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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소통을 위하여 '도희야' 정주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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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소통을 위하여 '도희야' 정주리 감독
  • 용원중 기자
  • 승인 2014.05.31 1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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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용원중기자·사진 최대성기자] 서울 안, 시간이 느리게 가는 동네인 삼청동으로 가는 길에 만난 초여름 햇살은 뜨거웠다. 약속 시간을 맞추기 위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유럽풍 카페로 들어섰다. 백짓장 같은 얼굴을 살짝 가린 단발머리의 안경 쓴 ‘소녀’가 또랑또랑한 눈빛을 보냈다. 삼청동을 닮은 듯 느릿느릿 어눌한 말투, 하지만 한 단어, 한 단어 꼭꼭 씹어 말하는 투가 인상적이었다.

 

정주리(35) 감독은 단편영화제를 휩쓸고, 장편영화 데뷔작 ‘도희야’로 제67회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분에 초청받는 파란을 일으켰다. 지난 22일 개봉된 ‘도희야’는 사생활 문제로 좌천돼 외딴 시골마을 파출소장으로 부임해온 영남(배두나)과 가정폭력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14세 소녀 도희(김새론), 도희의 의붓아버지 용하(송새벽)의 이야기를 섬세하고도 명징하게 그려내 깊은 울림을 안겨주고 있다.

 - '도희야’ 구상은 언제 하게 됐나.

"21세 무렵 어디선가 들은 얘기다. 애완 고양이가 신발 앞에 죽은 쥐를 물어다 놔 기겁을 했더니 다음날엔 껍질을 벗긴 채 갖다놨단 이야기였다. 그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더라.(웃음) 한참 잊어버리고 지내다 장편 시나리오로 써보자 생각해 차츰차츰 작업을 진행했다.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업은 재작년 11월부터였다. 캐스팅을 염두에 두고 최종 매만졌다. 흐릿한 부분을 좀더 분명하게 가다듬었다."

 

- 시사 전까지 구체적 내용이 전혀 노출되지 않았던 터라 여주인공 영남(배두나)이 동성애자로 설정돼 솔직히 놀랐다.

"원래는 동성애 설정이 더 선명했는데 수위 조절을 했다. 관객이 어떻게 하면 이해를 분명히 할까를 고려해서 수정한 거다."

- 왜 동성애였나?

"'도희야’란 제목과 동시에 생각난 거였다. 동성애 캐릭터는 지독한 외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다. 성 정체성은 자신이 선택한 게 아니지만 외로움은 본인이 선택한 부분이 있다. 자신의 운명이 분명한데 그 안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 굉장히 관심이 많았던 주제였다."

- 사회안정망 안에서 취약계층인 두 여성의 이야기이고, 학대받는 두 사람이 든든한 연대를 이룬다. 페미니즘 관점으로도 읽힐 수 있겠다 싶었다.

"딱히 페미니즘 관점에서 파고들진 않았다. 친한 친구가 경찰대를 졸업한 뒤 파출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과거 단편영화 ‘11’도 그 친구를 소재로 했다. ‘도희야’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친구는 어려서부터 관료사회에 몸담았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 언제 그만 둘까 했었는데 아직까지도 잘 지낸다. 그 친구가 겪어야 했던 차별이라든가 주변 상황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게 됐다."

- 영남은 부임 직후 상처입은 도희를 가슴에 품는다. 도희 역시 영남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평가가 나오게 된다.

"그렇게까진 아닌데...의미가 확대, 심화된 부분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 관심을 사고 싶었던 고양이, 소통하지 못한 주인과 고양이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고양이가 한 짓이 이상하지만 이해 가능한 행동이지 않나? 주인도 다음에 고양이가 어떤 행동을 할 줄 몰랐을 거다. 그래서 영남도 더 외로운 사람이 돼야 했다. 늘 고민했다. 두 여자가 만나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가능할까, 그러다가 점점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이동했다. 마지막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두 여자가 마주본 채 있어야겠다고 확신했다."

 

- 영화에는 배경에 대한 구체적 표현이 없다. 파도가 일렁이는 바닷가 마을, 절벽을 타고 뻗은 도로, 햇살 짱짱한 평화로운 마을일뿐이다. 그런데 그토록 평화로운 일상에서 잔인한 폭력이 이뤄진다.

"시나리오 때는 더 고립된 상황을 고려해서 목포 근처 신안으로 설정했으나 특정 지명을 고려하진 않았다. 배경이 된 여수는 내 고향이라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곳이다. 주인공의 절박한 상황을 강조할 수 있어서 좋았다."

- 영남 캐릭터는 소화하기가 쉽지 않다. 대사가 많은 것도 아니고 표정과 분위기로 실체를 드러내야할 부분이 많다. 배두나 캐스팅 과정이 궁금하다.

"시나리오 작업 단계에서는 이런 배우들과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럼에도 이 세 배우가 떠올랐다. 수정 시나리오를 배두나씨에게 가장 먼저 보냈다. 3시간 만에 빛의 속도로 “하겠다”는 대답을 보내주더라. 영화 ‘코리아’를 보며 “너무 연기 잘 하는구나”라고 여겼다. 정말 북한 사람이더라. 영남을 맡으면 딱이겠다 싶었다. 말하지 않고 있는 데도 뭔가를 얘기하고 있는 느낌? 촬영지인 순천에 직접 차를 몰고 내려와서 모텔방에 여장을 푼 뒤 나를 만났다. 그때 내가 말했다. “영남은 외롭지만 배우 배두나가 외롭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촬영하면서 영남과 비슷한 부분이 더욱 짙어졌다."

- 아역인 김새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폭력에 시달리는 상처받은 소녀를 연기했으니.

"금방 수락할 줄 알았는데 거절당했다. 인연이 있던 제작사까지 설득에 나섰으나 완고했다. 이 시나리오가 어린 소녀에겐 너무 버거웠을 것이다. 포기 상황이었는데 기적적으로 합류하게 됐다. 새론이는 “내가 왠지 해야만 할 거 같더라”고 말했다. 새론이가 힘들어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으나 내가 많이 부족했다. 연기하려면 인물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해 자체가 힘든 과정이지 않나. 많이 힘들어했다."

- 배두나, 김새론, 송새벽 캐스팅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황금비율로 보인다.

"세 배우 모두 굉장한 내면 연기자들이다. 인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그렇게 연기해내지 못했을 거다. 두나씨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영남이 돼 있었다. 난 그저 확인만 했다. 새벽씨는 생각 이상의 용하 연기를 하더라. 무서울 정도로 '미워 죽겠다' 싶은 용하를 만들어냈다. 더 재밌는 게 나오나 기대하고 구경했다. 새론은 너무 똑똑하다. 한 마디만 해도 척 알아듣더라. 그리고 그걸 연기로 표현한다. 귀신같다."

 

- 영화 속 영남과 도희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걷는 신, 상처를 어루만지며 나신으로 욕조에 앉아 있는 장면에서 여러 느낌이 들었다. 모성애, 자매애, 동지애….

"두나씨가 새론이와 정말 공연하고 싶어했다. 새론이와 호흡을 맞추면 영남 캐릭터가 더 확고해지리라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현장에서 정말 각자 자기 캐릭터에 몰두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더라. 스태프처럼 활약했다. 그래서 새론이 더 마음을 열면서 두 여배우 사이에 케미스트리가 발생했다. 결국 영남도 더 돋보이게 됐고."

-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이 인상적이다. 화창한 날, 홀로 이 마을에 들어왔던 영남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도희와 함께 마을을 떠난다.

"가장 공들인 장면이다. 관객이 각자 해석하기 바랐다. 모성애든 '쇼생크 탈출'이든. 절대로 해피엔딩은 아닐 거 같다. 각자의 세계를 가진 타인 사이에 교감이 얼마나 어렵고 기적적인 일인가. 설령 이뤄졌다 하더라도 유지하는 건 더욱 만만치 않은 일일 거다. 영남과 도희는 이후 과연 행복할까. 엔딩신은 그런 복잡미묘한 감정이 묻어나는 장면이었다."

- 앞으로 어떤 작품으로 관객과 소통할 계획인가.

"불편한 현실에서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얘기했는데 이번엔 ‘과연 할 수 있을까?’란 물음을 던진 정도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비슷한 문제의식, 주제의식을 가지고 작업하지 않을까 싶다. 관객에게 부끄럽지 않고, 억지스럽지 않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

 

[취재후기] 칸 영화제 참석차 출국 직전 인터뷰를 했고, 그가 칸에서 돌아온 뒤 기사 작성을 하게 됐다. 고작 1주일에 불과했지만 세계 영화축제에서 엄청난 경험을 하고 돌아왔을 정 감독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고집 세나 맑고 투명한 소녀 감독에게 전화 한 통 걸어봐야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goolis@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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