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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규 교수의 풋볼 오디세이] (5) 하이즈만 트로피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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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규 교수의 풋볼 오디세이] (5) 하이즈만 트로피의 가치
  • 박경규
  • 승인 2015.04.30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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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해마다 2월을 맞으면서 미국은 북미프로풋볼리그(NFL) 슈퍼볼로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든다. 슈퍼볼이 지구촌에 생중계되지만 요즘 한국에서는 중계방송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운 현실이다. 럭비와 비슷하게 보이는 이 스포츠가 왜 미국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일까. 열정과 냉정이 맞물린 미식축구 이야기 속에서 그 매력을 따라잡아보자. 한국 미식축구 선구자 박경규 경북대 명예교수가 들려주는 풋볼 오딧세이와 동행한다.

[박경규 경북대 명예교수] 해마다 12월이 되면 미국은 어느 대학이 어느 볼 대회에 초청되는지와 하이즈만 트로피를 누가 수상하는지에 관심이 모아진다. 하이즈만 트로피 수상자는 부모와 함께 미국 대통령이 주최하는 식사자리에 초청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하이즈만 트로피는 미국대학의 '올해의 미식축구선수상'이다. 수많은 미국대학 미식축구선수 가운데 한 명을 뽑기 위한 과정도 흥미롭다.

9월 대학미식축구 시즌이 시작되면서부터 많은 후보자들이 올라온다. 후보 선수들은 매주 선수들의 기록, 팬들의 투표, 소속 대학팀의 성적 등으로 경쟁이 계속되다가 11월 중순이 되면 최종 3-4명으로 좁혀진다. 12월 초에 하이즈만재단에서 수상자 후보를 초청해 마치 아카데미영화상을 시상하듯이 수여한다. 수상자 본인에게도 영광일 뿐 아니라 소속 대학도 축제에 가까운 흥분으로 몰아넣는다.

▲ 존 윌리엄 하이즈만은 미식축구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최고의 스포츠로 만든 미식축구인이다. 사진은 2007년 7월 일본 가와사키 구장에서 육탄전을 벌이고 있는 한국-독일전. [사진=박경규 교수 제공]

◆ 주요 전술 '트릭 플레이' 창시, 미식축구를 재미있게 만들다

하이즈만 트로피는 존 윌리엄 하이즈만(1869-1936)을 기념하기 위한 상이다. 그런데 미국의 미식축구 팬들이라도 트로피 이름은 알아도 하이즈만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워터 캠프가 미식축구의 틀을 만든 미식축구의 아버지라고 한다면 하이즈만은 미식축구를 미국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최고의 스포츠로 만든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즈만은 선수시절부터 코치로서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미식축구를 보다 좋은 여건으로 지원해주는 팀으로 가차 없이 옮긴 미식축구인이다. 물론 자신도 승리할 수 있는 플레이를 개발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미식축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미식축구인이었다.

운동에 소질이 많았던 하이즈만은 고교시절 야구, 축구, 체조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미식축구를 위해 1887년 브라운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는 미식축구를 무척 혐오했다고 알려졌다. 하이즈만은 브라운대보다 더 많은 지원을 해주는 펜실베이니아대로 전학, 3년 동안 뛰었다.

▲ 뉴욕 시절의 존 윌리엄 하이즈만. 그가 뉴욕에서 지내면서 집필과 강의를 나가면서 모은 돈을 바탕으로 창설한 하이즈만재단에서 수여하는 하이즈만 트로피는 미국 대학의 '올해의 미식축구선수상'으로 권위를 갖고 있다. [출처=리처드 위팅엄 저 '가을 제전']

법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오버린대 코치로 지도자생활을 시작하며 7승 무패를 기록, 당시 모든 미식축구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이즈만은 1년 뒤 보다 많은 금액을 제시한 부흐텔대, 지금의 애크론대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지금의 센터 스냅을 개발했다.

이전에는 센터가 볼을 굴려서 뒤로 보냈는데 이 대학의 쿼터백은 키가 190cm나 돼 허리를 숙여 볼을 빨리 잡기가 힘들었다. 하이즈만은 지금은 NFL과 대학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샷건 스냅을 개발했다.

1895년 지금의 어반대인 알라바마 폴리테크닉 인스티튜드로 옮긴 하이즈만은 선수들의 수준이 낮아 묘안을 짜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트릭플레이였다. 볼을 가진척 하는 러닝백의 페이크 모션을 등장시킨 것이다. 그는 트릭플레이로 강팀이었던 밴더빌트대에 대승을 거두며 진가를 드러냈다.

하이즈만이 개발한 트릭플레이는 당시 많은 미식축구인들로부터 비난과 동시에 찬사를 받았지만 그는 당당하게 대학 팸플릿에 트릭플레이를 넣기도 했다. 현재 트릭플레이는 미식축구의 주요 전술 가운데 하나다.

◆ 조지아공대에서 전성기를 누리다

크램존대로 옮긴 그는 남부대학체육협회리그에서 전승으로 우승을 한 후 다시 조지아공대로 갔는데 이곳에서 전성기를 누린다.

조지아공대의 전승행진을 이끌면서 거대한 경기장을 건립하게 했다. 또 그가 이전부터 줄기차게 주장했던 포워드패스가 미식축구에 허용됨에 따라 그의 팀 플레이는 관중에게 더욱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새로 건립된 애틀랜타 스타디움에서 컴버랜드대에 222-0으로 이기는 기록을 세웠다.

▲ 하이즈만재단에서 수여하는 하이즈만 트로피. 하이즈만 재단은 12월 초 수상자 후호들을 초청해 마치 아카데미 영화상을 수상하듯 수여하는데 수상자는 부모와 함께 미국 대통령이 주최하는 식사에 초청받는 영광도 누리게 된다. [사진=하이즈만재단 캡처]

그는 항상 완벽한 플레이를 선수들에게 요구했는데 관중은 이러한 팀 플레이에 무척 매료됐다. 16년 동안 조지아공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한 하이즈만은 펜실베이니아대로 다시 옮겼다.

하이즈만은 현재 필자도 회원으로 있는 미식축구코치협회(AFCA) 회장을 두 차례나 맡았고 텍사스주에 있는 라이스대로 자리를 옮겼다. 또 터치다운 애슬레틱클럽을 설립하면서 3년 동안 라이스대에서 재직했던 그는 뉴욕으로 자리를 옮겨 다운타운 애슬레틱클럽을 만든다.

하이즈만은 다운타운 애슬레틱클럽에서 많은 칼럼을 집필했고 성공적인 대학 미식축구를 위한 연구와 강연에 나섰다. 이를 통해 모인 돈은 지금의 하이즈만 트로피를 주는 재단의 모체가 된다.

처음에는 동부지역의 최고의 미식축구 선수에게 수여했지만 1935년부터 중서부지역까지 포괄해 미국 전역의 최고 미식축구 선수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확대된다. 물론 이때 상 이름은 '올해의 미식축구 선수'였다.

하이즈만은 두번째 시상식이 열리기 2개월 전에 병석에 누웠는데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68세의 나이로 타계한 하이즈만을 기리기 위해 재단은 두번째 상부터 '하이즈만 트로피'로 이름을 바꿨다.

하이즈만은 경기장에서 미식축구를 재미있는 스포츠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미식축구를 최고의 스포츠로 발돋움시킨 미식축구인으로 기억이 되고 있다.

▲ 하이즈만 트로피를 디자인할 당시의 여러 동작을 선수들이 직접 시범을 보이고 있다. [사진=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캡처]

■ 필자 박경규 명예교수는?

1948년생. 1966년 서울대학교에서 미식축구를 시작해 경북대학교 교수로 재임 중이던 1983년 경북대 미식축구부를 창단, 직접 감독을 맡아오고 있다. 1989년 한일대학교류전에서 한국 대표팀을 이끌었다. 1999년 국제미식축구연맹 창립에 관여했고 2005~2011년 대한미식축구협회장을 역임했다. 2013년 정년 퇴임 후에도 아시아미식축구연맹 회장과 경북대 미식축구부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초보자도 쉽게 알 수 있는 미식축구' '그림과 함께 이해하는 미식축구 규칙해설' 등 다수의 미식축구 관련 저서를 집필했다.

kkpark@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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