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 '충신과 역적' 사육신묘에서 만난 역사의 패러독스

2014-08-13     유필립 기자

<편집자 주> 역사는 책에서나 보고 일부러 작정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 역사는 항상 우리와 마주하며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평소 대중교통 수단으로 오가던 길, 또는 몇 백미터만 더 걸으면 닿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을 기회가 되는 대로 휴대폰 앵글에 담아 보고자 합니다. 굳이 전문가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묻지 않아도 안내판이나 설명서만으로 우리는 꽤 많은 역사적 사실과 지혜, 교훈과 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스포츠Q(큐) 유필립 기자]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峰)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어 있어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성상문은 단종 복위 계획이 탄로나 처형당하게 되었을 때의 심경을 이렇게 읊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새로운 임금인 세조를 섬기는 세상이 오더라도 자기만은 단종을 위해 끝까지 절개를 지키겠다는 절절한 심정을 담았다.

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에서 10여 분 남짓 걸으면 사육신 공원이 나온다. 한강대교와 노량진역 중간의 언덕에 위치한 사육신 공원에는 단종을 강제로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세조)에 항거하며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육신이 잠든 묘역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사육신묘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셔츠가 땀으로 흥건히 젖던 7월말 금요일 오후, 업무를 마치고 잠시 짬을 내 사육신묘 공원에 들렀다. 더위 탓인지 공원은 한산했다.

 

‘사육신’의 충의(忠義)는 먼 옛날의 역사지만 내 기억 속에는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들이 당한 비극은 국사 시간에 배웠고 이들이 지은 피끓는 시조는 국어 시간에 외웠다. 사육신은 자주 사극의 소재가 되면서 안방에서도 자주 접했다. 550년도 더 지난 옛 사건임에도 기시감처럼 다가오는 이유다.

사육신 공원은 조선 세조 2년(1456)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잃은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류성원·유응부의 ‘사육신(死六臣)’을 모신 곳이다.

 

단종 3년(1455년) 숙부인 수양대군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즉위하자 이에 의분을 품은 충신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배신자의 고자질로 들통나 참혹한 최후를 마쳤다.

사육신의 충성심과 불굴의 의기를 추모하고자 숙종 7년(1681) 이곳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이 건립됐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1955년 5월에 육각의 사육신비를 봉헌했다.

 

 

본래 이 묘역에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그후 하위지 류성원 김문기의 허묘도 함께 꾸며졌다. 엄밀히 말하면 ‘사육신’이 아니라 ‘사칠신’이라고 할 수 있다.

경위는 이렇다. 1977~1978년 사육신묘 성역화 사업 때 하위지와 유성원의 허묘를 마련해 사육신의 묘가 비로소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때 역사적인 행적으로 볼 때 김문기가 사육신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논란 끝에 김문기 역시 허묘를 쓰고 위패를 봉안하게 됐다.

성역화 사업 때는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義節祠)와 사당의 정문인 불이문(不二門), 신도비의 보호각 등이 새로 세워져 현재의 모습을 대체로 갖추게 되었다. 이때 3240평이었던 묘역을 9370평으로 확장했다.

 

여러 가지 설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이곳에 사육신묘가 처음 조성된 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사육신들은 대역죄인으로서 옥사하거나 자결하거나 참혹한 ‘거열형’(車裂刑·죄인의 다리를 두 대의 수레에 한쪽씩 묶어서 몸을 두 갈래로 찢어 죽이던 형벌)을 당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사육신은 군기감(軍器監)에서 처형됐다. 용산구 이촌동에 있던 새남터였다고 한다. 그리고 사육신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먼 일가친척이나 이웃들은 감히 극형에 처해진 대역죄인의 시신을 장사지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국민족문호대백과에 따르면 이곳에는 일찍부터 박씨지묘, 박씨지묘,·유씨지묘,·이씨지묘, 성씨지묘라 새겨진 표석이 서 있는 4개의 묘가 있었고, 그 뒤편에 또 하나의 묘가 있었는데, 일찍이 민간에서 이 묘소를 육신묘라 일컫고, 뒤편에 있는 묘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묘라고 전해왔다. 이렇게 민간에서만 인정되어오던 육신묘는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사육신은 굴종을 선택해 영화로운 삶을 살기보다는 충의와 절개를 지키며 죽음을 택했다. 이로 인해 사지가 찢기는 극형을 감내해야 했고 이들의 집안은 처참하게 멸문지화를 당해야 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승자와 패자에 대한 평가를 180도 뒤바꿔놓기도 한다. '충신과 역적'. 사육신묘는 역사의 역설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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