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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철인' 박현식, 야구 천재이자 꼼꼼한 야구 수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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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철인' 박현식, 야구 천재이자 꼼꼼한 야구 수집가였다
  • 신석주 기자
  • 승인 2014.03.28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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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박물관 기증품을 통해 야구를 추억하다 <1>

[300자 Tip!] ‘한국 야구박물관·명예의 전당’이 부산 기장군에 건립된다. 한국 야구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이 한국에 드디어 탄생하게 된다. 현재 이상일 KBO 총재 특별 보좌관을 포함한 야구박물관 준비팀은 이곳저곳 발품을 팔며 야구박물관에 전시될 물품들을 한창 수집하고 있다.

KBO 지하 1층 아카이브에 지금까지 모아온 물품들을 보관 중이다. 여기에는 살아 숨 쉬고 있는 생생한 야구 이야기들이 차곡차고 쌓이고 있다. 스포츠Q는 이상일 특보의 도움을 받아 물품의 역사와 기증자들에 대한 이야기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스포츠Q 글 신석주 · 사진 노민규 기자] 그 나라의 생생한 야구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야구박물관이다. 우리나라에도 2016년 완공을 목표로 야구박물관 건립을 위해 힘찬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야구박물관 준비 팀은 다양한 기증품을 수집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현재 KBO 지하 1층 아카이브에는 수많은 기증자들의 물품이 보관돼 있어 야구의 역사를 한 눈에 만나볼 수 있다. 현역 KBO 사무총장 시절부터 야구박물관 건립을 위해 동분서주해 온  이상일 KBO 총재 특별 보좌관을 통해 야구를 사랑하는 기증자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스포츠Q 노민규 기자] 고 박현식 선생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자신의 기록을 모두 챙겨놓을 만큼 꼼꼼했다. 그의 유품은 야구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다. 사진은 박현식 선생이 기증한 사인볼과 국가대표 유니폼이다.

◆ 박현식, 야구박물관의 외부인 최초 기증자 

수없이 많은 물품을 바라보면서 고민하던 이상일 특보가 가장 먼저 보여준 것은 고 박현식 선생의 사인볼이었다.

그 사인볼은 박현식 선생이 현역시절 쳤던 홈런 볼 중 일부였다. 이상일 특보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자신의 기록을 하나하나 챙겨놓았던 그는 야구의 역사가 고스란히 숨 쉬고 있는 박물관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설명하며 그에 대한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이상일 특보는 “고 박현식 선생은 당시 KBO 관련자가 아닌 외부 인사 중 최초 기증자였다. 2005년에 그는 박물관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불러 본인이 소장하고 계시던 모든 자료를 넘겨 주셨다. 그는 당시 투병 중이셨는데 그리곤 3개월 후 돌아가셨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라 더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이 특보는 이어 “박현식 선생은 50년대 광목으로 된 유니폼부터 사인볼과 시구볼, 야구배트 등 아마추어시절부터 수집했던 야구 유품을 건네 주셨는데 모두 역사에 남을 만한 귀한 자료였다”고 덧붙였다.

야구 유품을 보면 고인의 꼼꼼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특히 야구공에는 첫 안타, 첫 홈런 등 자신의 기록이 날짜와 함께 적혀있었다.

“고인은 현역시절 홈런을 날리면 공을 주운 관중을 찾아가 사례하고 자신이 친 홈런공과 맞바꾸는 등 자신의 물품을 수집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그는 수집부터 보관까지 철저했다”고 이상일 특보는 설명했다. 그리고 “그가 기증한 시구했던 볼을 쭉 살펴보면 당시 화제 인물을 알 수 있고 시대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야구박물관에 전시될 유품 중 박현식 선생의 기증품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 [스포츠Q 노민규 기자] 이상일 특보는 야구 기증자 중 기억에 남는 사람을 알려달라고 하자 가장 먼저 고 박현식 선생의 사인볼을 꺼내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아시아 철인부터 최단명 감독까지’ 파란만장 야구인생

고 박현식 선생의 야구인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1929년 평남 진남포에서 출생한 그는 인천의 명문 동산고에서 투수로 활약했지만 실업무대에 진출해서 타자로 전향했다. 당시 박현식은 팀뿐만 아니라 국가대표에서도 4번 타자를 도맡아 할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진 장타자였다.

박현식은 아시아선수권대회의 사나이로 불렸다. 그는 1954년 마닐라 대회부터 1963년 서울 대회까지 무려 6회 연속 출전했다. 이는 대회 역사상 최다 출전 기록이었다. 특히 1963년 서울에서 열린 야구선수권에서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제무대 우승까지 일궈냈다.

6회 연속 출전 기록을 세운 그는 특별상인 ‘철인상’을 수상했고 이후 ‘아시아의 철인’이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그의 야구 역사에 빠질 수 없는 시기는 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이다. 그는 인천을 연고로 창단한 삼미 슈퍼스타즈 팀 초대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삼미 슈퍼스타즈는 누구도 선뜻 감독 자리를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을 만큼 최약체로 평가받았고 그의 가시밭길은 어느 정도 예견됐다.

그래도 실업야구 시절 최고의 선수가 팀을 맡으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초라했다. 13경기 동안 3승10패의 초라한 성적표를 받은 그는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됐고 역대 최단명 감독이라는 아픔을 갖게 됐다.

화려했던 선수생활과 짧았던 감독 생활을 경험한 뒤 그는 현역에서 물러나 제일은행 감독과 경기도 야구협회 사무국장, 대한야구협회 심판위원장과 규칙위원장을 지내며 항상 야구 곁을 지켰다.

2005년 8월 20일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는 화려하고 파란만장한 야구 인생을 마감했다.

[취재후기] 야구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전해주는 따뜻함과 동시에 뭔가 코끝이 찡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과거 영상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전설적인 이름과 그의 인생에 대해 들으면서 야구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됐다. 유품들에 묻은 흔적이 지금의 야구가 성장할 수 있게 해준 토대가 됐다고 생각하니 더욱 빛나 보였다.

chic423@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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