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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의 삼진·도로공사의 기적… 스포츠의 전율 [기자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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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의 삼진·도로공사의 기적… 스포츠의 전율 [기자의 눈]
  • 김진수 기자
  • 승인 2023.04.10 11: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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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김진수 기자] 지난 6일 김천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와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의 챔피언결정전 5차전이 열린 인천삼산체육관. 기자석이 들썩거렸다. 2승2패로 맞선 것도 모자라 두 팀은 4세트까지 2-2로 팽팽했다. 마지막 5세트에서야 최후의 승부가 갈리는 것이었고 기사를 쓰는 기자들의 손놀림도 빨라졌다.

기자들에게 5세트는 고통(?)이기도 하다. 15점을 먼저 내면 승부가 나기 때문에 기사를 빠르게 써야 하는데, 접전으로 치러질수록 어느 팀이 이길지 확신이 없으니 기사를 계속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날 5세트가 그랬다. 하지만 접전이라는 건 그만큼 보는 이를 짜릿하게 만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15점에 가까워질수록, 양 팀에서 한 점 한 점 나올 때마다 기자석에서 탄성이 나왔다. 기사 쓰는 손은 차가워야 했지만 가슴이 요동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여자부 포스트시즌 역대 최장인 2시간 38분 승부의 끝은, 0%의 확률을 깬 도로공사의 기적이었다. 1~2차전을 지고 내리 3승을 거둔 도로공사의 챔프전 우승. 프로배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명승부 끝에 나온 기적이라니, 스포츠가 할 수 있는 건 다한 셈이다.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와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에서도 1~2차전을 내주고 우승한 사례는 각각 두 차례밖에 없는 보기 드문 기록이다.

김천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 선수단이 6일 오후 인천광역시 인천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2022~2023 도드람 V-리그(프로배구) 여자부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와 챔피언결정전 5차전 경기에서 세트스코어 3-2로 승리해 우승한 뒤 트로피를 든 채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사진=스포츠Q(큐) DB]
김천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 선수단이 6일 오후 인천광역시 인천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2022~2023 도드람 V-리그(프로배구) 여자부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와 챔피언결정전 5차전 경기에서 세트스코어 3-2로 승리해 우승한 뒤 트로피를 든 채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사진=스포츠Q(큐) DB]

배구장에서 본 명승부의 짜릿함은 지난달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결승전을 보면서도 느낀 적이 있다. 오타니 쇼헤이와 마이크 트라웃(이상 LA 에인절스)이 맞대결하는 그 장면이었다. TV를 넘어 오는 경기장 열기를 막을 수 없었다. 에인절스의 동료인 야구 천재와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가, 국가대표로 만나 결승전에서, 그것도 9회말 2아웃에서 만났다. 상상했던 장면이 현실에서 만들어졌을 때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느 책에 쓴 ‘등줄기에 찌릿찌릿한 전류’라는 대목이 생각났다.

오타니가 와인드업하는 순간, 트라웃이 방망이를 휘두르는 순간마다 내 심장 박동 수가 출렁거렸다. 세기의 대결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이 장면은, 땅볼도 뜬공도 볼넷도 아니라 야구에서 우리를 가장 흥분시키는 삼진으로 막을 내렸다. 절대 만들어질 수 없는 장면이 스포츠에는 있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이제는 다소 식상한 표현이지만 스포츠에 이보다 잘 어울리는 말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스포츠가 한 편의 영화보다 더 감동을 주는 이유를 꼽으라면 그건 라이브라는 묘미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잘 짜진 각본이고, 스포츠는 각본이 없으니까.

오타니 쇼헤이와 일본 야구대표팀이 3월 22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결승전에서 우승을 확정지은 뒤 그라운드로 나와 기뻐하고 있다. [사진=USA투데이 스포츠/연합뉴스]
오타니 쇼헤이와 일본 야구대표팀이 3월 22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론디포 파크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결승전에서 우승을 확정지은 뒤 그라운드로 나와 기뻐하고 있다. [사진=USA투데이 스포츠/연합뉴스]

지금 내가 바라보는 이 시간, 이 공간에서 상상하지 못한 승부가 벌어질 때 우리는 고단한 일상을 잠시라도 잊고 강력하고 잊을 수 없는 떨림을 경험한다. 지난해 카타르월드컵 포르투갈전의 황희찬(울버햄튼 원더러스 FC)의 역전골, 그보다 앞서서 나온 한국시리즈 5차전 9회말 대타 김강민(SSG 랜더스)의 역전 끝내기 3점 홈런도 그랬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승부보다는 경기 자체를 즐기는 팬들도 많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어떤 순간 속으로 완전히 몰입시키고 여운을 안겨주고, 그 끝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정해지는 냉정한 승부의 스포츠의 세계는 실로 대단하다. 요즘 스포츠에서 극적인 장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일상에서 온몸이 요동치는 전율을, 우리가 스포츠가 아니면 또 어디서 이렇게 느껴볼 수 있을까.

요즘 뉴스를 틀면 혼란스러운 소식들뿐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삶은 거꾸로 팍팍해지는 것일까. 어째 웃을 일이 줄어드는 것만 같다. 이럴 때 스포츠의 역할은 명확해진다. 명승부가 만들어내는 전율을 느끼러, 선수들의 호흡이 가득한 그곳으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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