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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중도 고사, 사과문에도 표류하는 흥국생명 [여자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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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중도 고사, 사과문에도 표류하는 흥국생명 [여자배구]
  • 안호근 기자
  • 승인 2023.01.10 18: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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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안호근 기자] “어디까지 감당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답답하다. 이제는 우리끼리 해야 될 상황이 된 것 같다.”

배구 여제는 당황했다. 세계 곳곳을 누볐지만 이 같은 일은 처음 겪는다고 했다. 김연경(35)에게도 인천 흥국생명의 이번 사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벅찼다.

설상가상. 구단이 뒤늦게나마 고개를 숙였음에도 상황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잘 나가던 흥국생명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올 시즌 김연경을 중심으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인천 흥국생명이 때 아닌 암초를 만나 표류하고 있다. [사진=스포츠Q DB]

 

지난 2일 흥국생명은 권순찬 감독과 김여일 단장을 동반 사퇴시켰다. 흥국생명이 내세운 권순찬 감독과 결별 이유는 ‘방향성’ 때문이었다. 김 단장에 대한 경질 이유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5일 서울 GS칼텍스와 홈경기를 앞두고 신용준 신임 단장이 해명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논란만 키웠다. 김연경과 옐레나 므라제노비치(등록명 옐레나)의 로테이션 문제를 두고 권 감독과 김 단장 사이 이견이 일었고 이 같은 이유로 둘을 동시에 경질했다고 밝혔으나 명쾌한 해답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가장 논란이 된 구단의 개입 여부에 대해 확실한 답을 주지 못했다. 이날 경기에선 승리했지만 이영수 감독대행은 당초 생각대로 스스로 물러났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베테랑 김연경과 김해란(39)은 아연실색했다.

베테랑 둘은 일련의 상황들이 쉽사리 납득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자신들이 겪은 일에 대해 솔직히 털어놨다. 신 신임 단장의 말과 달리 ‘구단 운영 차원의 조언’이 아닌 ‘기용 개입’ 문제임이 확인됐다.

김연경은 “이런 팀이 다시는 안 나왔으면 좋겠다. 구단에서 운영을 할 수도 있고 여러 상황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지금 같은 상황은 납득하기가 힘들다”며 “이런 팀이 있을까 싶다. 이런 일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구시대적 구단 운영에 더한 흥국생명의 안일한 대응은 대중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신용준 흥국생명 신임 단장(오른쪽)과 임형준 구단주는 이날 사과문을 발표했다. [사진=스포츠Q DB]

 

이날 흥국생명은 지난 시즌까지 구단 수석코치를 맡았던 김기중 선명여고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긴다고 발표했다. 빠르게 팀을 수습하기 위함이었지만 이 또한 정답이 되진 못했다. 김연경은 “다음 감독님이 오시더라도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회사에서 원하는 감독은 말을 잘 듣는 지도자라는 것과 다름없다”며 “누굴 위해서 선임이 되고 경질이 되는지를 우리도 잘 모르겠다. 일요일에 다음 경기가 있는데 수석코치님도 나가신다고 하고 이제는 우리끼리 해야 될 상황이 된 것 같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은데 생긴다”고 답답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 같은 상황이 부담이 되지 않을 리 없었다. 김기중 감독은 10일 흥국생명을 통해 “배구계 안팎에서 신뢰를 받아도 어려운 자리가 감독직인데 여러 가지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현 상황이 부담”이라며 “지금 감독직을 수행하는 것이 그동안 노력해 준 선수단과 배구 관계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고 감독직 고사의 뜻을 밝혔다.

흥국생명은 직후 임형준 구단주와 신용준 신임 단장 이름으로 사과문을 발표했다.

다음은 사과문 전문.

배구팬들과 핑크스파이더스 선수단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먼저 구단의 경기운영 개입 논란, 감독 사퇴와 갑작스러운 교체로 배구와 핑크스파이더스를 아껴주신 팬들께 심려를 드리게 된 점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이로 인해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핑크스파이더스 선수들과 코칭스태프에게도 머리 숙여 사과의 마음을 전합니다. 

최근의 사태는 배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경기운영 개입이라는 그릇된 방향으로 표현된 결과로써 결코 용납될 수도 없고, 되풀이되어서도 안 될 일임에 분명합니다. 

흥국생명 배구단은 앞으로 경기운영에 대한 구단의 개입을 철저히 봉쇄하고 감독의 고유 권한을 전적으로 존중할 것입니다. 구단의 굳은 의지가 단순히 구두선에 그치지 않도록 적극 노력하겠으며 이번 일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경기운영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흥국생명 배구단의 문화를 재정립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앞으로 핑크스파이더스의 주인은 흥국생명이라는 기업이 아니라 경기를 뛰는 선수들과 이들을 아껴주시는 팬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구단을 운영해 나갈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김기중 감독까지 고사의 뜻을 밝히며 흥국생명은 당분간 공식 사령탑 없이 시즌을 이어가게 됐다. "다음 감독님이 오시더라도 신뢰할 수 없을 것"이라는 김연경의 말은 구단의 고민을 더욱 키우고 있다. [사진=스포츠Q DB]

 

뒤늦게나마 바짝 엎드린 것은 불행 중 다행인 일이다. 사태를 최악으로 끌고 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여전한 아쉬움도 있다. 경기운영 개입 주체가 단장에 그치는 것인지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배구팬들은 일련의 사태가 김 전 단장의 단독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기에 다소 찝찝함이 남는 마무리다.

앞으로의 일에 대한 우려도 따른다. 경기 운영과 관련해선 감독에게 전권을 주겠다는 뜻을 나타냈지만 선수단과 구단, 나아가 감독과 관계에 있어서도 온전한 신뢰가 밑바탕이 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차기 사령탑 물색에도 어려움이 예상된다. 흥국생명은 당분간 김대경 감독대행 체제를 이어가겠다고 했는데 올 시즌 끝까지 새 감독을 구하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흥국생명은 선두 경쟁을 이어가고 있다. 권 감독 경질 후에도 2연승을 달렸다. 심지어 8일엔 이영수 감독대행과 김연경이 없이도 화성 IBK기업은행을 잡아내는 저력을 보여주며 승점 47로 선두 수원 현대건설(승점 51)과 격차를 좁혔다. 11일 오후 7시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으로 현대건설을 불러들여 빅매치를 치른다. 최악의 상황 속 선수들이 어떤 결과를 보여줄 수 있을까. 구단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지만 선수단을 향한 팬들의 지지는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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