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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본색] (6) '울보 권투부' 이일하 감독 "남한? 북한? 아이들에게 국적은 중요하지 않아요"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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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본색] (6) '울보 권투부' 이일하 감독 "남한? 북한? 아이들에게 국적은 중요하지 않아요" (下)
  • 원호성 기자
  • 승인 2015.10.24 07: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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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글 원호성 기자·사진 최대성 기자] 재일동포를 다룬 영화들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내용이 있다. 서로 힘을 모아도 부족할 재일동포 사회가 그 안에서 다시 남한 계열의 재일동포 단체인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민단)과 북한 계열의 재일동포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로 갈라져 있는 모습이 그것이다.

실제로 재일동포들은 일본 내에서도 민단과 조총련이라는 다른 국가와 다른 정체성을 지닌 두 집단의 충돌이 끊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동안 재일동포를 소재로 한 영화나 다큐멘터리들에는 이에 관련된 내용이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해왔고,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처럼 재일동포들이 직접 북한으로 건너가는 이야기가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일하 감독의 ‘울보 권투부’에는 이런 어른들의 정치싸움은 등장하지 않는다. 학교생활, 그리고 권투를 통해 맑고 푸른 10대의 청춘을 즐기는 이 아이들에게는 남한도, 북한도, 심지어 자신들이 재일동포라는 사실까지도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 '울보 권투부' 이일하 감독

◆ 촬영, 아이들의 목소리 듣기 “아이들에게 국적은 중요하지 않아요”

영화 ‘울보 권투부’에서 도쿄조선학교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한 여학생의 내레이션으로 다음과 같은 대사가 흘러나온다. “우리 학교 동무들의 반은 조선적, 반은 한국국적이에요. 하지만 우리들은 아무도 국적에 신경을 안 씁니다.”

‘울보 권투부’에서 이야기하는 조선적이란 북한국적을 의미하는 단어는 아니다. 일본은 북한과 정식 수교를 맺은 국가가 아니기에 북한국적을 사용할 수 없고, 그렇기에 한반도가 분단되기 이전의 조선을 의미하는 ‘조선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동안 재일동포를 다룬 많은 영화들에서는 남한 계열인 한국국적을 가진 아이들과 북한 계열인 조선적을 가진 아이들이 서로 충돌하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일하 감독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다가 선 재일동포 아이들의 모습에서는 그런 국적의 차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레이션에 나오는 말처럼 실제로 남한국적이 반이고, 북한국적이 반입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북한국적이 아니라 조선적이죠. 막상 옆에서 지켜보면 아이들은 서로 ‘너는 국적이 어디냐?’라고 물어보지도 않아요. 생각해 보면 이 아이들은 남한이나 북한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아니고 그냥 일본에서 태어나 재일동포로 살아가는 아이들이에요. 그래서 이 아이들에게 국적이 남한이냐 북한이냐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이일하 감독의 말처럼 ‘울보 권투부’에서 아이들 사이에서 국적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영화 시작 부분에서 내레이션으로 국적이 반반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이 전부다. 굳이 한 장면을 더 꼽자면 조선적인 아이들이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평양으로 가는 장면 정도를 더 꼽을 수 있다.

“저 역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며 아이들에게 ‘너는 국적이 어디냐’는 질문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만약에 한 아이가 조선적이라고 해서 ‘내 조국은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이들끼리 국적은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살아요. 한국에서는 재일동포 사회에서 국적을 가지고 서로 차별한다거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이 아이들에게는 그냥 우리는 모두 같은 조선학교의 학생들이라는 동질감이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이에요.”

사실 재일동포의 국적에 대한 문제가 ‘울보 권투부’에서 충분히 다뤄질 수도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아이들은 국적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하지 않지만, 재일동포 사회를 취재하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취재하게 되는 아이들의 부모님이나 조부모님들, 그리고 재일동포 사회의 구성원인 어르신들을 취재하면서는 자연스럽게 재일동포들의 생활상과 함께 국적에 대한 이야기도 흘러 나왔다.

▲ '울보 권투부' 이일하 감독

하지만 이일하 감독은 편집 과정에서 그런 정치적인 해석이 섞인 발언들은 최대한 골라내고 제외시켰다. 이것은 이일하 감독이 1년 6개월에 걸쳐 아이들을 지켜보고 관찰하며 얻은 결론이기도 했다. 재일동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재일동포의 한(恨)을 권투를 통해 그려보겠다고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아이들의 그늘 없는 풋풋하고 싱그러운 모습들이 결국 ‘울보 권투부’의 방향까지 바꾼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무겁다고 하잖아요? 전 ‘울보 권투부’를 팝콘을 손에 들고 콜라 한 잔을 마시며 볼 수 있는 그런 영화로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이렇게 사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었죠. 재일동포에 대한 문제들 뿐 아니라, 이 친구들은 이렇게 학교가 끝난 후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것들을 마음껏 즐기며 살아간다는 것도 보여주고요.”

심지어 아이들에게는 조선적이나 한국국적이냐 하는 국적의 문제를 떠나 이들이 ‘재일동포’라는 일본 내에서 엄연히 차별받는 위치라는 사실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일하 감독은 ‘울보 권투부’의 첫 장면에 도쿄 신주쿠에서 재일동포를 반대하는 시위 장면을 넣어서 일본에서 현재 재일동포들의 처지를 살짝 보여주긴 하지만, 이 역시 아이들의 이야기에서는 단지 시대상을 설명해 주는 역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영화가 재일동포 학생들이 권투를 하는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서두에 재일동포들이 처한 상황들을 살짝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일본은 현재 이런 사회지만, 그래도 이렇게 천진난만하게 권투를 하는 아이들을 보시라는 거죠.”

“물론 아이들에게도 재일동포의 그림자가 아주 없지는 않아요. 대놓고 내가 재일동포고 소수자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옆에서 관찰하는 제가 보기에는 아이들 마음 속 깊이 앙금처럼 남아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그래도 아이들이 서로 같이 노는 모습이나 대화를 하는 모습에서는 그런 모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그냥 한국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고 열심히 권투하며 청춘을 즐기는 평범한 10대 아이들이에요.”

▲ '울보 권투부' 이일하 감독

◆ 차기작 ‘카운터스’, “나쁜 놈이 더 나쁜 놈을 처단하는 액션 다큐멘터리?”

촬영에만 1년 6개월, 제작까지 2년이 넘는 세월이 걸린 ‘울보 권투부’를 홀로 힘들게 작업하며 겨우 털어낸 이일하 감독은 벌써 쉬지 않고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이일하 감독의 다음 프로젝트는 재일동포 사회와 연관이 있긴 하지만 재일동포 사회를 다루는 영화는 아니다.

이일하 감독이 현재 한창 촬영 중인 신작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카운터스’. 전작이 ‘울보 권투부’이니 ‘카운터스’는 권투의 카운터 펀치냐고 오해를 할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른 내용이다. ‘카운터스’는 ‘울보 권투부’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재일동포를 반대하는 혐한시위의 모습에서 이어지는 내용으로, 혐한시위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울보 권투부’ 첫 장면에도 나오지만 일본에서 재일동포를 반대하는 혐한시위가 많이 일어나요. 그리고 ‘카운터스’의 주인공은 그 혐한시위를 반대하는 일본인들의 이야기에요. ‘카운터스’라는 제목은 혐한시위를 반대하는 일본인들의 SNS 모임 이름입니다. 그래서 혐한시위를 반대하는 일본인들이 혐한시위를 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이야기를 찍고 있습니다.”

‘카운터스’의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카운터스’는 DMZ 국제다큐영화제와 인천영상위원회 다큐멘터리 피칭 프로젝트의 제작지원을 받았으며, 벌써 1년 정도 촬영이 진행되어 이일하 감독이 계획한 분량의 60% 정도를 촬영했다. 이대로 순조롭게 진행이 된다면 한국 관객들은 빠르면 2016년 DMZ 국제다큐영화제에서 ‘카운터스’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카운터스’의 리더가 전직 야쿠자 출신이고, 이 사람은 혐한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무력으로 제압한다는 모토를 가지고 있어요. 전직 야쿠자 출신의 리더가 혐한시위를 반대하는 일본의 시민세력과 힘을 모아서 혐한시위를 없애려는 내용을 그린 다큐멘터리죠.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나쁜 놈이 더 나쁜 놈을 처단하는’ 액션 다큐멘터리라고 할까요?”

■ ‘울보 권투부’ 이일하 감독은? 

이일하 감독은 2000년 영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오사카 예술대학과 다마 미술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이일하 감독은 ‘천황의 군대는 진격한다’(ゆきゆきて神軍), ‘극사적 에로스’(極私的エロス・恋歌)와 같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연출한 일본 다큐멘터리의 거장 하라 카즈오(原一男) 감독의 제자로 다큐멘터리를 공부했으며, ‘울보 권투부’는 한국에 소개된 그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다.

[취재후기] 이일하 감독은 한국에서도 쉽지 않은 다큐멘터리 작업을 일본에서 계속 해왔다. 이일하 감독은 끊임없이 외주 영상작업을 하며 돈을 모으면, 다시 그 돈으로 다큐멘터리 제작에 들어가는 삶을 반복하고 있다. 일단 다큐멘터리 작업이 시작되면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밤에 눈을 감는 순간까지 오직 지금 찍고 있는 다큐멘터리만 생각한다는 이일하 감독의 지금 소원은 ‘카운터스’를 어서 마치고 여행을 하며 재충전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일하 감독이 재충전을 마치고 더욱 좋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들고 돌아올 그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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