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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 한국축구 최고 '팔방미인'으로 기억될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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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 한국축구 최고 '팔방미인'으로 기억될 이름
  • 김의겸 기자
  • 승인 2021.06.08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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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김의겸 기자]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이 결국 향년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 그는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멀티플레이어였다. 선수 때 공격과 수비를 가리지 않았고, 은퇴 후에는 지도자뿐만 아니라 축구 콘텐츠 크리에이터로서도 역량을 보여줬다. TV 축구예능을 통해 이강인(20·발렌시아)을 지도하기도 했다.

유 전 감독은 7일 오후 7시께 서울 아산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인천 사령탑으로 있던 지난 2019년 10월 황달 증세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췌장암 4기 진단을 받고 투병해왔다. 그해 인천을 K리그1(프로축구 1부)에 잔류시킨 뒤 지휘봉을 내려놓고 투병에 집중했다.

이따금씩 축구 관련 콘텐츠를 통해 그의 근황이 전해졌다. 종종 전 소속팀 인천 훈련장이나 경기장에도 나타났고, 올 초에는 자신의 현역시절을 돌아보는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기도 했던 터라 축구팬들 입장에선 더 믿고 싶지 않은 그의 죽음이다.

병마와 씩씩하게 싸웠지만 결국 완쾌라는 마지막 약속은 지키지 못한 채 축구팬 곁을 떠난 유상철 전 감독을 기리며 그의 축구인생을 돌아보고자 한다.

유상철 전 감독이 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 [사진=연합뉴스]
유상철 전 감독이 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 [사진=연합뉴스]
울산 현대 레전드로 남은 유상철(오른쪽). [사진=연합뉴스]
울산 현대 레전드로 남은 유상철(오른쪽). [사진=연합뉴스]

◆ FW·MF·DF로 모두 K리그 베스트11에 들다

유상철 전 감독은 현역 시절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였다. 울산 현대와 요코하마 마리노스(일본), 가시와 레이솔(일본)을 거친 뒤 2006년 선수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연령별 대표팀을 두루 지냈고, 2002 국제축구연맹(FIFA) 한일 월드컵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의 '믿을맨'으로 활약하며 4강 신화를 썼다. 태극마크는 2005년 6월 독일 월드컵 최종예선 우즈베키스탄전을 마지막으로 반납했다. 통산 A매치 기록은 124경기 18골.

특히 그는 공격과 중원, 수비 어떤 지역에 세워도 제 몫을 한 한국축구 대표 멀티플레이어로 기억된다. 수비로 데뷔한 뒤 K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그는 한일 월드컵에선 중원을 지켰고, 은퇴할 때쯤에는 센터백을 맡을 때도 많았다. 최상위 레벨인 국가대표팀에서도 세 지역 모두 호령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특출났는지 말해준다.

유상철 전 감독은 1994년 울산 유니폼을 입고 프로생활을 시작하며 그해 A매치에도 데뷔했다. 일찌감치 유럽에서도 통할 재목이라는 평가를 들었고,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키 183㎝ 탄탄한 체격에 체력까지 좋았다. 골 감각과 헤더, 경기조율 능력과 수비력까지 두루 갖춰 필드 웬만한 위치에 모두 설 수 있었다.

K리그에 입문한 해 수비수로 시즌 베스트11에 선정됐다. 1998년엔 미드필더, 2002년엔 공격수로 베스트 11에 들었으니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는 차원을 넘어 각 포지션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줬다. 1998년엔 23경기에서 15골을 작렬하며 득점왕까지 차지했다.

[사진=연합뉴스]
유상철은 2002 한일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 폴란드를 상대로 호쾌한 중거리슛 골을 터뜨리며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2004 아테네 올림픽에는 와일드카드 자격으로 출전했다. 수비로 나서 팀을 이끌었다. [사진=연합뉴스]

◆ 월드컵 올스타 미드필더, 올림픽에선 센터백으로

국제대회에서 남긴 족적도 화려하다. 

1998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전 동점골, 한일 월드컵 폴란드전 쐐기골 등 굵직한 득점을 많이 남겼다. 한일 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은 수비까지 소화할 수 있는 유상철이 있어 팀이 위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전술에 변화를 줄 수 있었다. 대회가 끝나고 유상철은 히바우두(브라질), 미하엘 발락(독일) 등 당시 최고 스타들과 함께 대회 올스타 미드필더 부문에 선정됐다.

한일 월드컵 이후 홍명보 울산 감독, 황선홍 전 대전 하나시티즌 감독이 은퇴하자 대표팀 주장을 맡았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엔 와일드카드로 출전해 이천수 전 인천 전력강화실장과 함께 8강 진출에 힘을 실었다. 올림픽에선 센터백으로 어린 후배들을 이끌었다.

한국과 일본 무대를 아우른 그는 K리그에선 울산 소속으로만 뛴 구단 레전드이기도 하다. 울산에서만 통산 142경기 37골 9도움을 남겼다. 일본에선 요코하마에서 4시즌이나 뛰며 2003, 2004년 리그 2연패에 앞장섰다. 지난 2019년 부산에서 열린 동아시안컵 때 일본 요코하마 팬들이 유 전 감독 투병 사실에 응원 메시지를 보내고자 '할 수 있다! 유상철 형'이라고 적힌 걸개를 내걸기도 했다.

또 유상철 하면 곧 '투지'였다.

2001년 6월 월드컵 전초전 격인 컨페더레이션스컵 멕시코전 후반 헤더 결승골로 2-1 승리를 이끌었는데, 전반에 이미 상대와 공을 다투다 코뼈가 부러진 가운데 풀타임을 소화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화제를 모았다. 은퇴할 무렵에는 왼쪽 눈이 거의 실명된 상태로 선수생활을 했다고 밝혀 다시 팬들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인천 유나이티드가 임완섭 감독의 후임으로 유상철 명예감독을 물망에 올려놓았다.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사진=연합뉴스]
유상철 감독은 2019시즌 췌장암 판정을 받은 뒤에도 벤치를 지키며 인천 유나이티드를 극적으로 잔류시켰다. [사진=연합뉴스]

◆ 인천 울린 승부사, 이강인의 스승

유상철 전 감독은 선수로서 축구화를 벗은 뒤에도 축구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방송 프로그램 '날아라 슛돌이'에서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며 대중에 한층 친근한 사람이 됐다. 당시 지도했던 대표적인 선수가 한국축구 현재이자 미래로 성장한 이강인이다. 최근 유튜브 프로그램 '유비컨티뉴'를 통해 "이강인의 경기를 현장에서 직접 관전하고 싶다"는 소망을 나타냈던 그는 결국 오는 12일 예정된 올림픽 축구 대표팀과 가나 간 평가전을 단 5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009년 춘천기계공고에서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2011년 대전 시티즌(현 하나시티즌)을 맡아 프로 감독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2014년부터 울산대 감독으로 권역을 휩쓸며 경험을 쌓았다. 2018년 전남 드래곤즈 부름을 받고 프로로 돌아왔지만 8개월 만에 성적 부진에 책임지고 물러났다.

2019년 5월 위기의 인천에 부임했다. 축구인 유상철이 몸담은 마지막 팀이다. 몇년째 강등권을 맴돌던 인천의 잔류라는 임무를 안고 소방수로 투입됐다. 매 경기 살얼음판 같은 생존 경쟁을 치렀다. 시즌이 막바지로 치닫던 그해 10월 그는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고, 구단을 넘어 한국축구 전체가 월드컵 영웅의 쾌유를 기원했다.

유상철 인천 유나이티드 명예감독이 '뭉쳐야 찬다'를 통해 근황을 전했다. [사진=JTBC '뭉쳐야 찬다' 캡처]<br>
유상철 전 감독은 이따금씩 TV나 유튜브를 통해 근황을 전했다. [사진=JTBC '뭉쳐야 찬다' 캡처]

그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벤치를 지켰다. 결국 인천을 잔류시키며 구단의 '생존왕' 타이틀을 지켜냈다. 당시 인천의 잔류 드라마는 팀을 이끈 유 전 감독 상황과 맞물려 더 극적으로 다가왔다. 경남FC와 최종전에서 비기며 10위로 강등을 면한 뒤 원정 응원온 수많은 인천 팬들 앞에서 자신의 '생존'도 약속했다. 이후 명예감독을 맡으며 일선에서 물러나 항암에 힘써왔다.

현장을 벗어난 이후에도 유 전 감독은 활발히 활동했다. 요코하마 마리노스 홈구장을 방문해 바다 건너 보내준 응원에 감사를 전했다. TV는 물론 유튜브 방송에 여러차례 출연했다. 2020시즌 인천이 다시 부진하자 복귀설이 나올 만큼 건강을 되찾은 듯했다. 올해에도 상태가 악화했다는 보도에 반박하는 등 근황을 전해왔다. '유비컨티뉴'를 통해 자신의 축구인생을 돌아보고 후배들 및 팬들과 소통을 이어왔다.

끝내 그는 마지막 약속은 지키지 못한 채 하늘의 별이 되고 말았다. 유상철, 그의 이름은 한국축구 최고의 멀티플레이어이자 팔방미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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