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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롤리' 정수빈, 행복을 기다리며 [인터뷰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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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롤리' 정수빈, 행복을 기다리며 [인터뷰Q]
  • 나혜인 기자
  • 승인 2023.02.27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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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글 나혜인·사진 손힘찬 기자] "고도를 기다려야지" 무대 위 두 남성이 서로에게 닿지 않는 대화를 주고 받으며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고도가 누구인지, 언제 그곳에 나타날지 모른 채 나무 아래를 서성인다. 장면 전환 없이 몰아치는 대사에 까무룩 잠이 들 법 한데, 객석에 앉아있는 여고생은 달랐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까' 이런 고민을 하던 시기에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봤어요. 무대에서 두 배우가 에너지를 토하며 연기하는 모습을 보는데 '저 선배님들처럼 연기를 한다면 행복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수빈(24)은 부조리극의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자신의 행복을 엿봤다. 그들이 기다림은 막연한 희망이 아닌 그 자체의 행복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다다르니 무대 위 배우들처럼 연기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고등학교 3학년, 자신이 누구인지, 앞으로 무엇을 마주해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 중요한 시기. 어린 정수빈은 무대 위 두 배우를 보며 같은 꿈을 꿨다.

정수빈.

평소 성실한 학생이었던 그가 갑작스레 연기를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딸의 의사를 존중했고, 정수빈은 부모님 지지 속에 연기 명문 한국예술종합학교 합격증을 목에 걸었다.

그가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이었다.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배우의 꿈을 포기했던 그의 아버지는 무대를 향한 열정만은 놓지 않고 여가 시간을 쪼개 연극 곁에 머물렀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접했던 것 또한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최근 종영한 SBS 월화드라마 '트롤리'로 공중파 주연을 달았을 때도 아버지는 동료로서 딸을 바라봤다. "우리 딸 잘했어"라는 칭찬을 건네기 보다 "이 장면에선 이런 연기가 좋았다"고 명확하게 짚었다. 한 회차가 끝나면 대본과 실제 연기를 비교해보는 시간도 가졌다. 가장 가까운 곳에 든든한 지원군이 자리한 덕에 정수빈은 더욱 빨리 성장할 수 있었다.

"연기는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니까 그 사람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가는지 알 수 있더라고요. 덕분에 부정적인 시선보다 긍정적인 시선을 갖게 됐어요. 세상을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바라보게 되는 거죠. 이런 부분에 있어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이 커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버지께서 한편으로 저의 삶을 부러워하시기도 하거든요. 정년퇴직하시면 언젠가 꿈을 되찾지 않으실까요."

2019년 영화 '주근깨'로 데뷔한 신예 정수빈은 드라마, 영화, 연극을 오가며 배우 타이틀을 스스로에게 녹여냈다. 그런 그에게 2022년은 아주 뜻 깊은 해였다. '너와 나의 경찰수업'을 시작으로 '소년심판', '3인칭 복수', '아일랜드', '트롤리'까지 무려 4편의 작품을 연달아 선보였기 때문. 특히 그가 출연한 OTT 작품은 국내외로 큰 인기를 끌어 해외 시청자에게도 눈도장을 찍었다.

그중 트롤리 속 수빈과 정수빈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기존 배우가 하차하며 정수빈에게 돌아돌아 온 대본이었지만, 배우가 같은 이름의 배역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은 데다 공중파 첫 주연작을 자신의 이름으로 장식하는 일은 더더욱 흔치 않으니 말이다. 정수빈 역시 대본을 받고서 "신기하다"고 생각했다며 "언젠가 같은 이름의 인물이 오겠지라는 생각은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2주. 촉박한 촬영 준비 기간 동안 8부까지의 대본을 모두 숙지해야 했다. 베테랑 배우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정수빈은 스터디카페 1인실에서 밤을 지새우며 오롯이 수빈이 되고자 노력했다.

"오디션을 볼 때도 급하게 촬영에 들어가야 하는데 괜찮냐고 물으셨어요. 그때 '수빈을 표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하루든 이틀이든,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분이라면 모두 상관없을 거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했거든요. 시간에 쫓기니까 더 최선을 다 했어요.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보니까 서사를 함부로 뱉기가 어렵더라고요. 제가 원래 공부를 하던 학생이었다 보니 수능 공부하던 방식으로 대본을 도표로 구조화해서 외웠어요. 또 걸으면서 상상력 훈련을 많이 하는 편인데 트롤리를 준비하면서는 설악산을 올랐어요. 12~14시간 정도 걸려서 완등했는데, 힘이 들 때마다 '내가 지금 힘든 게 수빈이의 인생보다 힘들까' 이런 생각을 했죠."

유산의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서 직접 산부인과 전문의를 만나기도 했다고. 정수빈은 "산부인과 전문의 분께 들어보니 1/3에 가까운 여성분들이 아이를 갖기 전에 유산을 겪는다고 하시더라. 겪어보지 않은 아픔을 함부로 표현하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자문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실제 피해 사례가 있는 캐릭터를 주로 연기하다 보니 "같은 아픔을 겪는 분들에게 응원과 위로를 주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됬다며 "혹여나 또 다른 아픔을 주진 않을까 조심했다. '아일랜드'의 경우 N번방 피해자를 연기하게 돼 최대한 많은 기사를 수집하고 공부했다"고 덧붙였다.

앞서 김문교 감독은 배우 교체와 함께 수빈의 이미지를 새롭게 바꾸는 과정이 필요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정수빈은 "누가 맡느냐에 따라 다르게 표현했겠지만, 감독님께서 저라는 사람이 내는 수빈의 목소리를 좋게 생각해주셨던 것 같다. 제가 감독님이라면 이전에 그린 수빈과 180도 다른 수빈을 만드는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을 텐데, 저를 믿어주신 덕에 정착하는 단계가 훨씬 수월했다"며 "정말 감사한 건 스태프 분들이 현장에서 '수빈이 왔어'하고 편하게 맞아주신 거다. 덕분에 적응이 빨랐다"고 이야기했다. 

김현주와의 호흡에 대해서는 "함께 만들고 좋은 것을 함께 나누는 게 더 나은 연기라고 배웠는데, 선배님께서 먼저 '우리 이렇게 해볼까'하고 제 의견을 물어봐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며 "초반에는 연기적인 면에서 무언가를 더 채우려고 했는데 온전히 비우고 선배님을 바라보니까 선배님의 감정을 통해 배우는 것들이 있더라. 비워내고 다가갔을 때 오히려 음표처럼 연기를 연주할 수 있구나, 더 좋은 배우가 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양한 곡을 연주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현주 선배님을 통해 갖게 됐다"고 존경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가장 많이 담긴 장면은 수빈이 혜주(김현주 분)의 집을 홀연히 떠나는 장면이었다. 그는 "처음엔 묵직함을 담아내고자 했는데 여기선 숨겨보는 게 더 낫다는 걸 깨달았다. 감정적으로 하기보다 속으로 쥐고 있는 감정을 보여주려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박희순에 대해 "촬영이 들어감과 동시에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위치에 올라가더라도 기본기는 놓치지 말아야겠다, 성실함을 잃지 않고 모두와 소통하는 배우가 돼야겠다'는 배움을 얻었다"고 말했다. 

매 작품 쉽지 않은 인물을 연기한 그에게 밝은 캐릭터에 대한 욕심은 없냐고 묻자 "지금 제가 맡은 인물을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 싶다"며 "그동안 연기한 인물이든 러블리한 친구든 작품 속 인물을 소중하게 드려내고 싶고, 배우로서 보여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캐릭터도 비슷한 지점을 각기 다른 섬세함으로 표현하려 노력했다"고 답했다.

신예에게 빠지지 않은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에는 "액션도 해보고 싶고 '멜로가 체질' 같이 20대 청춘의 고민을 응원해줄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 또 '나의 아저씨'가 제게 많은 위로를 준 작품이라 다른 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작품도 해보고 싶다. 무엇보다 다채로운 연기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하고 기쁨을 선사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특히 트롤리를 통해 김현주를 롤모델로 삼게 됐다는 그는 또 다른 롤모델로 고두심을 꼽으며 "'디어 마이 프렌즈'의 연기가 인상 깊게 남아있다. 고두심 선배님은 어머니라는 인물을 연기해도 각 작품마다 다른 연기를 보여주시지 않나. 개인적으로 이 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선배님께 배움을 많이 얻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정수빈은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아일랜드 시즌2'로 시청자와 다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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