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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 문신' 영롱히 아로새긴 박은선의 '렛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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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 문신' 영롱히 아로새긴 박은선의 '렛잇고'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4.05.09 11: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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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만에 돌아온 대표팀, 후배들에게 조언 구하며 적응 연착륙

[파주=스포츠Q 박상현 기자] "모르면 후배들에게 물어봐요. 후배들도 많이 조언해주고 있구요. 대표팀 적응 잘되고 있는 것 같아요."

한때 한국여자축구를 이끌어갈 대형 공격수였지만 여러 시련을 겪으며 '풍운아'라는 꼬리표까지 따라다녔던 박은선(28·서울시청)이 달라졌다. 초심으로 완전히 돌아간 듯한 모습이다.

윤덕여 감독이 이끄는 한국여자축구대표팀에서 박은선은 '넘버 3'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선수는 골키퍼 전민경(29·고양대교)과 김정미(30·현대제철) 뿐이다.

필드플레이어 가운데서는 단연 맏언니다. 막내인 안혜인(19·위덕대)과 9년 차이가 난다.

▲ [파주=스포츠Q 노민규 기자] 박은선이 8일 파주스타디움에서 열린 베트남과 연습 경기에서 드리블하고 있다.

◆ 초심으로 돌아간 박은선 "후배들에게 먼저 다가가요"

하지만 박은선은 자신이 한때 한국여자축구를 이끌어 갈 대형 공격수로 기대를 받았던 기억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이미 9년도 훨씬 넘은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평소에 주장인 조소현(26·현대제철)이 계속 도움을 줘요. 조언도 많이 해주고요. 유영아(26·현대제철)도 조언을 많이 해주죠. 저 역시 대표팀에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서 먼저 후배들에게 다가가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어보곤 하죠."

우리나라 선후배 문화를 생각하면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보통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강요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은선은 자신의 대표팀 적응에 후배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자세로 임하는 것이다.

이는 후배들의 증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수비수 임선주(24·현대제철)가 말한다. "은선 언니는 겉으로 보면 무섭게 생겼는데 실제로 부딪혀보면 속정도 깊고 매우 따뜻해요. 직접 부딪혀봐야 언니의 마음씨와 인간미를 알 수 있어요. 훈련할 때도 '내가 어떻게 맞추면 되겠니'라고 먼저 물어와요. 늘 조언을 구하고 물어오는데다 후배들을 너무 편하게 해줘요."

또 임선주는 박은선의 경기력에 대해서도 찬사를 빼놓지 않는다. "WK리그에서 상대팀 선수로 만나면 은선 언니가 너무 힘들어요. 한번 경기를 치르고 나면 제대로 걷기 힘들 정도로 힘이 빠져요. 지금은 같은 대표팀이라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패스를 해주면 언제나 골을 넣어줄 것 같아요."

▲ [파주=스포츠Q 노민규 기자] 박은선이 8일 파주스타디움에서 열린 베트남과 평가전에서 전반 1분만에 '번개' 선제결승골을 터뜨리고 있다.

◆ 컨디션 완전하지 않았지만 의미 있는 베트남전서 벼락 골

박은선의 이런 노력 덕분인지 대표팀 적응이 한결 쉬워진 모습이다. 그동안 부상 때문에 제대로 훈련을 소화하지 못했음에도 8일 파주 스타디움에서 열린 베트남과 평가전에서 경기 시작 1분만에 벼락과 같은 선제골을 넣었다.

"베트남과 경기는 매우 의미있는 경기였어요. 그리고 많이 배웠습니다. 후배들에게 너무나 고마워요. 오래간만에 대표팀 경기를 뛰었는데 적응이 잘되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아직까지 몸 상태가 완전하지 않아서 생각만큼 골을 많이 넣지 못한 것 같아요. 후배들이 좋은 패스를 많이 찔러줬는데 모두 골로 연결시키지 못해 너무 미안합니다. 다음에는 조금 더 기대되는 경기를 펼쳐보이고 싶어요. 그동안 실전을 치러보지 못했는데 확실히 장단점을 화긴할 수 있었습니다."

또 박은선은 이날 경기가 자신의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제가 9년 전에 중국과 동아시아선수권에서 골을 넣은 뒤 정말 오랜만에 대표팀 경기에서 골을 넣은 것 같아요. 당시 중국전은 정말 기억에 남는 경기였죠. 제 골로 인해서 처음으로 한국 여자축구가 중국을 꺾은 경기였으니까요. 하지만 오늘 경기도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에서 무척 기억에 남는 경기가 될 것 같아요. 역시 후배들과 함께 뛰다보니까 답이 나오는 것 같아요. 공격루트도 다양하고 굳이 저를 향해서 크로스를 올리지 않아도 골이 나올 수 있는 여러 전술이 있으니 아시안컵에 나가서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날 경기에서 박은선의 공격 파트너가 될 지소연(23·첼시 레이디스)은 뛰지 못했다. 아직 지소연은 영국에 있다. 지소연은 아시안컵이 열리는 베트남에서 합류해 조별리그만을 소화할 계획이다.

"소연이와 경기를 함께 뛰는 것도 많이 기대됩니다. 뛰다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경기가 될 것 같아요. 아직 호흡을 맞춰보진 못했지만 금방 잘 통할 것 같아요."

▲ [파주=스포츠Q 노민규 기자] 박은선이 8일 파주스타디움에서 열린 베트남과 연습 경기에서 골을 넣은 뒤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박은선의 오른쪽 팔뚝에는 새출발 의지를 담아 '12.5.2013. The beginning of new days'라는 문신이 새겨져있다.

◆ 이제 새로운 시작, 과거는 완전히 잊었다

박은선의 한쪽 팔뚝에는 '12.5.2013 The beginning of new days(2013년 12월5일 새로운 날의 시작)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특별한 뜻은 없어요. 그냥 새겨넣은 거예요. 마음가짐을 새롭게 했다는 것 정도로만 생각해주세요."

박은선은 문신의 뜻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피했지만 새로운 날의 시작이라는 문신은 분명 자신의 마음가짐과 정신력을 가다듬는 의미라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지난해 11월 WK리그 감독들이 제기한 성별 논란 사태로 충격을 받아 한달여 방황하다 소속팀에 복귀한 시기가 이 무렵이었기에 강한 새출발 의지가 읽혀졌다.

"앞으로도 할 것도 많고 배울 것도 많아요. 모자란 부분은 계속 배워야 해요. 소속팀이나 대표팀이나 모두 경기력을 끌어올리면서 배우면서 경기를 하고 있어요. 이번 아시안컵에서 우승까지 목표가 잡혀있는데 팀 목표가 바로 제 목표예요. 더 욕심을 부려보자면 득점상을 타고 싶어요."

그는 참 먼 길을 돌아왔다.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쩌면 한국 여자축구의 온갖 기록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겨울왕국 OST '렛잇고'에는 "I'm never going back, the past is in the past(다시 돌아가지 않을래, 과거는 과거야)"라는 가사가 있다. 박은선 역시 풍운아처럼 지내왔던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얼음 마법을 숨겨두기만 했던 어두웠던 과거를 떨쳐버리고 자아를 되찾은 겨울왕국의 엘사처럼 박은선 역시 당당한 한국 여자축구의 스트라이커로 당당한 면모를 되찾아가고 있다.

▲ [파주=스포츠Q 노민규 기자] 박은선이 8일 파주스타디움에서 열린 베트남과 평가전 직전 훈련에서 슛을 하고 있다.

tankpark@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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