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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의 사랑 그리고 배신, 윤석화의 '먼 그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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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의 사랑 그리고 배신, 윤석화의 '먼 그대' [인터뷰]
  • 용원중 기자
  • 승인 2015.06.13 15: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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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글 용원중 기자·사진 이상민 기자] ‘연극 여제’의 쉼터이자 창작의 산실인 대학로 정미소. 한여름의 태양을 연상케 하는 뜨거운 여배우 윤석화가 골목길 작은 의자에 웅크리고 앉은 채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리로 오라고. 하얀 드레스셔츠에 복고풍 선글라스를 착용한 모습이 1998년 출연했던 연극 ‘마스터 클래스’ 속 세기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와 오버랩됐다.

 

◆ 임영웅 연출인생 60주년 기념 1인극 ‘먼 그대’ 각색·연출·연기

윤석화는 스승인 임영웅의 연출인생 60년 기념 헌정공연 시리즈 첫 작품인 모노드라마 ‘먼 그대’(18일~7월5일·홍대 산울림 소극장)의 각색, 연출, 주연을 맡아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선생님 축제에 1호로 뜨는데 펑크를 낼 순 없잖아”라고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 뒤 “덜컥 창작극을 하겠다고 욕심을 내선, 불과 공연 40일 전부터 각색에, 연출에, 연기 연습에...부산을 떨고 있어. 무모하게 도전하니 사람을 죽이네”라고 비명을 질렀다. 똘랑 세 문장 안에서도 희비극, 호러, 판타지가 드라마틱하게 교차한다. 그녀만의 화법이다.

‘먼 그대’는 1983년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서영은의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남루한 옷차람과 비정상일 정도로 성실한 출판사 교정직원인 노처녀 문자가 유부남 한수를 만나면서 고통스러운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이야기다. 남자의 배신, 세상으로부터의 소외에 직면해도 문자는 내면에 한 마리 낙타를 키우며 생명의 오아시스를 향해 불뚝불뚝 일어선다.

83년은 윤석화가 연극 ‘신의 아그네스’로 소극장 돌풍을 일으켰던 해다. 이듬해 처음으로 ‘먼 그대’를 읽었을 때 연극으로 만들면 멋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97년 창작뮤지컬 ‘명성황후’ 파동으로 심신이 지쳤을 당시 다시 읽었을 때 머리가 번쩍 했다. 과거엔 남녀의 이야기로만 이해했는데 다시 보니 “문자에게 있어 등불 같은 존재이자 조건 없는 사랑의 대상인 한수가 내겐 연극이고 관객이야!”란 감정이 솟구쳤다. 문학작품이 주는 깊은 맛과 새로운 해석에 흠뻑 빠져들었다.

 

“연극으로 올리긴 어렵지만 문학과 연극, 그 만남의 좋은 예라고 여겼어. 문학작품이 갖고 있는 메타포를 공연예술로도 만들 수 있다고 여겼지. 남은 과제는 어떤 연극에서도 시도하지 않은 기법을 동원해 새로운 개념의 연극, 좋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만드는 거지.”

글이나 말로도 미처 표현할 수 없었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드러내기 위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선 수화를 구사한다. 문자의 환경, 심리를 전달하기 위한 장치로 손동작 등 무브먼트도 동원한다. 무대 위 문자와 유일하게 감정을 교류하는 오브제로는 콘트라베이스(연주 나장균)가 등장한다.

◆ ‘베니스의 상인’ 이후 5년 만에 배우 복귀, 모노드라마는 10년 만

배우로 복귀하는 건 2009년 말 명동예술극장 ‘베니스의 상인’ 이후 5년 만이다. 모노드라마 출연은 10년 만이다. ‘목소리’ ‘딸에게 보내는 편지’ ‘영영이별 영이별’ 등 윤석화의 모노드라마는 매번 매진사례를 이룬다. 관객이 그 어떤 배우보다 윤석화의 1인극을 좋아한다는 증표다. 스타성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감정의 스펙트럼이 넓고도 강렬하기에 감상의 재미가 커서다.

“모노드라마를 하면 처절하게 외로워. 혼자 발가벗고 서 있는 느낌이 들거든. 여러 배우들과 스케일이 큰 대극장 작품을 했을 때 부피가 주는 느낌과는 사뭇 달라. 1인극의 경우 작품 속 인물에 나를 대입하는 게 더 쉽고, 관객과 소통이 아주 잘 이뤄지지. 관객과 배우가 너와 나 같고, 더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그래서 한편으론 더욱 어려워.”

 

75년 연극 ‘꿀맛’으로 데뷔한 이후 각색과 연출에도 능력을 발휘했다. 86년 기획·연출·주연·제작한 뮤지컬 '송 앤 댄스'를 시작으로 연극 ‘푸시케 그대의 거울’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뮤지컬 ‘토요일 밤의 열기’, 연극 ‘나는 너다’ ‘먼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차고 단단한 바닥에서 생명수를 찾아가는 거라 말하고 싶어. 각광에 대한 관심보다 오로지 작품에 꽂힐 뿐이었지. ‘이 작품을 꼭 해야겠다’ 싶으면 내가 (연출)하는 거고. 연출을 하면서 오해와 편견도 있었으나 늘 본질은 ‘내가 꿈꿔왔던 게 무엇이었나’ ‘관객에게 주고 싶은 게 무엇이었나’였던 것 같아.”

◆ 2011년 영국 입성 ‘웨스트엔드 첫 아시아 여성 프로듀서’ 군림

2011년 뮤지컬의 본고장인 영국 웨스트엔드에 입성해 4년간 연극 ‘여행의 끝(Journey's End)’을 시작으로 2012년 올리비에 어워드 작품상 등 3관왕을 석권한 뮤지컬 ‘톱 햇(Top Hat)’, 거장 팀 라이스와 함께 작업한 뮤지컬 ‘지상에서 영원으로(From Here To Eternity)’, 제이미 리오이드와 공동 작업한 뮤지컬 ‘유린타운’의 프로듀서로 활약했다. ‘웨스트엔드 첫 아시아 여성 프로듀서’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영국에 갔던 건 ‘지상에서 영원으로’ 개발 때문이었어. 나중에 연출자 선정을 두고 마찰을 빚었지. 난 시간이 걸리더라도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영화감독 샘 맨더스나 대니 보일이 연출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어. 무대의 꽃은 배우지만 작품의 뿌리이자 최종 단계를 책임지는 건 연출이기에 고집을 부렸는데 제작비 등의 문제로 무산됐지. 결국 작품은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고. 영국에서 프로듀서 일을 다 배워버렸더니 더 이상 재미가 없더라고. 후후. 내가 능력이 있다면 우리 관객을 위해 쏟아내면 되지 뭐하러 걔네들을 위해...란 생각도 들더라고.”

 

윤석화는 40년 연극 여정에서 영광과 동시에 숱한 오해와 질시, 아픔을 겪어야 했다. 스스로 만든 장애도 있었으며, 편견에서 비롯된 것들도 있었다.

“이 땅이 그리고 연극이 날 아프게 했어도 고난이 주는 축복이 있거든. 빛나는 찰나를 위해 바쳐야 했던 시간이 너무 크고 아펐지만 바치지 않고 자기 게 되는 건 없으니까. 친구와 관객들이 어느 날 ‘먼 그대’의 한수처럼 아무 말 없이 나를 떠나기도 했지만, 진정한 사랑이란 조건이 없지 않나. 자신이 선택한 절대적, 긍정적 가치를 위해 가는 것일 뿐이지. 내가 걸어온 이 길 역시 내가 선택한 거였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40년을 버텨왔던 것 같아. 결국 삶이라는 게 자신 안 낙타와의 싸움이 아닐까 싶어.”

◆ 11월 과거 히트작 1편 기념공연...내년 3월 연극무대서 파격 연기

오는 11월 배우인생 4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을 올린다. 그가 출연했던 숱한 명작들 중 한 작품을 골라 각별한 인연을 나눈 쟁쟁한 후배 연기자와 함께 무대를 꾸밀 계획이다.

이어 내년 3월에는 파격적인 시도를 한다. 그가 이제까지 시도한 적이 없던 장르의 연극에서 이색적인 캐릭터를 맡아 새로운 연기결을 보여준다. “배우 윤석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인장을 찍겠다는 복안이다.

 

프로듀서, 제작자, 연출가로 바쁜 나날을 보냈던 연극계 부동의 스타가 ‘먼 그대’란 변곡점을 통과하며 배우활동에 비중을 높일 전망이다. 윤석화표 주술에 중독된 관객에겐 더할 나위 없는 굿 뉴스가 아닐까.

[취재후기]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휴대폰에 저장된 두 아이의 사진을 보여줬다. 가슴으로 낳은 아들 수민이는 초등학교 6학년, 딸 수화는 3학년이다. 영국 이튼스쿨 학생처럼 단정하게 차려입은 수민이는 부쩍 성장한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 악기를 들고 있는 수화는 음악에 재능이 많다고 자랑했다. 절대적으로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시점이라 일을 조절해야 하는 게 만만치 않다고 웃으며 하소연했다. 위풍당당한 여제로부터 천상 엄마의 얼굴이 쓰윽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goolis@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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