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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생각] 시간과의 전쟁, '러닝타임' 둘러싼 함수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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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생각] 시간과의 전쟁, '러닝타임' 둘러싼 함수관계
  • 용원중 기자
  • 승인 2015.04.29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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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용원중기자] #장면 1. 워싱턴 포스트의 지난 6일자 기사에 따르면, 미국 내 메이저리그 팬의 평균 연령은 53세로, 47세인 NFL과 37세인 NBA에 비해 크게 높았다(ESPN 조사). TV 시청자 중 55세 이상의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50%로, 10년 사이 9%가 늘었다(닐슨 분석). 젊은 세대가 3시간 가까이 하는 야구를 지루하다고 느끼면서 팬의 고령화가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메이저리그 위기 이유 중 하나로 ‘경기 시간’을 꼽은 것이다.

# 장면 2.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제작자인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는 최근 자신의 트위터에 “스마트 기기의 발전으로 5분만 넘어가면 지루하게 느끼는 세대. 영화도 이 젊은 세대의 변화를 감지해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이어 “감독과 가장 많이 부딪치는 경우가 러닝타임 문제다. 대개 감독들은 상영시간이 길더라도 자신의 표현들을 다 담기를 원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영화가 100분 이상 넘지 않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는데 무수히 리트윗됐다.

◆ 명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대부’ ‘원스 어폰...’ 3~4시간에도 체감은 무난

그렇다면 영화 관계자들은 이상적인 러닝타임을 얼마로 볼까. 영화를 직접 만드는 감독들 상당수는 “영화만 재미있으면 물리적인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 러닝타임 3~4시간을 훌쩍 넘은 명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대부'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고전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3시간42분에 이르며, ‘대부’와 ‘대부2’는 각각 2시간55분, 3시간20분이다. 30여년 만에 원래의 분량으로 복원돼 최근 국내 재개봉된 갱스터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무려 4시간11분이다. 상영 도중 오페라·뮤지컬 공연처럼 10분간 인터미션(휴식시간)이 있다. 그럼에도 중장년층 관객이 대거 몰리며 개봉 첫째 주와 둘째 주말 평균 좌석점유율이 30%를 넘겼다. 피터 잭슨 감독의 SF 판타지 ‘반지의 제왕’ 시리즈도 3시간에 조금 못 미친다. 가장 긴 3편 ‘왕의 귀환’은 3시간19분이다.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선사한 위의 사례만 본다면 감독들의 주장은 설득력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들 작품은 마스터피스다. 방대한 서사와 등장인물, 무수히 많은 사건을 완성도 높게 표현한 걸작이라 적어도 선택한 이들은 빠져들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물리적 시간’은 길었으나, ‘체감시간’은 그 정도로 길지 않았던 셈이다.

◆ 이상적 상영시간 1시간45분...마지노선 2시간7~8분

영화 관계자들은 극장이라는 밀폐된 공간 속 움직임마저 제한된 상태에서 최적의 관람 시간을 1시간45분 내외로 본다. 이 정도 길이면 도입부에 자막을 붙이고, 캐릭터를 설명하고, 서사의 기승전결을 풀어내고, 엔딩 크레딧까지 충분히 담아낼 수 있다는 판단이다. 관객 입장에선 불편함 없이 몰입할 수 있는 ‘딱 좋은’ 시간이기도 하다. 이보다 적은 1시간30분 안쪽이면 중편영화 취급을 받기 쉬우며, 관객 입장에선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수가 있다.

▲ 영화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문화활동이다. 사진은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사진=CGV 제공]

또 관객수, 흥행수익과 직결되는 회차의 문제가 있다. 오전 9시30분 첫 회부터 오후 8시50분 마지막 회까지 6회를 걸 수가 있다. 러닝타임 2시간이 넘어갈 경우 4회 밖에 상영을 못한다. 이광희 서울극장 프로그램 팀장은 “과거에는 개봉 이후 2주 상영은 유지됐는데 요즘은 개봉 주 흥행이 저조하면 곧바로 스크린 수를 대폭 축소하거나 아예 내려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므로 상영시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이상적 러닝타임은 분명 존재하나 예외가 있게 마련이다. 영화의 스타일과 규모가 고려 요인으로 작용한다.

◆ 예술영화·블록버스터 ‘길고’, 속도감 중요한 장르영화 ‘짧아’

문학적 깊이가 있거나 사유가 필요한 작품의 상영시간이 긴 편이라면 장르영화(서부극·공포·코미디·스릴러·액션영화처럼 장르의 관습에 의존하는 상업영화)는 짧다. 범죄드라마 ‘차이나타운’(러닝타임 1시간50분)을 제작한 안은미 폴룩스픽쳐스 대표는 “액션, 코미디, 로맨틱 코미디와 같은 장르영화는 속도감이 주는 효과가 크므로 압축미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블록버스터 영화도 일종의 ‘예외 조항’이다. 예전부터 수백만 달러의 제작비를 투입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2시간을 넘기는 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국내 영화계의 경우 시장이 작고, 자본이 풍부하지 못했던 시기를 지나 2000년대 이후 제작비 100억~200억원을 투입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 속속 나오면서 대부분 2시간이 넘어가게 됐다. ‘태극기 휘날리며’ ‘마이웨이’ ‘도둑들’ ‘광해, 왕이 된 남자’ ‘명량’ ‘군도’ ‘해적’ ‘국제시장’ 등이 모두 그렇다.

‘돈을 많이 들였다는 건 볼거리가 많다’는 의미라 ‘시간을 할애해도 무방하다’는 논리로 직결된다. 관객들도 일반 영화보다 몇 곱절은 ‘때깔’ 좋고 스펙터클한 영상에서 만족감을 충분히 얻곤 한다. 그럼에도 2시간7~8분은 넘기지 말자는 게 불문율이다. 관객의 몰입도, 상영 회차 등을 고려한 마지노선이다.

◆ 90년대 기획영화 시절 짧다가 2000년대 작가주의 감독 영화 시대엔 늘어나

복합적 함수관계를 품은 러닝타임 역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김의석 감독의 ‘결혼이야기’(1시간33분)가 기폭제 역할을 한 이후 강우석(투캅스, 마누라 죽이기), 이광훈(닥터봉·1시간32분) 감독 등 1990년대 시장을 주도한 기획영화는 제작·기획자의 아이디어가 중심이 돼 사회·문화적 트렌드를 반영한 작품들이 주를 이뤘다. 감각적인 웃음의 로맨틱 코미디와 액션장르가 각광받으며 러닝타임은 ‘대중적인’ 1시간40분 내외로 맞춰졌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시대를 연 ‘쉬리’(1997)도 1시간55분으로 2시간을 넘기진 않았다.

▲ 90년대 기획영화 대표작인 '결혼이야기' '투캅스'와 2000년대 작가주의 감독 영화 '밀양' '올드보이'(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2000년대 들어 인간 사회의 본질을 반영하는 능력을 장착한 작가주의 감독(박찬욱 홍상수 김기덕 이창동 봉준호)들이 등장하며 러닝타임은 2시간을 훌쩍 넘어가곤 했다.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2시간),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시간)와 ‘박쥐’(2시간13분), 이창동 감독의 ‘밀양’(2시간21분), 봉준호 감독의 ‘마더’(2시간8분)와 ‘설국열차’(2시간5분) 등은 감독의 고유한 스타일과 주제의식을 강조, 예술성 높은 ‘작품’으로 추앙받았기에 긴 상영시간이 자연스럽게 용인됐다. 이 시기에 가장 긴 영화는 영화평론가 출신 정성일 감독의 ‘카페 느와르’(2010)로 3시간18분에 이른다.

◆ 최근 다시 짧아지는 추세...홍상수 감독 ‘자유의 언덕’ 1시간7분

최근 들어선 다시 짧아지는 추세다. 장르영화가 각광받는 것과 아울러 스마트폰 세대인 20~30대의 편의성을 의식해서다. 물리적 시간보다 체감시간이 중요하므로 타이트하게 가려고 하는 경향이 짙다. 여기에 입김이 날로 세지는 투자배급사의 의견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투자배급사는 ‘관객의 니즈’ ‘흥행’에 가장 민감한 집단이다.

감독이 전권을 쥐고 저예산으로 만들었기에 특별한 사례이긴 하나 지난해 홍상수 감독의 ‘자유의 언덕’은 1시간7분으로 일반 상업영화의 절반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시간의 경계를 허물어트린 주제의식과 맞물리며 국내외 영화제에서 각광받았다. 역시 작가주의 감독인 장률의 ‘경주’는 ‘자유의 언덕’과 비슷한 메시지를 지녔으면서도 러닝타임은 근래 보기 드물게 2시간25분이었다.

 

그렇다면 러닝타임은 누구에 의해 정해질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작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작 단계인 시나리오 집필 시 100~120신(Scene) 정도면 2시간 분량의 영화가 나오게 된다. 평균 3~4개월, 45~60회차의 촬영을 거쳐 후반작업인 편집단계에 도달한다. 편집기사가 감독과 의견을 나누며 방대한 분량의 필름을 취사선택해 1차 편집 과정에서 3시간30분 분량, 2차 편집 과정에서 2시간 내외로 압축한다. 이후 제작사, 투자배급사와의 논의를 통해 최종 상영시간이 결정된다.

◆ 러닝타임 둘러싼 복잡한 계산, 완성도에 대한 자신감 부족?

영화는 창작자의 산물이다. 창작자는 감독이지만 신인감독이나 힘 없는 감독은 현실적으로 제작자, 투자자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다. 유명 감독의 경우,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신들을 최대한 지키기 위해 치열한 줄다리기를 벌인다. 이렇듯 복잡한 과정을 거쳐 러닝타임이 최종 확정된다.

▲ 2시간49분의 긴 러닝타임에도 젊은 세대의 호응을 얻으며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인터스텔라'

처음으로 돌아가 젊은 세대가 긴 상영시간을 버거워하는 것은 사실이다. 메이저리그 사례를 비롯해 한 회에 10~15분 분량인 웹 드라마 등의 인기는 이를 방증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긴 영화를 무조건 외면하진 않는다. 지난해 ‘인터스텔라’의 경우 2시간49분의 긴 러닝타임이 자칫 악재가 될 수 있었지만 젊은층 사이에 형성된 입소문과 열광이 1000만 돌파에 큰 역할을 한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아직까지 영화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소중한 문화 활동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명료해진다. 내용성도 없이 엿가락 늘리듯 스크린을 채우려는 욕심이 문제였다. 지적 호기심 자극이든 감동이든 완성도만 높다면, 시간은 영화의 흥행을 좌우하는 절대적 잣대는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러닝타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복잡한 셈법, 소리 없는 전쟁은 효과적 전달방식의 모색이자 한편으론 완성도에 대한 자신감 결핍의 표현이 아닐까.

<편집자주> 필자는 스포츠서울 연예부, 메트로신문 대중문화팀을 거치면서 공연 및 대중문화 전반을 취재했다. 현재 스포츠Q 문화저널부 부국장을 맡고 있다.

goolis@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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