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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만성 김영섭, 장애-세월 극복한 긍정의 힘 [PBA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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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만성 김영섭, 장애-세월 극복한 긍정의 힘 [PBA 투어]
  • 안호근 기자
  • 승인 2022.11.01 13: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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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스포츠Q(큐) 안호근 기자] “첫 결승에 가보니 감격적이었다. 아쉬운 건 있겠지만 기분이 좋다.”

김영섭(47)은 31일 경기도 고양시 빛마루방송지원센터에서 열린 2022~2023시즌 PBA 투어 4차전 PBA(남자부) 휴온스 챔피언십에서 다비드 마르티네스(31·크라운해태 라온)에 세트스코어 3-4(15-14 3-15 15-13 15-11 5-15 8-15 7-11)로 역전 당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20년 넘는 커리어에서 가장 커다란 성과가 눈앞에서 날아갔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였지만 김영섭은 미소지었다. 어쩌면 그 미소는 지금의 그를 있게 한, 혹은 더 성장하게끔 하는 원천일지도 모른다.

김영섭이 31일 2022~2023 PBA 휴온스 챔피언십 결승에서 다비드 마르티네스에 세트스코어 3-4로 역전패하며 준우승에 머물고도 밝은 미소를 감추지 않고 있다. [사진=PBA 투어 제공]

 

◆ 불편한 다리-생계 유지 부담, 꿋꿋이 버텨낸 오뚝이

PBA 투어에 진출하기 전까지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선수 생활에만 전념할 수 있는 선수를 찾는 건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 사연 없는 선수를 찾기 힘들고 심지어는 PBA 투어에서 활동하면서도 생계 유지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부업을 이어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도 김영섭의 스토리는 유독 눈길을 끈다. 19세 때 일찌감치 취업의 문턱을 넘은 그는 회사에 첫 출근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중 불법 유턴하는 차량과 충돌하는 사고를 겪었다. 100여일 넘게 병상에 누워있어야 하는 큰 사고였고 발을 크게 다쳤다. 

발가락 다섯 개가 으스러지고 뒷꿈치까지 뭉개져 뼈가 보일 정도였다. 다른 신체 부위의 근육을 떼어 내 뼈에 덧대야 했고 피부까지 이식해 뒷꿈치를 재건했다. 그러나 장애 6급 판정을 받을 정도로 비장애인들과 경쟁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김영섭은 주저앉지 않았다. 누구보다 당구를 좋아했고 잘하는 것 또한 당구였다. 국가대표 선발전을 겸해 열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상금이 없는 대회도 많았으나 그 열정을 꺾을 순 없었다.

상황이 급변했다. 결혼 후 두 아이를 낳았고 원하는 것만 하고 살 순 없게 됐다. 2000년에 첫째, 2002년에 둘째 아이를 낳으며 생계 부담이 더 커졌고 고향인 마산 어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는 어머니를 도와 6년 가까이 일을 했다. 아이들에게 당당한 아빠가 되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다시 인생을 돌아봤다. 그제서야 잘하는 걸 해보자고 마음먹었고 다시 큐를 들었다. 당구를 치기 위해선 당구장을 떠날 수 없었다. 연습을 하며 매니저로서 일도 했다. 2년 정도는 당구장을 운영도 해봤지만 선수로서 전념하기가 힘들어 매니저로서 ‘투잡’활동을 이어왔다.

준우승 후에도 마르티네스(왼쪽)를 따스히 안아주고 있는 김영섭. [사진=PBA 투어 제공]

 

◆ 우승 상금 0원→준우승에 3400만원, 덤덤한 김영섭

2019년 PBA 투어 출범 전 대한당구연맹(KBF) 랭킹 17위였던 그는 우선등록선수로 프로 무대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지난해 4강에 들면서 1000만원을 챙겼으나 삶의 큰 변화는 없었다.

올 시즌 첫 두 차례 128강에서 탈락했던 그는 3차전에서 32강에 든 뒤 이번 대회를 맞았다. 128강에서 다비드 사파타(블루원리조트 엔젤스·스페인)와 에디 레펜스(SK렌터카 다이렉트·벨기에), 조재호(NH농협카드 그린포스)가, 64강에선 강동궁(SK렌터카), 필리포스 카시도코스타스(하나카드 하나원큐·그리스), 오성욱(휴온스 헬스케어 레전드) 등 우승자 출신들이 줄줄이 탈락했다. 

김영섭에겐 기회였다. 128강에서 찬 차팍과 승부치기 끝에 승리한 그는 이후 큰 어려움 없이 준결승에 올랐다. 이영훈을 4-3으로 꺾은 그는 PBA 진출 후 23번째 대회 만에 처음 결승 무대에 나섰다. 세트스코어를 3-1까지 만들었으나 마르티네스의 집중력이 살아났고 결국 세 세트를 연속으로 내주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치열한 접전 끝 우승을 내주고도 김영섭은 웃었다. 마르티네스에게 다가가 밝은 미소로 우승을 축하해줬다. 경기 후 그는 “당구치면서 내 환경이 어렵다고 크게 생각지 않았다”며 “단지 사고를 당해 조금 불편한 다리와 일찍 결혼하다보니 가정을 꾸려야 하는 조건이 나에겐 힘들었을 뿐이다. 당구 자체가 좋았다”고 말했다.

상금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 묻자 “큰 변화는 없겠지만 멀리 창원에서 와주신 고마운 팬들께 맛있는 식사를 대접할 것”이라며 “나머지는 집사람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웃었다.

PBA 누적 상금이 2000만원에 불과했던 그는 이번 준우승으로 3400만원을 챙겼다. [사진=PBA 투어 제공]

 

◆ 김영섭 존재의 힘, 긍정 에너지

PBA 출범 전엔 장애인체전에 출전해 금메달 포함 몇 개의 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비장애인들에 비해 분명한 불편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방증이다. 그럼에도 김영섭은 “스리쿠션이 육체적으로 크게 힘든 종목은 아니”라며 “오늘은 (2경기를 하며) 오래 서있다 보니 다리가 많이 부어 있어서 뼈마디가 조금 당기는 정도”라고 말했다.

수시로 우승을 차지하는 이들도 기초 체력과 지구력 등의 중요성을 내세우는 분위기다. 힘들지 않을리 없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세는 그가 여러 환경적 제약 속에도 꾸준히 선수생활을 이어가며 늦은 나이에도 상승세를 타는 비결이라고도 볼 수 있다.

훌륭하게 성장한 자녀들 또한 그에겐 큰 힘이다. 성인이 된 자녀들의 학비 등으로 부담스러울 것 같다는 질문에 “다행스럽게도 두 자녀 모두 국립대에 진학해 학비도 덜 든다. 장학금도 받으면서 다닌다”며 “우승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미 결승에 간 것만으로도 우승한 것처럼 기쁘게 생각했다”고 전했다.

아내도 그에게 커다란 버팀목과 같다. 직장에 다니며 그를 보좌하는 바람에 이날은 현장에 함께하지 못했다. 그는 “결승에 올라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이 자리엔 오지 못했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난 시즌 4강, 이번 시즌 결승 진출까지. 적지 않은 나이지만 완연한 성장세를 타고 있다. 그럼에도 꿈은 소박했다. “당구를 평생 칠 것 같은데 꾸준히 열심히 치면서 지금처럼 좋은 성적이 가끔 나왔으면 좋겠다”며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우승 기회도 오지 않겠나”라고 미소지었다.

대회를 마친 선수들은 늘 당구가 ‘멘탈스포츠’라고 말한다. 일희일비하는 이들은 기복이 심한 경우가 많고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해야 늘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누구보다 차분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늦깎이 기대주’ 김영섭의 행보에 더욱 기대감이 쏠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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