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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죽음의 '향기'로 무대 채우는 발레리나 '홍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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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죽음의 '향기'로 무대 채우는 발레리나 '홍향기'
  • 용원중 기자
  • 승인 2014.04.25 07: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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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개막 모던발레 '멀티플리시티' 죽음 역 열연

[300자 Tip!] ‘죽음’으로 무대를 휘저을 유니버설발레단(UBC) 드미 솔리스트 홍향기(25)를 24일 역삼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했다. 스위스 로잔 콩쿠르 3위에 입상하며 주목받았던 그는 2011년 UBC 군무진으로 입단해 3년 만에 드미 솔리스트로 맹활약하고 있다. 이번에는 모던발레 ‘멀티플리시티(Multiplicity·다양성)’에서 하얀 가면에 검은색 치마를 펄럭이는 죽음 역을 맡아 어두운 향기를 발산한다. ‘백조의 호수’와 ‘돈키호테’ 출연을 희망하는 그는 무용수의 삶이 끝나면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싶다는 야무진 포부를 펼쳐보였다.

[스포츠Q 글 용원중기자· 사진 최대성기자]

 

◆ 바흐 음악 담은 ‘멀티플리시티’ 국내 초연...하얀 가면의 죽음 역 맡아

25~27일 LG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리는 세계적 안무가 나초 두아토의 ‘멀티플리시티’는 바흐의 칸타타와 무반주 첼로모음곡, 바이올린 소나타 등 23곡을 토대로 바흐의 삶과 죽음을 육체언어로 표현했다. 1막 ‘멀티플리시티’가 바흐와 그의 음악을 유머와 낭만으로 표현한다면 2막 ‘침묵과 공허의 형상’에선 비장감이 감돈다. 바흐의 쓸쓸한 말년, 창작의 고통, 죽음에 이르는 장엄한 이야기가 격렬한 음악에 버무려진다.

“바흐의 감성을 상징하는 하얀 가면의 여인을 통해 죽기 직전까지 순수성과 음악, 종교에 대해 갈등하는 바흐의 인간적인 욕망을 상징하죠. 이 여인은 죽음을 상징한다고 해요.”

▲ '멀티플리시티' 죽음의 절제된 동작[사진=유니버설발레단]

해외 발레단에서 공연할 때 주로 관록의 무용수들이 이 역을 맡았다. 홍향기의 경우 최연소 ‘죽음’이다. 지난주 내한해 무용수들을 지도한 나초 두아토는 “어린 나이임에도 깊이와 느낌을 잘 표현한다. 테크닉도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두아토를 처음 봤을 때 국내에 없는 몸을 가졌더라고요. 놀라우리만치 손발이 커요.(웃음) 제게 ‘멀티플리시티’는 육체 라인(선)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며 섬세하고 웨이브를 타는 듯한 동작을 강조했어요. 몸을 좀비처럼 사용한다고나 할까. 더불어 죽음에 걸맞게 아우라를 내는 눈빛을 강조했고요.”

◆ 안무가 두아토 “홍향기 어린 나이임에도 깊이와 느낌 알아” 극찬

‘백조의 호수’ ‘지젤’ ‘호두까기 인형’ 등 클래식 발레의 경우 스토리와 캐릭터를 이해한 뒤 음악에 맞춰 표정 및 동작위주의 연습을 하면 되는데 모던발레는 추상성과 이질적 동작으로 인해 어려움이 많다. 클래식 발레가 상체를 박스형으로 만들어 꼿꼿이 세워야한다면 모던은 구부려야 한다. 발모양도 턴아웃 형태가 아니라 일자로 유지해야 한다. 특히 ‘죽음’ 캐릭터는 상상력 동원에 한계가 있어 애를 먹었다.

“원래 밝고 장난기가 많은 편인데 일부러 감정을 다운시키면서 지냈어요. 바흐로 분한 남성 무용수가 여성 무용수의 몸을 첼로인 듯 활을 켜 연주하는 1막의 명장면(‘프렐류드’ 2인무)이 있는데 2막에서 제가 첼로 역의 선배를 죽음으로 이끌고 가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선배 언니를 평소 ‘미워한다’고 되뇌이기도 했고요. 후후.”

▲ '멀티플리시티' 죽음의 역동적 춤사위

지난 1999년 바흐 서거 250주년을 맞은 독일 바이마르시의 의뢰로 당시 스페인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으로 있던 두아토가 만든 이 작품은 바흐와 음악, 악기와 인간 신체가 하나로 통합된 독창적인 형식이 두드러진다.

“무용수가 악기가 되는 거잖아요. 인간의 몸에서 악기와 같은 모습이 나오도록 한 두아초의 천재성이 놀라웠어요. 1막이 밝고 경쾌한데 비해 2막은 다소 지루할 수 있어요. 음악도 암울하지만 대단할 정도예요. 발레의 다양한 매력에 빠져들 거예요. 바흐 음악은 저 역시 생소했는데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동작과 너무 잘 맞더라고요. 원래 춤을 위해 존재했던 것마냥.”

◆ 로잔콩쿠르 3위 입상 유망주...러시아 유학 후 UBC 군무로 출발

어린 시절부터 유망주였다. 선화예중을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영재 예비학교에 재학 중이던 2006년 세계적인 무용대회인 스위스 로잔 콩쿠르 3위를 했다. 무용원 입학 후 2학기 때 러시아 바가노바 발레스쿨로 유학을 떠나 1년 동안 수학했다.

“수상하면 보통은 유명 발레단에 입단해서 커리어를 쌓는데 전 어린 나이니까 공부를 하면서 제대로 배우자는 입장이었어요. 러시아 유학시절엔 바가노바 메소드인 근육의 적절한 이용, 세부적인 동작에 대한 개념 정립 및 탄탄한 기본기를 마스터할 수 있었죠.”

한예종 무용원 졸업 후 그의 표현력과 테크닉을 눈여겨보던 문훈숙 UBC단장의 지원에 힘입어 2011년 입단했다. 하지만 3년 가까이 코르 드 발레(군무) 생활을 했다. 솔리스트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없고, 고난도 테크닉을 구현할 필요가 없는 ‘그들’일 뿐이었다.

“군무 경험을 했기에 제가 주역을 맡았을 때 코르 드 발레와 좋은 앙상블을 이룰 수 있는 것 같아요. 또 주역이 받는 스포트라이트는 영예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엄청난 부담이잖아요. 그걸 안겪어도 됐으니까. 하하.”

◆ ‘오네긴’ 이어 ‘호두까기 인형’으로 첫 주역...발군의 테크닉과 신체조건

군무를 하면서도 ‘백조의 호수’에서 빼어난 파 드 트루아(3인무) 기량을 과시했고, 지난해 ‘오네긴’의 올가 역을 흠잡을 데 없이 연기해 드미 솔리스트로 승급했다. 이어 연말 ‘호두까기 인형’의 클라라 역으로 첫 주역 데뷔했다. 시련도 똬리를 틀었다. 입단 전후로 체중이 엄청나게 불어 곤욕을 치렀고, 발목부상으로 수술 후 1년에 가까운 재활훈련을 했다. 하지만 긍정의 힘으로 슬럼프를 이겨냈다.

▲ '카니발 오브 베니스' '호두까기 인형' '오네긴'(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제가 살보다 잔근육이 많아서 튼튼해 보인다고 언니들이 부러워해요. 특히 종아리 근육(알)이 멋져 보인대요.(웃음) 대신 상체가 딱딱해 보이는 게 단점이죠. 상체에서 좋은 표현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제 롤모델이 러시아 발레리나 율리아나 로파트키나예요. 긴 팔을 이용해 상체를 아주 길게 사용하는 데다 라인이 좋아서 정말 닮고 싶은 무용수죠.”

홍향기는 백조와 흑조라는 2가지 스타일을 모두 보여줄 수 있는 ‘백조의 호수’와 자신의 열정을 꾸밈없이 드러내는 게 가능한 ‘돈키호테’를 해보고 싶은 작품으로 꼽았다. 이를 위해 깊이 있는 표현력에 있어 최상의 교재인 영화감상에 공을 들이기도 한다. “왜 배우들이 배역을 받았을 때 평상시에도 캐릭터에 빙의된 채 살아가는 지를 점점 이해하게 된다”고 까르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그에게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 울퉁불퉁해진 발이 그간의 혹독한 연습을 웅변한다.

[취재후기] “죽을 때까지 무대에 서고 싶다” “체력이 되는 그날까지 무대를 지키겠다” 식의 비장한 선언 대신 말간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늦은 나이까지 발레하고 싶진 않아요.” 그녀는 박수칠 때 무대를 떠날 것이며, 유학을 가 더 많은 공부를 한 뒤 돌아와 선생님이 되기를 희망했다.

goolis@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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