 대접도 받지 못하는 환경이니 성적이 좋을래야 좋을 수도 없었죠. 스케이트 두 켤레 들고 버스 타고 링크까지 와서 훈련하는 그런 환경이었으니까요. 그런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너무나 많았어요."

방상아 위원은 외국에서 훈련을 했더라면 조금 더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슴 속에 묻고 지냈다. 선수 수요가 없었던 이유도 있지만 지도자가 워낙 드물었기에 선진 기술을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외국에 일찍 나가서 기술을 익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렸을 때는 특권 계층의 자녀가 피겨스케이팅을 하는 경우가 많아 외국에 나가서 기술을 배워오곤 했는데 성과가 좋지 못했어요. 부유한 사람이 아니면 외국에 나가기 힘들었고 나가는 것도 꺼려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외국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아예 봉쇄됐던 셈이죠. 이에 비하면 지금은 참 환경이 좋아요."

▲ 피겨 해설자로도 더 친숙한 방상아 해설위원은 현재 잠실 등에서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해설위원이자 대학 겸임교수이고 기술 심판이기도 한 그의 본업은 피겨 지도자다.

[SQ스페셜] 해설가 방상아가 보는 '포스트 연아 시대'의 미래(下)로 이어집니다.

tankpark@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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