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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알았으랴, KS가 '박경수 시리즈'가 될 줄 [SQ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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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알았으랴, KS가 '박경수 시리즈'가 될 줄 [SQ인물]
  • 김의겸 기자
  • 승인 2021.11.19 0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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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척=스포츠Q(큐) 글 김의겸·사진 손힘찬 기자] 박경수(37·KT 위즈) 본인조차 몰랐다. 선수생활 말년에 한국시리즈(KS)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될 거라고는.

18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21 신한은행 쏠(SOL) KBO리그(프로야구) KS 4차전이 끝나고, 시리즈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된 박경수는 기자회견장을 떠나며 "친구 (우)규민(삼성 라이온즈)이가 KS가 박경수 이름을 따 '경수시리즈'가 될 거라고 응원해줬는데, 실현됐다"며 웃어보였다.

3경기 타율 0.250에 그치고, 4차전은 부상으로 뛰지도 못했지만 박경수의 KS 임팩트는 대단했다. 프로 데뷔 18년 만에 처음 KS 무대를 밟아 몸을 사리지 않고 호수비를 펼쳤고, 홈런으로 승리를 이끌기도 했다. 목발을 짚고 더그아웃을 지킨 그의 존재는 동료들이 하나로 뭉치는 원동력이 됐다. 

정규리그를 1위로 마친 KT는 이날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4연승째 거두며 창단 8년 만에 통합우승을 달성했다. 박경수는 기자단 유효표 90표 중 67표를 얻어 생애 첫 KS MVP에 등극했다.

데뷔 19시즌 만에 처음 나선 한국시리즈에서 MVP까지 차지한 박경수.
목발을 짚고 천천히 걸어나오는 박경수(등번호 6)를 기다린 후배들. [사진=연합뉴스]
목발을 짚고 천천히 걸어나오는 박경수(등번호 6)를 기다린 후배들. [사진=연합뉴스]

박경수는 KS 2차전 1회 무사 1, 2루 위기에서 두산 호세 페르난데스의 강습 타구에 몸을 날려 병살을 유도했다. 이 수비 하나로 이날 경기 분위기가 바뀌었고, 타석에서 압도적인 활약을 펼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데일리 MVP를 거머쥐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3차전 정규리그에서 고(故) 최동원의 한 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을 깨고, 평균자책점(ERA·방어율) 1위에 오른 에이스 미란다를 상대로 5회 좌월 솔로포를 터뜨리며 선제점을 안겼다. 이어진 6회말 수비 때 박건우의 강습 타구를 막아낸 뒤 선행주자 정수빈을 2루에서 잡아냈다.

공수에서 맹활약한 그는 8회말 또 공만 바라보고 달리다 불의의 부상을 입고 말았다. 외야와 내야 사이 애매한 위치로 떨어지는 공을 처리하려다 넘어지면서 오른 종아리 근육이 파열된 것. 곧장 구급차에 실려 이송된 그는 그렇게 시즌을 마감하게 됐다.

커리어 최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한순간에 날아든 비보는 보는 팬들의 마음도 미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글러브를 끼지 못한 4차전에도 그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경기 전 40세 베테랑 지명타자 유한준은 "후배지만 박경수의 플레이를 보며 자극받았다"며 "팀이 똘똘 뭉치는 계기가 됐다. 반드시 승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KT는 이날 초장부터 승기를 잡았고, 9회말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낸 뒤 그라운드 한가운데 모여 정상에 선 기쁨을 만끽했다.

여기서도 팬들을 감동시키는 장면이 나왔다. 선수들은 마운드 부근에 모여서 일제히 더그아웃을 바라봤다. 목발을 짚고 조심스럽게 한발씩 내딛던 선배 박경수를 기다린 것. 선수들에 가까이 다다른 박경수는 목발을 내팽개치고 두 팔을 하늘로 벌린 채 포효하며 영광의 순간을 함께했다.

절친 유한준(오른쪽)의 부축을 받으며 동료들에게 걸어갔다.
박경수를 기다렸던 후배들과 함께 우승 세리머니를 시작했다.
박경수는 이번 시리즈 내내 멋진 수비로 투수들을 도왔다.

경기 후 만난 박경수는 "9회말 2사 때 (유)한준이 형이 옆에서 툭 치면서 '수고했다'고 해 울컥했다. 다리가 안 좋아 천천히 그라운드로 나가려고 했는데 선수들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되게 뭉클했고, 후배들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며 "이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행복을 넘어 오늘이 지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 기분을 계속 만끽하고 싶다"고 밝혔다.

2003년 1차 지명으로 LG(엘지) 트윈스에 입단한 내야수 박경수는 그동안 우승은 커녕 가을야구와도 거리가 먼 선수였다. 성남고 1학년이던 2000년 청룡기를 제패한 이후 아마추어와 프로를 막론하고 한 차례도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다. 지난해 플레이오프(PO)에 나서면서 처음 포스트시즌(PS) 경기를 소화해 리그 최고령 PS 데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이날 최고령 KS MVP가 됐다.

LG가 마지막으로 KS 무대를 밟은 2002시즌 직후 데뷔해 2014년까지 트윈스 유니폼을 입었다. 2015년 신생팀으로 리그에 참가한 KT로 이적한 이래 7년째. 마침내 커리어 첫 우승트로피를 안았다. 올 시즌 정규리그 타율은 0.192.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 0.10이라는 숫자는 그가 정규시즌 얼마나 고전했는지 말해준다.

하지만 가장 큰 무대에서 그동안 쌓아온 내공을 폭발시켰다. 경기장 안팎에서 보여준 리더십과 헌신이 빛을 발하면서 통합우승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차전 데일리 MVP가 됐을 때 "우리 팀 노장들을 대표해 받는다고 생각하겠다"던 그는 이날도 "내가 잘해서 받았다기 보다 내게 상을 주면 스토리가 생겨서 주신 게 아닌가 싶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어 "정말 인터뷰용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잘했다기 보단 팀 KT가 받는 상이라고 생각한다. 팀 KT가 MVP"라고 힘줬다.

열정적인 수비를 펼치다 종아리 부상을 입어 4차전에 결장하고 말았다.
우승을 확정한 뒤 이강철 감독은 박경수를 꼭 끌어안았다.
이날 박경수 대신 주전 2루수로 나선 신본기도 솔로홈런으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이날 박경수 대신 주전 2루수로 나선 신본기도 솔로홈런으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박경수는 "(부상 당했을 때) 스스로에게 화가 많이 났다. 왜 하필 이 중요한 상황에 내가 다쳐야 하나라는 생각에 아픈 것보다도 아쉬움이 컸다. 어제 허리가 좋지 않아 감독님과 코치님이 계속 상태를 체크하셨다. 나는 정말 괜찮았다. 그토록 원했던 경기였던 만큼 빠지고 싶지 않았다. 또 나 대신 갑자기 투입된 후배에게 그런 중압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정말 누구보다 후회없이 간절하게 했기에 너무 재밌었다"고 돌아봤다.

그는 자신을 믿고 KS에 기용한 이강철 감독에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감독님께서 어떤 일에 대해 고참들과 상의하면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후배들을 끌고가려고 했다. 다들 좋은 친구들이라 잘 따라와줬다. 고참 역할이 쉽지 않지만 (감독님께서) 후배들을 잘 아우를 수 있도록 분위기를 형성해주셨다"며 "감독님은 선수들이 알아서 움직이게끔 만드는 능력자다. 이렇게 말년에 1할을 치고도 KS MVP를 받을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되겠나"라며 웃었다.

그는 또 이날 자신을 대신해 2루수로 선발 출전한 신본기의 활약에 기쁜 마음도 감추지 않았다. 신본기는 이날 5회초 6-1로 달아나는 솔로 홈런으로 추격의 고삐를 당기던 두산의 기세를 꺾었다. 수비에서도 안정적인 플레이로 승리에 일조했다.

박경수는 "(신)본기가 활약해 너무 좋았다. 첫 경기 때 점수 차가 좀 있던 8회 나 대신 본기가 나갔는데 삼진을 당해 괜히 미안했다. 아까 본기가 홈런을 치고선 나를 찾아와 'KS 홈팀 2루에 좋은 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해 너무 고마웠다"고 설명했다.

박경수는 올해를 끝으로 KT와 계약이 끝난다. 황혼기에 접어들어 가장 큰 임팩트를 남긴 그가 선수생활을 더 이어갈 수 있을까. 그는 "내겐 선택권이 없다. 구단과 잘 상의해보겠다. 선수로서 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렇다고 고집을 피울 생각은 없다. 좋은 방향으로 대화하겠다"고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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