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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스페셜] 떠돌이 야구인생 '저니맨'의 생존 법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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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스페셜] 떠돌이 야구인생 '저니맨'의 생존 법칙은?
  • 민기홍 기자
  • 승인 2015.07.06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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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덕한 NC행...최익성-동봉철-이동수가 말한다, 저니맨은 살아남은 자들이다

[200자 Tip!] 저니맨. 한 팀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이 팀 저 팀을 전전하는 선수를 뜻한다. 100년 역사를 넘는 메이저리그(MLB)에는 마이크 모건, 미겔 바티스타, 옥타비오 도텔 등이 10여 개 팀을 오간 사례가 있다. 34세 KBO리그에도 사연 많은 저니맨들이 있었다. 이들은 쓰임새가 애매해 정착하기 무섭게 팀을 옮겨 다녔다. 한국 대표 ‘떠돌이 야구선수’들로부터 직접 듣는 저니맨 이야기다.

[스포츠Q 민기홍 기자] 지난달 21일 용덕한(34)이 케이티에서 NC로 트레이드됐다. 프로 12년차 용덕한은 2004년 두산에서 데뷔해 2012년 롯데, 지난해 케이티를 거쳐 네 번째 유니폼을 입게 됐다.

잦은 이적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용덕한은 쓰임새를 매번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저니맨 선배들의 사례와는 성격이 다르다. 특히 이번 이적의 경우 버림받아 옮긴 것이라는 느낌보다는 144경기 체제에서 김태군의 백업 포수가 절실했던 NC가 간절히 원한 카드라는 느낌이 강하다.

▲ 용덕한은 3년 새 유니폼을 세 차례나 바꿔 입게 됐다. 백업포수가 절실했던 NC의 필요에 의해 1년도 채 안 돼 또 팀을 옮겼다. [사진=NC 다이노스 제공]

용덕한은 “최근 3년 동안 유니폼을 세 차례나 바꿔 입었다. 이렇게 많이 팀을 옮길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며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야구를 하겠다. 팀의 승리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각기 다른 유니폼 4벌은 선배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용덕한 이전에 동봉철과 최익성과 이동수가 있었다. 동봉철과 이동수는 5개 구단, 최익성은 6개 구단 유니폼을 입었다. 셋은 골수 야구팬들이라면 흥미롭게 떠올릴 만한 선수들이다.

◆ 저니맨을 나타내는 키워드 셋, 눈물, 덤덤, 적응

"눈물도 흘렸죠. 하도 많이 하니 숙명으로 받아들였죠."

최익성. 신고선수 신화를 썼다. 경주고, 계명대 출신인 그는 입단 3년 째던 1997년, 삼성의 리드오프로 자리 잡아 타율 0.296, 22홈런 65타점 33도루로 맹활약했다. 1999년 한화를 시작으로 LG, 해태(KIA), 현대를 거쳤다. 2003년 방출 뒤 삼성에 재입단했다가 2005년 SK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통산 성적 타율 0.267, 60홈런 216타점 85도루.

“처음에나 속상하지 한두 번 하다보면 그냥 옮기는구나 합니다. 덤덤해지죠 뭐.”

동봉철. '최고의 2번타자'로 팬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신일고, 중앙대를 졸업하고 삼성에 입단한 그는 해태, LG, 한화를 거쳐 쌍방울에서 은퇴했다. 통산 750경기에 나서 타율 0.264, 34홈런 210타점 387득점 116도루를 기록했다. 입단 첫 해였던 1992년, 0.317, 95득점으로 타율 7위, 득점 3위를 차지했다. 투지가 넘쳐 몸으로 오는 공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1992년부터 4년간 각각 13, 12, 10, 9회씩 몸에 공을 맞으며 이 부문 1위, 2위, 7위, 7위에 올랐다.

"처음은 당황스럽죠. 근데 겪다보면 뭐... 하도 많이 옮기니 친숙한 사람들 또 만난다는 느낌? 돌아다니는 것이 힘든 게 아니라 감독님, 코치님 바뀌고 운동하는 환경이 자꾸 바뀌는 것, 또 적응해야하는 것, 그게 어려운 일입니다."

이동수. 1995년 신인왕이다. 대구고를 졸업하고 삼성에 입단한 그는 김한수의 방위 복무로 주전을 꿰찼고 그해 0.288, 22홈런 81타점을 기록했다. 김상호(OB)에 이은 홈런 2위, 입단 4년차였지만 5년 이내 60타석을 넘기지 않으면 신인이라는 KBO의 해석에 따라 이동수는 마해영(롯데)과 심정수(OB), 이승엽(삼성)을 제치고 고졸 야수 출신 첫 번째 신인왕이 됐다. 이후 롯데, 쌍방울, SK, 해태를 거쳤고 두산에서 은퇴했다.

◆ 지방팀은 군기가 셌다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고 프로야구 팀들도 지역 색깔이 많이 옅어졌다. 하주석, 유창식같은 고교야구 최고 선수였던 이들은 드래프트를 통해 입단해 트레이드가 아닌 이상 고향팀에서 뛰지 않는다. 그러나 1990년대 야구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선수는 그 팀에서 뛰는 게 당연시됐다. 최동원과 박정태는 롯데, 선동열과 이종범은 해태, 장효조와 양준혁은 삼성, 장종훈과 송진우는 빙그레여야 했다.

동봉철은 “당시에는 지역색이 매우 강했다. 선수단 구성 중 그 지역 출신이 70%는 됐던 것 같다"고 회상한다.

▲ 동봉철은 빼어난 2번타자였다. 공을 두려워하지 않아 데뷔 후 4년간 사구 순위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동봉철 제공]

최익성은 "대전은 대전고, 천안북일고, 광주는 광주일고, 광주상고, 대구는 경북고, 대구고 등 어렸을 적부터 십수 년을 함께 야구해온 ‘라인’이 있어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며 "한국인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지역에 관한 정서들이 실제로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서로를 챙기는 호남 사람들 특유의 정 문화, 부산 사나이들의 화끈함, 유순한 듯 하지만 성취욕이 강한 충청도 등이라 할 수 있다.

이동수 역시 "밖에서 보시는 이미지와 많이 맞아떨어진다"고 맞장구를 쳤다. 팀간 차이는 '군기'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롯데나 해태의 경우 어찌보면 학창 시절보다도 선후배 규율이 엄격했다. 그래서 중고참이 되면 무척 편해지는 팀이었다"면서 "반면 수도권 팀들은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지만 롯데, 해태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밝혔다. 동봉철과 최익성도 "서울권 팀들은 확실히 좀 자유로웠다"고 회상했다.

2004년 프로 유니폼을 입은 용덕한의 생각은 선배들과는 다르다. 그는 두산, 롯데처럼 원년부터 역사를 이어온 팀에 몸담다가 케이티, NC같은 문화를 만들어가야하는 구단에 몸을 담게 됐다. 용덕한은 “신생팀은 우리가 전통을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점이 다소 다를 뿐 나머지 팀간의 차이는 거의 느끼지 못했다”며 “야구를 위해 모인 사람들인 만큼 큰 문화 차이는 없다”고 말했다.

◆ 저니맨의 장점들, 시야가 넓어졌다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모른다. 하지만 저니맨들은 "장점도 많다. 특히 살아가는데 있어서 많은 곳을 거친 것이 큰 도움이 된다"며  "‘원팀맨’이라면 절대로 볼 수 없었을, 모르는 것들을 경험했다"고 입을 모았다.

동봉철은 “이 팀, 저 팀의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한다. 한 팀에 오래 머문다면 결코 인지하지 쉽지 않을 것들”이라며 “주변을 보면 코치를 하면서 팀 특유의 문화를 몰라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더라. 지도자, 해설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선수들을 두루두루 알게 된 점, 많은 사람들과 알고 친하다는 점도 큰 메리트”라고 말했다.

이동수는 "야구 외적인 부분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것에 크게 동의한다"며 "해설도 하고 학생들도 지도하지만 여러 팀을 옮겨보면서 배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최익성은 '각도'라는 단어를 썼다. 그는 "야구선수로서야 한 팀에만 있는 것이 성공한 삶이라 할 수 있겠지만 다른 성공은 없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다양한 각도가 생겼다"며 "실패 후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받아들이는 게 쉬워졌다.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고 귀띔했다.

현역인 용덕한은 포수로서의 장점에 대해 한 마디 했다. 그는 "기동력의 팀, 투수가 강한 팀 등 다양한 팀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며 “이런 경험들이 동기부여가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 어느 포지션보다 실전이 경기력과 직결되는 포수이기에 많은 투수들과 호흡을 맞춘다는 점은 특장점이 될 수 있다.

▲ 이동수는 1995년 신인왕이다. 심정수와 마해영 등 내로라하는 타자들을 제치고 거둔 쾌거다. [사진=이동수 제공]

◆ 이적은 버림받는 것이 아니다

NC와 케이티의 창단으로 모창민, 김종호, 오정복, 하준호 등 '제2의 야구인생'을 열어젖힌 사례가 급증했다. 자유계약선수(FA)로 풀리면 거액의 돈을 만지면서 명예로운 이동을 하는 경우도 부쩍 늘었다. 격년제로 열리는 2차 드래프트, 트레이드에 인색했던 문화가 사라지면서 이동은 흔한 일이 됐다.

최익성은 "1990년대의 트레이드야 선수생활의 끝인 것처럼 여겨졌지만 요즘은 기회이지 않나. 선수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게 많지 않은가"라며 "행여 원치 않는 트레이드가 되더라도 프로이기 때문에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요새는 어느 팀이나 환경이 비슷해 운동하기 좋다. 행복하게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고 조언했다.

동봉철 역시 "예전에야 ‘버림받았구나’라는 생각을 많이들 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며 "빠르게 적응하는 선수들 보면 '저 선수 멘탈이 좋구나'란 생각이 든다. 기회를 잡으면 된다"고 말했다. 이동수는 "물론 운동 열심히 해서 한 팀에 오래 있는 것이 물론 제일 좋다"면서도 "1등 팀 백업하는 것 보다야 약한 팀에서 주전하는 게 훨씬 나으니 이적을 슬프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용덕한은 “팀이 나를 필요로 해서 온 만큼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내가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며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팀에 빨리 녹아들어 '강한 NC가 더욱 강해졌다’라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전의를 불태웠다.

그렇게 힘들게 야구를 했는데, 이들 모두 야구계를 떠나지 않았다. 동봉철은 지난해 KBO 육성위원과 SPOTV 퓨처스리그 해설위원으로 활약한 후 올해는 KBS 라디오 해설을 하고 있다. 최익성은 저니맨 야구육성사관학교의 대표다. 지난해까지 대구 케이블 TBC 해설위원던 이동수는 현재는 계명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버텨낸 자가 강한 자다. 저니맨은 그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야구를 붙들고 늘어졌다. 현장 사람들은 늘 그들을 필요로 했다. 이제 야구팬들은 그들을 버림받은 선수라고 추억하지 않는다. 사연이 많았던 선수, 활용도가 요긴했던 선수로 기억할 뿐이다.

▲ 최익성은 한국 최다 이적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야구를 통해 야구가 아닌 다른 인생을 사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사진=스포츠Q DB]

한국을 떠나서도 미국과 멕시코리그 문을 두드렸다. 현장을 떠난 후에는 청바지, 소주방 사업을 했다. 강사로 활약하기도 했고 넘치는 끼를 주체하지 못해 연예계까지 진출했다. 연애 프로인 ‘짝’에도 출연해 야구팬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기도 했다. 현재는 저니맨육성사관학교와 출판사 RJ(리얼 저니맨) 컴퍼니를 운영한다.

자신의 별명을 딴 육성사관학교는 선수육성에서 재활, 총괄적인 매니지먼트까지 아우르는 매니지먼트 회사라 할 수 있다. 현역 시절에는 꼬리표같이 따라다니는 별명을 달갑지 않아 했지만 "뒤집어 생각하니 오히려 좋은 의미"가 됐다며 '저니맨'이란 책도 저술했다.

남들보다 2~3년 늦은 중학교 1학년 때 방망이를 잡았고 입단 당시 계약금을 받지도 못했다. 그래도 피나는 노력으로 20-20 클럽에 들었다. 최익성은 "늘 그렇게 뒤처진 삶을 살았다. 저니맨 인생을 통해, 야구를 통해 야구가 아닌 또 다른 인생을 배웠다"고 말한다.

[취재 후기] 동봉철은 은퇴 후 돌연 일본 유학길에 올라 접시닦이, 전단지 붙이기 7~8개의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 일본어를 배웠다. 귀국 후에는 엔터테인먼트 회사 직원으로 일하다가 직접 사장이 되기도 했다. 사진 스튜디오, 양대창 집도 열었다. 저니맨들의 공통점, 그것은 좀처럼 포기를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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