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막후](6) '우연'을 '운명'으로 바꾼 연극배우 '김용선', 연기자의 행복한 삶? (인터뷰)

2016-01-27     이은혜 기자

[200자 Tip!] 이 세상에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자신에게 찾아 온 우연을 운명으로 바꾸는 힘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배우 김용선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연극을 통해 자신과 삶의 가치, 행복을 찾았다.

[스포츠Q(큐) 글 이은혜 기자·사진 최대성 기자] 76년 국립극단의 막내로 시작해 79년 결혼. 그리고 그 후 약 11년의 공백을 깨고 다시 무대로 돌아와 25년의 세월을 보낸 배우가 있다.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연극을 ‘운명’으로 바꾼 배우 김용선을 만났다.

◆ 우연처럼 찾아온 연극이라는 운명… “팔자죠, 팔자”

배우 김용선의 연기 인생은 총 30여 년 정도다. 1976년, 스무살의 나이로 국립극단의 단원이 됐고 79년 운명처럼 다가온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가정을 꾸리며 자연스럽게 연극 무대를 떠났지만 결혼과 육아가 무대를 향한 갈증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무대를 떠난지 약 11년여 만인 지난 1991년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 왔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심리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는데 마침 우리 학교에 연극반이 새로 생겼어요. 그래서 그걸 돌파구라고 생각하고 ‘아, 연극이나 해 보자’ 해서 시작하게 됐죠. 정말 우연이죠. 배우가 되려고 애쓰고 ‘이게 꿈이야!’라고 하지 않았는데 이 바닥에 남았어요. 어찌 보면 ‘팔자’죠 ‘팔자’.”

심리적인 이유로 무대에 오르기 시작한 김용선은 스무살이 되던 해 대학 진학이나 취업 대신 국립극단 오디션을 택했다. 그는 고등학교 3년 내내 연극만 했으니 갈 길은 그것뿐이었다고 회상했다. 김용선은 ‘스무살짜리가 어떻게 국립극단에 들어가겠어’라는 마음으로 오디션 장을 찾아 갔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국립극단 단원을 뽑는 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운명을 마주했다.

“시험을 보러 갔는데 그 당시 국립극단 단장으로 계시던 분이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연극 대회 심사를 했던 분이었던 거죠. 그 양반이 당시 나한테 최우수 연기상을 줬어요. 그 학생이 시험을 보러 왔으니. 이게 정말 운명처럼 흘러 간 거죠, 감히 스무살짜리 여자애가 어떻게 국립 극단에 들어 갈 수 있었겠어요”

김용선의 국립극단 단원 생활은 길지 않았다. 1979년 결혼과 함께 무대를 떠난 것이다. 무대를 떠나 11년간 가정 생활과 육아에 충실했지만 결국 ‘나를 다시 찾아야 겠다’는 생각에 1991년 다시 연극 무대로 돌아 왔다.

◆ “버텨보자”라는 생각으로 버텨온 세월… 결실은 2014년 ‘올해의 배우상’ 수상으로

1991년 무대로 돌아온 김용선이 곧바로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대로 다시 돌아온 그녀는 주변의 편견과 싸워야 했고 들어오지 않는 작품 프로포즈를 기다려야 했다.

“국립극단에만 있었기 때문에 외부 사람들을 잘 모르던 상황에서 다시 무대로 돌아가려니 ‘어머, 저 여자 어디 있던 여자야?’라는 시선들이 있었죠. 그런데 의아하게도 그런 시선들이 나를 버티게 한 힘이었어요. 어느 날 정말 흔한 말이지만 ‘강한 자가 버티는 게 아니라 오래 버티는 자가 강한 자다’라는 문구를 보고 "그래, 그럼 버텨 보자"고 생각했죠.”

‘그래, 그럼 버텨 보자’라는 생각으로 시기와 눈총, 편견들에 맞서며 연극에 꾸준히 출연한 김용선은 2014년 드디어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안았다. 그는 배우상 수상에 대해 “‘버틴 보람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가장 크게 들었다”고 설명했다.

김용선은 본인이 연극 ‘나비’에 출연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작품을 하지도 못했고 주목 받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연극 ‘나비’에서 하나코를 연기하며 많은 것을 얻은 듯했다.

“2005년도만 해도 지금처럼 ‘위안부’ 문제에 이렇게 많은 관심이 있지는 않았죠. 대본을 받고,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일본 대사관 앞에 가서 ‘수요시위’에 참여도 해 봤어요. 그러면서 마음이 정말 너무 아팠고 결국 ‘이건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거죠.”

연극 ‘나비’로 100회 이상 무대에 올라 ‘일본군 위안부’ 후미코를 연기한 김용선은 오열하며 뒤로 넘어가는 장면에서 꼬리뼈를 계속 다치는 등 열정을 아끼지 않으며 무대를 지켰다.

◆ 무대 위 매너리즘… 극복 위해 필요한 ‘대본 숙지’ “디테일 구사할 때가 가장 재미있죠”

무대 위에서 30여년을 보낸 베테랑 배우인 김용선 역시 여느 배우와 다르지 않게 매너리즘에 빠질 때가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극을 연습하는 과정에서 ‘아, 정말 하기 싫다’라는 권태로움이 느껴지는 순간을 ‘외운 대본이 기억나지 않을 때’라고 설명했고 대본을 완벽하게 숙지 한 뒤 ‘디테일을 구사하는 순간’을 가장 재미있는 순간이라고 설명했다.

“대사를 숙지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요. 대사에 모든 신경이 쏠려 다른 부분을 놓치게 되거든요. 그게 나이를 먹을수록 더 심한 것 같아요. 젊은 사람 세 번 볼 내용을 나는 열 번 봐야 하니까. 그러면서도 책임감이 있는 거죠.”

김용선은 디테일과 관련해 대본 속 ‘무난한 캐릭터’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그는 대본을 받아보고 분석하며 가장 어려운 캐릭터는 평범함이 특징인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김용선은 “뭐든 확실하게 나타나는 캐릭터들은 오히려 분석하고 연기하기 쉬워요. 그런데 평범한 캐릭터들은 관객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어떤 임팩트를 줄 것인지 고민해야 해요”라고 전했다.

오는 4월 명동 예술 극장에서 막을 올리는 연극 ‘혈맥’에서 평범한 캐릭터인 어머니를 연기하게 됐다는 그는 대본을 분석하며 디테일을 잡아가고 있다고 밝히며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 연극을 떠나 생각 할 수 없는 내 삶… “나는 뜨지 않은 배우라 행복해요”

오랜 시간 연극 무대를 지켜온 배우 김용선이 보는 후배들은 어떤 모습일까. 김용선은 최근 대학로 극단에 유학파 학생들이 많아졌다는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김용선이 연극 무대에 서기 위해 노력하는 후배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선배’이자 ‘엄마’였다.

“어학연수는 기본에 일본, 영국, 독일, 러시아 등지로 유학을 다녀온 아이들이 많아요. 솔직한 심정으로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면 속이 뒤집어 질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 바닥에 있는 나로서는 그 친구들이 소중해요. 그 친구들이 있어서 ‘연극’이라는 명맥이 유지되고, ‘김용선’이라는 배우 이름이 기억 되겠죠.”

김용선은 연극을 떠난 자신의 삶을 정의하기 어려워했다. 그는 “연극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라고 못을 박으며 시간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연극 무대에 계속 서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또한 자신의 뒤를 따라 걸어오는 후배들을 위해 연기와 인성이 중심이 되는 교육을 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밝히며 ‘연기자로서의 성공과 행복’에 대해 입을 열었다.

“같이 연극을 하는 후배들에게 ‘나는 뜨지 않은 배우라 행복해’라는 말을 했는데 다들 이해를 못하는 거죠. 사실 저도 예전에 많은 고뇌를 했어요, ‘이 바닥은 정말 한 방인데’라면서. 성공하고 싶었지만 나를 볶아봤자 내 삶만 불행하잖아요. 그러니까 삶의 기준을 ‘성공’에 두지 말고 ‘가치’ 그 자체에 뒀으면 좋겠어요. 내가 행복하면 돼요.”

김용선은 이날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행복감이 달라진다며 후배들이 배우로서의 성공에만 집착해 불행한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란다는 바람을 보였다.

[취재후기] 나이를 잊은 듯한 모습으로 약속 장소에 나타난 배우 김용선은 인터뷰 내내 소녀스러움을 유지했다. 시종일관 밝은 모습으로 대화를 이어 나가던 김용선은 후배들과 관련된 이야기와 자신이 출연했던 연극 이야기가 나오자 진지한 표정과 따뜻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우연한 기회에 ‘행운처럼’ 연극을 시작한 배우 김용선이 전하는 삶의 가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