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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사 막으려고 도입한 130구 제한 규정, 현장서는 '유명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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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사 막으려고 도입한 130구 제한 규정, 현장서는 '유명무실'
  • 이재훈 기자
  • 승인 2014.05.23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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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보호 목적 규정이 질적 저하 아이러니 초래

[스포츠Q 이재훈 기자] 투수들의 혹사를 위해 새로운 규정을 꺼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나 다름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2월 26일 “2011년 3월부터 시행돼온 고교야구리그에서 일부 우수선수가 혹사되는 등의 문제점이 드러남에 따라 대한야구협회(KBA)와 협의를 거쳐 개선방안을 마련했고 올해부터 시행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문체부와 KBA가 협의해 마련한 고교야구리그 제도 개선방안에는 경기당 투구수를 130개로 제한하고 한계투구 후에 3일 휴식 의무화, 주말연속경기 최소화, 권역 재조정을 통한 이동거리 최소화, 학생선수 학습권 보장지침 마련, 최저학력제 미도달 선수 경기 출전 제한, 교육청의 일선학교 지도 감독 강화 등이 들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선수들의 혹사를 막는 투구수 제한이다. 하지만 130게가 넘으면 사흘 휴식을 보장하는 이 규정이 아이러니하게도 ‘한 경기 130구 이내라면 다음날 또 던질 수 있다’는 방향으로 해석되고 있다.

▲ 용마고 김민우는 팀의 에이스로 대회기간 내내 책임을 다했다. 그러나 정작 21일 열린 황금사자기 서울고와의 결승전에선 3일째 연투에 지친 모습으로 팀의 패배를 지켜봐야 했다.[사진=스포츠Q DB]

◆ 선수 위해 신설된 130구 제한, 오히려 혹사 가중

문체부와 KBA가 만든 130구 규정은 지난해 이수민(20·삼성)이 대구 상원고 3학년이었던 지난해 5월 19일 주말리그 왕중왕전 16강 천안북일고와의 경기에서 연장 10회 2사까지 투구수 179개를 기록하며 ‘혹사 논란’에 휩싸이면서 만들어졌다.

이에 대해 미국 스포츠 매체 CBS 스포츠는 “이수민이 평균 139구를 던지고 있다”고 지적하며 “고교생이 한 경기 179구를 던지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전했다. 당시 이수민은 7경기에 등판해 모두 974개의 공을 던졌던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문체부와 KBA는 우선 한 경기 투구수를 130개로 묶고 등판 후 3일 휴식을 보장하기에 이르렀다. 또 우수 투수만 집중 투입하게 된 배경이 된 주말리그를 최소화시키기로 합의했다.

규정을 만들면서도 진통이 적지 않았다. 일선 현장에서는 거꾸로 완투 능력이 필요한 선수도 필요하다며 규정 도입을 반대했다.

문체부 체육정책과 장동엽 주무관은 23일 “규정을 만들면서 현장의 반대 목소리가 많았다. 미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는 아예 이런 규정 자체가 없다”며 “그러나 미국, 일본은 규정이 필요없을 정도로 선수들 보호가 잘 되고 있었기에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제 규정 시행이 석달 정도 지났지만 이미 편법 사례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잠실구장에서 21일 열린 서울고와 마산 용마고의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주말리그 왕중왕전 결승전이 단적인 사례다. 당시 두 팀은 에이스 최원태(19·서울고)와 김민우(19·용마고)를 내보냈다. 이날 서울고는 최원태-박윤철이 용마고 타선을 3실점으로 막는 활약으로 11-3 승리를 거뒀다.

이날 경기에서 관심을 끈 것은 김민우였다. 김민우는 전날 유신고와의 4강전에서도 마운드에 올라 59개의 공을 던졌다. 이틀 전인 19일 동산고와 8강전에서도 선발로 나서 109개의 투구수를 기록했다. 이틀동안 무려 168개의 공을 던진 것이다.

▲ 프로구단 스카우트들이 21일 잠실에서 열린 제 68회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주말리그 왕중왕전 결승전에서 진출 팀인 서울고와 용마고의 선수들을 지켜보고 있다.[사진=스포츠Q DB]

연이틀 혹사는 결국 결승전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는 원인이 됐다. 김민우는 서울고와 경기에서 3이닝 4피안타 3볼넷 2탈삼진 5실점(5자책) 투구로 팀의 패배를 지켜봐야 했다.

김민우도 “전 경기 때문에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 선발로 올라가서 확실히 막아줘야 했는데 제 역할을 못해줬다”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성훈 용마고 감독 또한 결승이 끝나고 가진 인터뷰에서 “민우가 대회동안 잘 던져줬는데 미안하다”고 말했다.

특히 김민우는 지난해 초 팔꿈치 부상 때문에 1년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선수다. 원래 시속 140km 초반의 공을 던졌으나 재활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이전보다 더 빨라진 구속을 통해 에이스로 부상했다.

분명 조금 더 아껴줘야 할 선수였지만 결국 김민우는 130구 제한 규정을 거꾸로 해석돼 적용되는 바람에 오히려 혹사될 수밖에 없었다. 황금사자기에서 14일 첫 등판해 130구를 던진 그는 18일에는 43구, 19일은 109구, 20일은 59구, 21일은 61구였다. 현 규정이 18일 이후로는 매일 등판하게 만든 셈이다.

◆ ‘130구 제한’ 선수질 저하로 이어져, 개선 필요

주말리그 에이스 혹사도 변하지 않았다. 고교 4강제도로 인해 주말리그 왕중왕전인 황금사자기, 대통령배, 청룡기 등에 나서려면 각 권역별 주말리그에서 3위 이내에 들어야만 한다.

이 때문에 강한 마운드를 운용하고 있는 팀들의 성적이 좋다. 서울고만 해도 최원태 외에 박윤철(19), 남경호(19)와 같은 좋은 투수들이 버티고 있어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문제는 한 명의 에이스를 가진 강호다. 주말리그의 경우 ‘130구’ 룰은 충분히 지킬 수 있다. 하루 던지고 쉬도록 하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로 인해 대회에서는 에이스의 혹사와 함께 투수들에게 기회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금사자기 결승을 참관한 조찬관 kt스카우트팀장은 “이수민의 혹사 논란에 이를 줄이고자 130구 제한규정을 만들었다”며 “문제는 선수가 가진 체격조건이나 경기상황에 맞춘 운용을 해야 하지만 여전히 팀의 에이스를 쓸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또 “선수들도 본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다”며 “이 때문에 준결승, 결승에도 무리해서 나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고교야구에서 대회 승리 만큼 달콤한 것은 없다. 대회 결과가 장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선수들의 혹사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사진은 21일 잠실에서 열린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환호하는 서울고 선수들.[사진= 스포츠Q DB]

130구 제한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인재풀도 덩달아 좁아지고 있다.

한 스카우트는 “사실 현재 고교 선수들의 기량이 지난해보다 못하다. 인재는 많지만 육성할만한 선수가 딱히 보이지 않는다”며 “지난해 임지섭, 이수민, 박세웅과 같이 확실하게 어필할 만한 선수가 없다. 이 때문에 기량보다는 현 선수 자원에 맞춰 영입을 고려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이어 “주말리그의 영향도 영향이지만 아무래도 많은 풀에 비해 완전히 완성된 선수도 떨어진다. 에이스의 혹사는 계속되고 있어 현 제도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분명 ‘아마야구의 투수 혹사를 막는다’는 목적으로 도입된 '130구 제한'이 ‘130구는 안되고 129는 괜찮다’는 식으로 변질되는 사례가 많아 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KBA는 해당 규정에 관해 당분간 변경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체부 역시 이제 시행 첫 해이니 더 지켜보자는 입장이다.

흔히 투수의 어깨와 팔꿈치는 분필과 같다고 한다. 분필은 쓰면 쓸수록 닳아 없어진다. 어깨와 팔꿈치도 분명 ‘소모품’의 개념으로 봐야 한다. 혹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개선이 시급하다.

steelheart@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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