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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미완의 대기, 배우 엄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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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미완의 대기, 배우 엄태구
  • 용원중 기자
  • 승인 2015.05.04 1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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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글 용원중기자·사진 노민규기자] 대중에게 이름을 선명하게 각인시키진 못했으나 배우 엄태구(32)의 존재감은 만만치 않다.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북한 백두조 조장 황재오, ‘잉투기’의 찌질한 잉여 태식, 드라마스페셜 ‘완벽한 스파이’의 연변 스파이 두목 엄태구 등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드라마 속 그의 모습은 짧지만 강렬하다.

엄태구가 긴 호흡으로 영화 ‘차이나타운’(감독 한준희·4월29일 개봉)에 등장했다. 차이나타운을 배경으로 두 여자의 생존법칙을 다룬 범죄드라마에서 마가 흥업의 첫째이자 엄마(김혜수)의 오른팔 우곤을 연기했다. 개봉 후 삼청동 카페 웨스트19에서 마주했다. 스크린에 깔리던 중저음 목소리는 여전한 대신 그늘 짙던 얼굴은 환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 ‘차이나타운'에서 마가네 첫째 우곤으로 강렬한 인장

우곤은 말보다 눈빛과 행동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사람을 죽일 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냉정한 인물이지만 동생처럼 함께 자란 일영(김고음)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대부’의 영향으로 범죄드라마를 무척 좋아해요. 그런데 여성이 주인공이고, 김혜수 선배님과 김고은이 주연이니 더할 나위가 없었죠. 처음에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너무 멋졌어요. 일영을 좋아하는 점이나 그의 과묵함이 매력적이었죠. 이렇게 말 안하고 연기한 건 처음이었죠. 그동안 주로 맞는 역할을 해왔는데 때리는 것도 처음이었고. 후후.”

시나리오 속 우곤은 너무나 멋진데 멋있게 연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콘티 속 우곤과 현실 속 우곤의 간극이 난코스였다. “멋 부리지 말자!”를 늘 머리에 새긴 채 촬영에 임했다. 감독의 디렉팅이 들어오면 “너무 멋 부리는 건 아닐까요”라고 물어보며 수위를 조절해 나갔다.

“자칫 잘못하면 폼잡는 듯한 인물로 나올까봐 걱정됐어요. 그런 함정에 빠지기 싫었죠. 멋을 빼고 우곤으로 살아있자며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었어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해요. 다만 나만 보이는 내 연기의 허점이 아른거리는 점은 아쉽죠. 꽉 차있지 않고 비어있는 듯한 모습은 스스로 부끄러운 지점이에요.”

 

◆ 우곤 캐릭터, 폼 나게 보이지 않도록 에너지 집중

‘차이나타운’은 배우들의 연기 향연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극을 이끌어가는 중견 김혜수부터 충무로의 기대주들로 꼽히는 김고은 박보검 고경표 이수경 조현철 조복래 등 젊은 배우들의 연기가 황금빛 앙상블을 이룬다. 엄태구의 위치는 딱 허리였다.

“위아래로 배울 점이 많았어요. 김혜수 선배님의 동물적인 본능, 전체를 보고 연기하는 모습에선 대단함을 느꼈고요. 대인관계, 집중력, 캐릭터 분석력 면에서 다들 후배 같지 않고 (저보다) 낫더라고요. 가장 고마운 사람 중 한 명인 고은이는 주인공답게 깊은 연기를 보여주면서도 절 살갑게 챙겨줬고, 보검이는 섬세함과 착함이 인상적이었어요. 경표는 스스로를 낮추는 자세가, 수경이는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면이, 현철이는 연출과 연기까지 두루 해내는 모습이 대단했죠.”

처음 그의 눈에 밟힌 캐릭터는 우곤, 치도(고경표), 홍주(조현철)이었다. 밝고 건강한 석현(박보검)은 먼 산 같은 캐릭터라 일찌감치 접었다. 치도는 기존에 해왔던 말 많으면서 강한 배역들과 비슷해서 맘속에서 슬그머니 밀어냈다. 지능이 모자라나 실행력 하나 만큼은 누구도 따라오기 힘든 괴물과 같은 홍주를 만약 자신이 연기했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왔을지 궁금하다.

 

◆ 형 엄태화 감독과 독립영화 '잉투기' '유숙자' '숲' 연이어 작업

건국대 영화과 1기인 엄태구는 대학시절 단편영화 2편을 주연 겸 연출했다. 그중 시각장애인의 이야기인 ‘아버지께’는 싸이월드영화제에서 수상도 했다. 연출 작업을 통해 많은 걸 느꼈으나 배우가 적성임을 절감한 뒤 연기에 매진하고 있다.

대신 연출은 독립영화계가 주목하는 형 엄태화 감독이 전담하고 있다. 감독 류승완- 배우 류승범 이후 주목받는 감독-배우 형제다. 형과는 독립영화 ‘숲’ ‘유숙자’ ‘잉투기’ 등에서 빈번하게 호흡을 맞춰왔다.

“항상 전 가만히 있고, 형이 감독이니까 제안하면 그냥 출연했어요. 형은 ‘귀찮아서 절 캐스팅했다’고 하는데 (웃음) 전 남들 보기에 백수나 마찬가지인 형이 불쌍해서 (웃음) 출연해줬죠. 가족이니까 형이 잘 됐으면 해서 삭발하고, 발가벗고, 다른 배우들이 안한다고 하는 걸 다 했죠. 형과 코드가 맞는 것 같아요. 시나리오가 재미나거든요. ‘그런데 왜 영화제에서 떨어지지’ 싶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소중한 경험이에요. 그 나이 때에만 할 수 있는 역할들을 두루 해본 거니까.”

◆ 롤모델 알 파치노와 김혜자, “후배들에게 힘을 주는 배우 되고싶어”

수려한 마스크의 미남배우는 아니다. 그의 얼굴에선 폭발적 에너지의 연기파 유오성, 황정민, 설경구의 느낌이 쓱쓱 오간다.

 

“어렸을 적부터 딴 세상 배우 같은 알 파치노를 좋아했어요. 그의 선 굵은 연기와 이미지 때문예요. 배우로 활동해보니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이 너무 대단하세요. 우리나라에 태어나서 어떻게 저렇게 잘 하지, 싶은 거예요. 유오성 설경구 김윤석 송강호 황정민 이성민 선배님 등 시기마다 몰입하게 되는 분들이 달라져요. 저는 지금 이 시기를 버텨내기가 힘든데 배우로서 그 긴 과정을 이겨내신 게 존경스럽죠. 그러면서 자극과 용기를 얻게 돼요.”

국내 남자배우 가운데 롤모델을 꼽지 못하는 그가 배우 김혜자를 꼽는데는 주저함이 없다. 일단 독실한 신앙에서 공통점을 찾은 듯 보인다. 엄태구는 전형적인 ‘교회 오빠’다. 신앙으로 인해 술마저 입에 대지 않을 정도다.

“선생님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초심을 잃지 않은 채 연극 무대에 임하고, 연기가 잘 되지 않는 날이면 밤에 우신다는 인터뷰가 너무 아름답더라고요.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란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선생님으로부터 영감을 얻듯, 훗날 후배들이 저를 보고 힘을 내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인터뷰 말미에 이르자 그는 “‘차이나타운’은 한국영화에서 첫 등장한 여성영화이자 장르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라며 “그들의 이야기에 푹 빠져보셨으면 한다”고 영화에 대한 책임감을 오롯이 드러냈다.

엄태구는 류승완 감독의 범죄 액션영화 ‘베테랑’에서 냉혈한 재벌3세 조태오(유아인)의 이종격투기 경호원으로 다시금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 '차이나타운'의 우곤 역 엄태구

[취재후기] 8년차 배우 엄태구는 1년차 때와 똑같다고 고백한다. “내공이 쌓였으면 좋겠는데 지금도 새로운 작품을 만나면 백지상태가 돼버린다”는 말이 이어진다. 배우는 감정 한 톨마저 쓸어 담고, 비워내는 직업인데 그의 토로가 오히려 장점이지 싶다. 하얀 도화지처럼 순도 높은 색을 입히고, 채워내는 장점이 큰 연기자다. 아직 완성되진 않았으나, 미래가 기대되는 큰 그릇이다.

goolis@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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