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 덕수궁 함녕전 준명전 · 창덕궁 낙선재 수강재 '덕혜옹주의 행복한 기억이 머무는 곳'

2016-09-06     유필립 기자

<편집자 주> 역사는 책에서나 보고 일부러 작정하지 않으면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 역사와 문화는 항상 우리와 마주하며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평소 대중교통 수단으로 오가던 길, 또는 몇 백미터만 더 걸으면 닿을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을 기회가 되는 대로 휴대폰 앵글에 담아 보고자 합니다. 굳이 전문가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묻지 않아도 안내판이나 설명서만으로 우리는 꽤 많은 역사적 사실과 지혜, 교훈과 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스포츠Q(큐) 유필립 기자]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경희궁.' 조선왕조의 역사와 5대 궁궐의 역사는 떼레야 뗄 수 없다. 궁궐은 그 시대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이라는 점에서 당시 최고의 건축기술과 예술적 혼을 쏟아붓기 마련이다. 그래서 궁궐에는 왕조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1395년(태조 4) 경복궁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5대 궁궐의 역사는 조선의 정치·사회적 변화에 따라 ‘정궁’과 ‘이궁’의 지위가 바뀐 것은 물론,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등 전란과 국란을 겪으며 소실되거나 뜯기고 헐리기도 하고 과거의 영광을 찾아 복원되기도 했다.

궁궐은 그곳을 주무대로 살았던 인물들의 살아 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5대 궁궐에는 조선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들의 희로애락이 곳곳에 배어 있다. 특히 궁궐에서 출생해 역사의 한복판에 섰던 왕족들의 삶은 한 개인사를 넘어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 흐름과 맞닿아 있다.

궁궐에서 왕조의 화려함과 위엄, 영광의 역사를 누린 인물이 있었는가 하면, 좌절과 고독, 비애와 비운의 역사를 경험해야 한 인물들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권상실을 겪어야 했던 일제강점기는 5대 궁궐에게 최대의 수난기였고, 구중심처에서 귀하게 성장하고 생활해야 했던 조선왕조의 후손들에게는 치욕과 몰락의 시기였다. 요즘 스크린 속에서 만나는 ‘덕혜옹주’의 삶은 후자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덕혜옹주처럼 국가의 존망이 비극적인 개인사에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조선 왕족의 불운한 일대기도 없을 것이다. 그는 고귀한 핏줄로 태어났으나 정략 결혼으로 일본 대마도의 백작 부인이 돼야 했고, 밀려오는 공포감과 트라우마에 인생의 절반 이상을 정신분열증 환자로 살아야 했다.

또 평민의 신분이 된 광복된 이후에는 조국과 일본 양측에서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가 뒤늦게 귀국을 허락받고 돌아온 조국에서는 희미한 의식의 끝을 부여잡고 궁궐의 한 켠에서 힘겨운 생을 보내야 했다.

조선왕조 519년의 역사 중에 불행한 공주와 옹주의 삶은 많았다. 하지만 덕혜옹주가 소설과 뮤지컬, 영화 등 많은 예술작품들의 소재가 돼 왔고 뉴스의 초점이 되어 왔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의 삶이 비극적이었고 드라마틱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덕수궁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이었고 어머니는 궁궐 소주방 나인 출신의 복녕당 귀인 양씨(福寧堂 貴人 楊氏)였다.

겉보기 신분은 화려했지만 내용은 허울 뿐인 왕가였다. 일제는 5년 전인 1907년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회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을 트집 잡아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에게 양위시켰다.

또 1910년 8월에는 일제의 강제병탄조약으로 국권마저 상실한 경술국치를 겪어야 했다. 그후 519년 역사의 찬란했던 조선왕조는 일본의 왕실봉작제의 작위명에 따라 '왕공족(王公族)'의 신분이 돼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되며, 일본 천황가의 하부 단위로 편입됐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고종은 ‘덕수궁이태왕(德壽宮李太王)’으로 봉작되며 사실상 거주지가 덕수궁 안에 한정됐고, 고종의 아들로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두 번째 황제가 된 순종은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을 떠나 ‘창덕궁이왕(昌德宮李王)’으로 격하당하고 창덕궁 대조전에서 조용히 지내야 했다.

고종과 순종에게 더 이상 세상을 호령할 권세는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이왕가의 왕족들은 ‘일본천황-궁내성-이왕직’으로 내려오는 일제 행정조직의 관리·통제하에 하루하루를 지내야 했다. 이왕직(李王職)은 일제 강점기 이왕가와 관련된 사무 일체를 담당하던 기구로, 조선총독부가 아닌 이본 국내성(宮內省)에 소속돼 있었다.

고종은 궁궐에 침입한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부인인 명성황후의 처참한 최후(1895년 을미사변)를 지켜봐야 했고, 강제적인 양위와 국권 상실을 경험해야 했다. 거기에 고종의 일거수일투족은 일제의 총칼 아래 감시를 당했다.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던 고종에게 ‘덕혜옹주’의 탄생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솟아난 한줄기 빛이었을 터다.

환갑에 얻은 늦둥이 고명딸. 지금으로 말하면 ‘딸바보’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종은 너무 기쁜 나머지 삼칠일(아이가 태어난 후 스무하루 동안. 또는 스무하루가 되는 날. 일반인은 대개 이날 금줄을 거뒀다)도 깨고 7일 만에 복녕당을 찾아 예쁜 딸을 봤고, 21일 째에도 방문했다.

게다가 곧이어 종친을 불러 잔치도 열었고, 7월 13일에는 자신의 거처인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으로 데려와 곁에 두고 고명딸의 재주를 보며 금지옥엽으로 키웠다. 또 1916년 4월 1일에는 침전인 함녕전에서 150여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준명당(浚眀堂)에 유치원을 개설하고 딸이 외로울까 봐 귀족의 또래 딸들을 함께 입학시켰다.

함녕전에서 준명전까지는 가까운 길이었지만 가마를 태워 보낼 정도로 막내딸에 대한 사랑은 극진했다. 덕혜옹주에게는 77년 평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지만 그같은 기간은 너무 짧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에도 덕혜옹주는 왕공족의 족보에 올리지 못했다. 조선 왕조 후예가 늘어나는 것을 꺼려하던 일본 궁내성과 조선총독부는 덕혜옹주의 탄생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덕혜옹주의 모친인 귀인 양씨가 궁인 출신이라는 사실도 부정적인 조건이었다.

이 때문에 1917년 6월에야 비로소 ‘복녕당 아기씨’라는 이름을 버리고 왕공족의 신분을 얻으며 ‘덕혜’ 옹주가 되었다.

고종이 고명딸을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 자존심을 꺾고 테라우치 총독을 불러 덕혜옹주를 소개시킴으로써 왕족에 올리는데는 성공했지만, 이 일은 결과적으로는 덕혜옹주의 운명을 뒤바꿔 놓는 최대의 악수가 되어 버렸다. ‘덕혜’라는 호는 1921년 5월에야 공식적으로 인정 받았다.

고종은 강제로 일본에 보내지거나 일본인과의 정략 결혼을 우려해 덕혜옹주와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의 약혼을 은밀히 추진했다. 하지만 일제의 철통 감시와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돌연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당했다.

의민황태자(영친왕) 이은은 만 10살의 나이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나야 했다. 덕혜옹주에게는 이같은 사실상의 볼모 신세를 겪지 않게 하려던 고종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19년 1월 21일, 갑작스런 고종의 승하는 덕혜옹주의 운명을 다시는 헤어날 수 없는 깊은 나락으로 빠트렸다. 고종의 죽음을 놓고 일제의 독살설이 나돌았고, 이는 조선 백성의 울분을 불러일으키며 나라 잃은 설움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는 큰 계기가 되었다.

▲ 대조전(大造殿)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이 세상을 떠났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건설됐으며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그 뒤로도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해 다시 지었다. 아래 사진은 대조전과 연결된 흥복헌(興福軒)이다. 대한제국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고종의 승하 소식은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고, 고종이 불면 날아갈까 아끼었던 덕혜옹주에 대한 식민지 조선 백성의 기대감과 관심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됐다. 일제와 조선총독부는 덕혜옹주에 대한 반응을 경계하게 됐고, 결국은 1925년 3월 강제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한다. 일본에 건너간 덕혜옹주는 여자 가쿠슈인(학습원)에 입학한다.

덕혜옹주는 타국땅 일본에서 두 차례의 비보를 더 전해들어야 했다. 1926년 4월 25일 창덕궁에 거처하던 순종이 승하했고, 1929년 5월 30일에는 유방암으로 생모인 복녕당 귀인 양씨가 세상을 떠났다. 옹주는 순종과 생모의 사망 소식에 잠시 귀국했지만 또다시 망국의 한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덕혜옹주는 순종의 장례식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고, 생모의 신분이 천했다는 이유로 상복도 제대로 입지 못했다. 모두 덕혜옹주에 대한 조선 백성들의 과열 반응을 염려한 일제에 의한 술책이었다.

아버지의 독살설과 강제 유학, 순종과 생모의 사망 등 일련의 사건들은 덕혜옹주의 심신을 극도로 피폐시켰다. 일본에는 영친왕 이은 부부(일본 왕족 출신의 이방자 여사와 1920년 정략결혼)가 있었지만 옹주의 허망한 심신을 온전히 달래줄 수는 없었다.

일본 여자학습원 동창생 증언록에 따르면 덕혜옹주는 매일 보온병을 들고 학교에 다녔다. 그 이유를 묻자 독살당하지 않으려고 보온병의 물만 마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사방에 둘러싸인 적의 감시 속에 살아야 하는 옹주의 심리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결국 덕혜옹주는 10대 후반의 나이에 ‘조발성치매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요즘 병명으로는 ‘조현병’에 해당하는 증상으로 피해망상, 환청 등의 증상에 시달렸다.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대마도 백작 출신의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을 했고, 1932년 외동딸 마사에(정혜)를 출산했다. 하지만 조발성치매증은 이후에도 호전되지 않고 악화일로를 걸었다. 버티다 못한 다케유키는 1946년 덕혜옹주를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1947년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 부부는 일제의 패망 이후 왕족과 백작의 특권을 모두 잃었고, 1955년 영친왕 부부와 협의 후에 이혼한다.

덕혜옹주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외동딸 마사에는 성장해 가면서 ‘조선인’인 어머니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1955년 대학 때 사귄 스즈키와 결혼해 잘 사는 듯했으나, 1957년 유서를 남기고 거대한 봉우리가 있는 일본의 미나미(南)알프스에 들어가 실종됐다. 태풍이 오던 날이었고, 소 다케유키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 행방을 찾아 나섰지만 끝내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꿈에 그리던 조국은 광복을 맞이했지만 덕혜옹주가 당장 돌아올 곳은 없었다. 해방공간에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고종이 비밀리에 약혼을 추진했던 김장한의 형인 신문기자 김을한이 덕혜옹주의 행적을 수소문해 정신병원에 입원한 그를 귀국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흔적을 지우려던 이승만 정부는 덕혜옹주의 귀국을 꺼려했고,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미국 방문 길에 도쿄에 들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이방자 여사와 만나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국에 대한 협조를 약속하고 나서야 비로소 성사됐다.

덕혜옹주는 1962년 1월 26일에야 힘겹게 귀국길에 올랐다. 일제에 의해 강제 유학길에 오른지 38년, 정신병원에서 지낸지 15년 가까이 돼서야 대한민국으로 바뀐 조국에 영구 귀국할 수 있었다. 당시 김포공항에는 72세의 유모 변복동 등이 마중했다.

덕혜옹주는 이후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다 1968년 가을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로 옮겨 기거하였다. 하지만 덕혜옹주는 1989년 4월 21일 한 많은 삶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간간이 정신을 찾았지만 끝내 온전한 심신을 찾지 못했다.

낙선재 수강재에서 기거하던 덕혜옹주는 잠시 정신이 돌아올 때에는 딸의 이름과 아리랑을 불렀으며, 낙서처럼 한글로 소망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비록 정신은 혼미했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은 일제에 의한 독살의 위험이나 어떤 감시와 통제도 받지 않는 진정한 해방이었기에, 덕혜옹주에게는 아마도 고종의 품에서 철없이 놀았던 어린 시절 이후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기였을 것이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삐뚤빼뚤 쓴 글이었지만, 희미한 정신 속에서도 조국과 가족에 대한 정과 사랑을 잊지 못했던 덕혜옹주의 영혼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덕혜옹주가 귀국한 후 그의 가까운 왕족들도 하나둘씩 그의 곁을 떠났다. 1963년 혼수상태인 채 영구귀국해 병상에서 생활하던 영친왕 이은은 1970년 5월 1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순종 왕비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는 1966년 3월 3일 창덕궁 낙선재 석복헌에서 생을 마감했다.

1963년 가족과 함께 입국한 일본 황족 출신인 영친왕비(의민황태자비) 이방자 여사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시누이인 덕혜옹주를 보살피며 사회봉사 활동을 하며 살다가 덕혜옹주가 떠난 아흘 뒤인 1989년 4월 30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출처= 덕수궁과 창덕궁과 관련된 내용은 안내판과 팸플릿을 기본으로 하되, 부족한 내용은 문화재청 홈페이지 자료를 중심으로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위키피디아 등의 자료도 참고했습니다. 덕혜옹주와 관련된 이야기는 '덕혜옹주'(한국역사논술연구회), KBS 1TV 교양 역사 토크쇼 '역사저널 그날'의 '왕의 딸, 격랑 속에서 3편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편 등의 내용을 참조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