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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지 2015] (47) 인천의 등대 이천수, 나를 지탱해준 힘은 '질투와 열정'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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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지 2015] (47) 인천의 등대 이천수, 나를 지탱해준 힘은 '질투와 열정' (上)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5.09.21 15: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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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월드컵 환희-유럽진출 실패와 임의탈퇴 파동 공백…온갖 풍파 이겨내고 현역 후반기 올인

[200자 Tip!] 2015 K리그 클래식의 상위 스플릿 진입 경쟁이 막바지를 향해 치달으면서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2경기만 지나면 상·하위 스플릿이 나눠진다. 12개 팀 순위표에서 6위까지 팀을 보면 성남FC와 인천 두 시민구단이 포진해 있다. 이 가운데 인천은 시즌 직전 감독 선임 파동부터 설기현의 갑작스러운 은퇴 등 적지 않은 혼란을 겪었음에도 선전하고 있다. 앞으로 남은 2경기에서 승점 4만 더해도 자력으로 상위 스플릿에 진출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맏형' 이천수(34)가 있다.

[인천=스포츠Q 글 박상현·사진 이상민 기자] 이천수에 대한 축구팬들의 호불호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의 주역이어서 '평생 까임 방지권'이 있다고 말하는 팬도 있지만 특유의 언변과 그가 걸어왔던 현역 생활 때문에 다소 거부감을 갖고 있는 팬도 적지 않다. 또 너무나 많은 구단을 돌아다녀 '저니맨'이라는 이미지도 있다.

 
▲ 한국 축구사에서 이천수만큼 영예와 아픔을 한꺼번에 겪은 영욕의 선수가 또 있을까. 2002년 프로 데뷔 후 한일 월드컵 4강과 K리그 MVP 등극 등 영광도 있었지만 독일 월드컵의 아픔과 유럽진출 실패, 임의탈퇴 파동 등 시련도 겪었다. 그런 아픔이 있었기에 인천의 든든한 맏형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천수가 몸담았던 구단만 해도 울산 현대, 레알 소시에다드, 누만시아,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수원 삼성, 전남, 알 나스르, 오미야 아르디자와 지금의 인천까지 무려 9개 팀이나 된다. 리그만도 K리그와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사우디아라비아리그, J리그 등 다섯 무대다.

어느새 현역의 후반기를 보내고 있는 이천수는 자신의 고향팀인 인천으로 돌아와 어느덧 세 시즌째다. 전남에서 알 나스르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임의탈퇴 신분이 되면서 원치 않은 2년의 선수 공백이 있기도 했지만 지금은 인천의 중심이 돼 전력 상승에 보탬이 되고 있다.

이천수가 인천을 이끄는 맏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파란만장하고 굴곡많은 선수생활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일 월드컵의 영광과 한국 선수 첫 프리메라리가 진출, K리그 최우수선수(MVP)라는 온갖 영예도 있었지만 두 차례 유럽 진출 실패와 임의탈퇴, 선수 공백 등 시련도 있었다.

◆ 실패했던 두 차례의 유럽 진출을 말한다

이천수는 울산에서 뛰던 2003년 여름 스페인 레알 소시에다드로 전격 이적, 프리메라리가에 진출한 첫 한국 선수가 됐다. 박지성 이영표가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번에서 뛰고 있었을 때였다. 박지성, 이영표보다 빅리그에 먼저 진출해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2003년 8월 30일 에스파뇰과 벌인 제 데뷔전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경기장이 황영조 선수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땄던 몬주익 스타디움이었거든요."

이천수는 사비 알론소의 패스를 받아 골키퍼의 키를 넘기는 감각적인 슛으로 후반 11분 동점골을 만들어냈다. 데뷔전 데뷔골이란 생각에 속옷 세리머니를 펼치다가 경고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천수를 당황케 만든 것은 자신의 득점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다르코 코바세비치의 발에 맞고 들어갔다.

"정말 황당했죠. 코바세비치의 발을 맞고 들어간 줄도 모르고 세리머니를 했으니 말이죠."

▲ 이천수는 아직까지도 에스파뇰과 가진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데뷔전을 잊지 못한다. 데뷔골을 넣은 줄 알고 좋아했다가 동료 선수의 발을 맞고 들어가는 바람에 기록을 놓쳤다. 결국 이천수는 스페인에서 단 한 골도 기록하지 못하고 2년 만에 울산 현대로 복귀했다.

그래도 어시스트를 했으니 성공적인 데뷔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골이 되지 않은 작은 차이는 이천수의 프리메라리가 생활이 꼬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데뷔골이 됐더라면 스페인에서 제가 더 견딜 수 있는 활력소가 됐을 것 같아요. 골이 나오지 않으면서 하루라도 빨리 득점하기 위해 더욱 조바심을 냈고 오히려 경기를 그르쳤어요. 경기가 안되니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해 축구에 전념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 이천수는 스페인 누만시아로 임대된 뒤에도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지 못하고 2005년 울산으로 돌아왔다. 프리메라리가에서 단 한 골도 넣지 못하면서 그의 첫 유럽 진출은 두 시즌 만에 실패로 끝났다.

울산에서 세 시즌을 뛰며 소속팀을 K리그 정상으로 이끌고 MVP에도 오르는 등 승승장구한 이천수는 2007년 여름 네덜란드 페예노르트로 이적했다. 그러나 그의 네덜란드 생활도 단 한 시즌 만에 끝났다. 페예노르트의 내부 사정으로 이천수를 수원으로 임대 이적시켰기 때문이다.

"사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로 가고 싶었어요. 네덜란드는 계획에 없었어요. 그래서 입단 기자회견에서도 '네덜란드에서 잘해서 잉글랜드로 진출하겠다'고 말했던 것이고요. 지금 생각하니 해외 첫 생활을 스페인이 아니라 네덜란드에서 했더라면 적응이 수월했을 것 같아요. 네덜란드에서 적응력을 키웠다면 조금 더 좋은 리그로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가정이지만요."

▲ 이천수는 스페인과 네덜란드 등 두 차례에 걸쳐 유럽에 진출했다. 모두 울산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모두 골을 넣지 못하고 끝났다. 특히 네덜란드 진출 실패 이후 이천수의 선수생활은 힘겨움의 연속이었다.
 

◆ 마지막이 된 독일 월드컵, 처음으로 뼈아픈 패배를 맛보다

이천수는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패배를 모르는 선수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독일, 터키에 지긴 했지만 4강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기 때문에 패배라고 할 수는 없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에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본선 진출을 이끈 주역이었다. 특히 이란 테헤란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란과 올림픽 예선전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영웅이 되기도 했다. 또 이천수가 있었기에 올림픽 8강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6년 독일 월드컵은 아직도 그의 뇌리에 뼈저린 패배로 남아 있다. 딕 아드보카트 감독 부임 이후 원정 월드컵에서도 16강 진출 이상의 성적을 내겠다는 목표에 모든 것을 축구에만 쏟았다.

"토고전에서 2-1로 이기고 프랑스에도 비기면서 선수들의 자신감은 최고조였어요. 스위스전에서 질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죠. 그런데 하노버 경기장에 들어서는 순간 덜컥했어요. 스위스 관중들만 보이는 거예요. 한국 팬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그러다가 세트피스 상황에서 선제골을 내준 이후 우왕좌왕하게 되고 후반 허무하게 추가골을 허용하면서 탈락하고 말았어요."

이천수는 스위스전 0-2 패배로 16강 진출 실패가 확정된 뒤 그라운드에서 눈물을 쏟았다. 그라운드 뿐 아니라 프랑크푸르트에서 인천국제공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도 계속 눈물을 흘렸다. 잠도 이룰 수 없었다.

▲ 이천수는 2000년대 중반까지 패배라는 것을 몰랐다. 한일 월드컵 4강과 아테네 올림픽 8강 등 한국 축구의 영광을 함께 했다. 그러나 독일 월드컵 스위스전 패배는 이천수에게 뼈아픈 패배로 가슴에 남아 있다. 그리고 이후 이천수에게 월드컵 출전의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드보카트 감독이 저를 대표팀에 발탁하면서도 경기에 뛰지 않게 하는 거예요. 핌 베어벡 코치가 '네 기량이나 경기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니까 염려말라'고 안심시켰지만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정말 죽어라고 뛰었어요. 그렇게 준비했기 때문에 스위스전 패배는 제 선수 인생에서 첫 패배이자 가장 뼈아픈 패배로 남아 있죠. 정말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펑펑 울었어요. 그 때만큼 울었던 적이 지금까지도 없는 것 같아요."

그토록 아팠던 독일 월드컵이 있었기 때문에 4년 뒤 남아공 월드컵은 너무나 기다려졌다. 하지만 이천수에게 더이상 월드컵은 없었다. K리그 임의탈퇴 선수가 대표팀에 발탁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많았다.

"제가 남아공 월드컵 대표팀에 포함되느냐, 마느냐에 대한 얘기가 많았어요. 저처럼 프리킥 능력이 있고 뭔가를 해결해줄 수 있는 선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죠. 하지만 아무래도 임의탈퇴 신분을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 걸림돌이었죠."

결국 이천수는 남아공 월드컵을 현장이 아닌 일본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후배, 동료들이 남아공 월드컵을 통해 첫 원정 월드컵 16강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기뻐했지만 '저 장소에 내가 있었으면 좋았을텐데'하는 마음에 가슴 한구석이 찡하게 저렸다.

[챌린지 2015] (47) 이천수 '현역 후반기', 시민구단 인천의 레전드를 꿈꾼다 (下)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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