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Q현장] '1대99'의 기적 우승, 시민구단 새 역사 쓰는 '한국의 맥파이' 성남

시민구단 최초 FA컵 우승 및 ACL 진출 확정…7개의 별보다 더 빛날 역사 기대감

2014-11-23     박상현 기자

[300자 Tip!] K리그에서 '성남'이라는 이름은 역사다. 1983년 시작한 K리그가 32번째 시즌을 맞이한 가운데 무려 7차례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팀이다. 프로야구에 10차례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른 KIA(해태 포함)가 있다면 K리그에는 성남이다. 그러나 성남 일화라는 휘황찬란한 역사는 더이상 없다. 이젠 일화라는 기업구단이 아니라 시민구단이 됐다. 휘장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천마에서 성남시의 시조(市鳥)인 까치로 바뀌었다. '한국의 맥파이'가 됐다. K리그에서 시민구단은 '가시밭길'이나 다름없다. 탄탄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스타급 선수들을 불러모아 '레알 성남'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지만 이제는 다윗이 됐다. 골리앗에서 다윗이 된 성남은 하나은행 대한축구협회(FA)컵 우승으로 새로운 역사를 썼다. 성남은 2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2014 하나은행 대한축구협회(FA)컵 FC서울과 결승전에서 연장 전후반까지 120분 동안 득점없이 비긴 뒤 들어간 승부차기에서 골키퍼 박준혁의 2개 선방으로 4-2로 이겼다. 시도민구단 최초로 FA컵을 들어올렸고, 최초로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도 진출하는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

[상암=스포츠Q 글 박상현·사진 노민규 기자] 한때 화려했던 성남은 이제 더이상 없다. K리그 7차례 우승, FA컵 2회 우승, 리그컵 3회 우승,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2회 우승이라는 업적을 남겼던 성남 일화는 지난 시즌을 끝으로 사라졌다.

성남에서 K리그 팀이 완전히 사라질 뻔도 했다. 성남시가 구단 인수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안산 연고지 이전이 추진되기도 했다. 다행히도 성남시에서 전격적으로 구단을 인수하면서 기업구단 성남 일화는 시민구단 성남 FC가 됐다.

하지만 올해 시민구단 출범 첫 시즌은 순탄하지 못했다. 박종환 감독은 선수 폭행논란 파문 속에 취임 4개월만인 지난 4월 22일 불명예 하차했다. 이후 이상윤 수석코치와 이영진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을 차례로 맡았다. 특히 이상윤 감독대행이 4개월만에 하차했을 때는 감독대행을 경질시키는 초유의 사태로 비난의 화살까지 맞았다.

그러면서 성남의 성적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졌다. 올 시즌 성남은 단 한번도 6위에 올라본 적이 없다. 주로 중하위권에서 맴돌았고 최하위까지 내려간 적도 있었다. 하위 스플릿으로 내려간 이후에도 좀처럼 한자리 순위로 올라올 줄 모르고 있다.

다행히 최하위가 상주 상무로 굳어지면서 무조건 강등이라는 최악의 결과는 면했지만 아직까지도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하는 11위에 있다. 남은 두 경기를 통해 반등하지 못한다면 K리그 챌린지 플레이오프 승리팀과 홈 앤 어웨이 방식으로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러야만 한다.

이를 위해 김학범 감독은 FA컵과 K리그 클래식 정규리그 경기 가운데 어느 쪽에 더욱 비중을 둘 것인지 고심했다. 프로라면 당연히 어느 경기라도 소홀히 할 수 없겠지만 FA컵 우승을 취하고 K리그 챌린지로 강등된다면 상처 뿐인 영광이 될 수도 있었기에 고민이 됐다.

김 감독은 두 개를 모두 잡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여태까지 시민구단으로 FA컵 우승을 차지한 선례도 없고 AFC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한 사례도 없다. 시민구단인 성남이 이를 해낸다면 새로운 역사가 될 수 있다.

김학범 감독은 "전력만 놓고 보면 99대 1의 싸움이다. 우승 가능성이 희박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며 "그래도 시민구단으로서 시민을 실망시키는 경기를 할 수는 없다. 지더라도 멋지게 지고, 이기더라도 창피하지 않은 경기를 할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그러면서 김 감독은 하나를 더 내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시민구단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하는지를 보여줘야 하지 않겠느냐. FA컵 결승전이 그 계기가 될 것이다."

◆ 학범슨 매직, 시민구단의 역사를 새로 쓰다

김학범 감독은 기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종종 하는 얘기가 있다. 자신의 지휘봉을 잡기 전까지만 해도 팀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전임 감독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선수들의 마음가짐이나 체력 상태가 엉망이었다는 뜻이다.

김학범 감독은 "밖에서 보는 성남의 경기력은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니었다. 하위권에 있지만 실점이 적다. 다만 공격이 되지 않을 뿐"이라며 "질 때도 어이없이 지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곳, 또는 마지막을 견디지 못해 지거나 다 이겼던 경기를 놓쳤던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직접 성남의 지휘봉을 잡고 보니 그 이유를 깨달았다. 체력이 문제가 됐던 것이다. 김 감독은 "직접 성남에 들어와보니 90분 풀타임을 제대로 뛰는 선수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체력을 끌어올리는 훈련부터 시켰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김 감독은 선수들에게 무리한 훈련을 시키지 않았다. 무작정 과도한 훈련을 했다가는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신력을 강조하고 몰아치는 것 역시 문제가 있었다.

이에 대해 김 감독은 "무작정 몰아치기보다 선수들을 조금씩 변화시켰다. 몰아친다고 해서 되는 시대도 아니지 않느냐"며 "대신 선수들에게 스스로 반성하는 시간을 갖자고 했다. 선수 구성만 놓고 보면 여기까지 내려올 팀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성남의 마지막 일곱번째 우승이었던 2006년 당시 성남 일화의 지휘봉을 잡았을 당시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비교해 '학범슨'이란 애칭을 갖고 있었던 김학범 감독은 그렇게 팀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9월 6일 인천과 첫 경기에서 2-0으로 이기면서 기분좋게 출발했다.

하지만 그 전에 워낙 '까먹은' 경기가 많았다. 김학범 감독 부임 이후 성남은 K리그 클래식 13경기를 치르면서 3승 5무 5패를 기록했다.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앞선 23경기에서 4승 8무 11패를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분명 발전한 성적이다.

그리고 FA컵에서도 승승장구했다. 김학범 감독이 지휘봉을 잡아 처음 FA컵을 지휘했던 경기가 바로 K리그 클래식 최강 전북 현대와 4강전이었다.

지난달 22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맞대결에서 이동국, 한교원, 이승기 등을 모두 출전시킨 전북을 맞아 연장 전후반까지 120분 동안 무실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골키퍼 전상욱의 승부차기 선방으로 5-4로 이기고 결승까지 올랐다.

◆ FA컵 우승 디딤돌 삼아 K리그 클래식 잔류한다

김학범 감독은 FA컵 우승을 통해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싶었다. 가뜩이나 올 시즌 부진으로 패배의식에 사로잡혀있는 선수들에게 FA컵 우승보다 더 좋은 활력제는 없었다.

김학범 감독은 경기 전날 선수들에게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주문했다.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김 감독은 "내가 어떻게 서울을 잡는지 보여주겠다고 했다. 내가 선수들을 믿듯이 선수들도 나를 믿고 그대로 따라오라고 했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의 신뢰 없이 아무 것도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그대로 지켜졌다.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모두 겪은 김 감독의 지략은 FA컵 결승전에서 빛을 발했다.

모든 전문가들의 예상은 성남의 절대 열세였다. 현대오일뱅크 2014 K리그 클래식 11위로 밀려나 있는 성남보다 4위에 있으면서 3위 포항 추월까지 노리는 서울이 더 유리할 것이라는 예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 감독은 이를 뒤집을 자신이 있었다.

김 감독의 빛나는 전술 하나는 물러서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오늘 승부처는 상대 공격에 대비해 수비라인을 밑으로 내리지 않는 것"이라며 "경기 초반부터 수비라인을 올리면서 전방 압박을 했다. 서울은 상대팀이 수비 라인을 위로 올릴 때 문제점이 발생하는 팀"이라고 진단했다.

이는 제대로 맞아들어갔다. 골키퍼 박준혁의 실수로 전반 24분 에스쿠데로에게 골이나 다름없는 실점 위기를 맞는 등 어려운 경기를 했지만 끝내 서울에 골을 허용하지 않았다.

김 감독은 "물론 득점까지 했어야 우리가 준비했던 모든 것이 나왔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모든 것을 보여주지 못해 아쉽다"면서도 "그래도 전방 압박으로 서울을 막아낸 것이 오늘 경기의 승리 요인이었다"고 평가했다.

김학범 감독은 이미 한 차례 시도민 구단에서 아픔을 경험했다. 강원FC의 지휘봉을 잡았지만 성적 부진으로 도중 하차했다. 이후 잠시 야인생활을 하다가 이용수 세종대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에 들어갔다가 9월 5일 전격적으로 성남의 지휘봉을 잡았다.

김 감독은 시민구단 성남의 지휘봉을 잡으면서 각오를 다진 것이 하나 있다. 성남을 시민구단의 발전 방향을 보여주는 '롤 모델'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김학범 감독은 "FA컵 우승은 시민구단 성남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나가는지를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또한 우승을 바탕으로 K리그 클래식에 잔류할 수 있는 추진력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재명 성남시장이나 신문선 대표이사 모두 성남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나갈지를 많이 생각하고 있다"며 "일화 때처럼 선수들을 무분별하게 영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찬 구단이 될 것이다. 시민구단도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또 김 감독은 "내가 생각하는 성남 시민구단의 미래는 밝다. K리그의 대부분 시도민 구단이 재정난으로 많이 힘들지만 성남은 이런 점에 있어서는 다소 나은 편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래도 지금 성남 시민구단의 모습은 이전과 비교했을 때 분명히 어렵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FA컵 우승이라는 것은 더욱 앞으로 치고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 성남 서포터들 기쁨의 눈물, 헛되지 않으려면

주심의 연장 전후반 종료 휘슬이 울리자마자 성남 서포터들은 웅성거렸다. 김학범 감독이 '승부차기 대비 골키퍼' 전상욱을 바꾸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서울은 종료 2분여를 남겨놓고 유상훈으로 바꿨지만 성남은 그렇지 못했다. 이것이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니냐고 걱정했다.

하지만 골키퍼 박준혁이 2개의 선방을 해내자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일부 팬은 눈물을 흘렸다. 네번째 키커 김동섭이 가볍게 성공시키면서 성남의 FA컵 우승이 확정되자 성남 서포터석은 일제히 눈물바다가 됐다. 성남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FA컵 우승을 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김학범 감독의 말처럼 분명 성남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FA컵 우승으로 상금 2억원을 받는 것은 둘째 문제다. AFC 챔피언스리그에 나가면 거액의 수입이 보장된다. 물론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만큼의 수입은 꿈도 꾸지 못하지만 K리그 또는 AFC 전체로 봤을 때는 만만치 않은 수익이다. 만에 하나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해 FIFA 클럽 월드컵에라도 나가면 한 시즌 운영비를 너끈히 뽑아낼 수 있는 수입이 보장된다.

또 AFC 챔피언스리그에 나간다는 것은 일부 스타급 선수들을 정리하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영입할 수 있는 명분을 준다.

사실 성남은 올 시즌을 끝으로 계약이 끝나는 세르베르 제파로프를 정리하는 단계다. 제파로프가 훌륭한 선수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지만 시민구단 성남에게 제파로프의 몸값은 분명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게다가 나이도 적지 않아 90분 풀타임 동안 최고의 활약을 펼치기는 어렵다. 분명 전성기는 지난 선수다.

하지만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권 확보를 계기로 제파로프를 그대로 남겨둘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제파로프는 아시아에서도 정상급 선수이기 때문에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경쟁을 펼치려면 필요한 전력자원이기도 하다.

FA컵 우승 장면을 현장에서 지켜본 성남 팬들은 전력을 보강하면서도 조금 더 알찬 시민구단이 되기를 바랐다.

남궁운(61) 씨는 "기업구단에서 시민구단으로 바뀐 만큼 좀 더 시민의 의견이 반영되는 팀이 됐으면 좋겠다. 이번 FA컵 우승이 그런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또 아직 유니폼 스폰서가 없는데 이번을 계기로 여러 스폰서가 많이 생기고 마케팅에도 신경을 많이 써줬으면 좋겠다. 유럽처럼 스폰서가 많이 붙고 마케팅도 잘 되면 시에서 큰 돈을 투입하지 않고도 알찬 구단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아들이 축구를 하고 있다는 황수환(40) 씨도 "성남이 시민구단 첫 시즌으로 아직 여러 문제점이 나왔지만 FA컵 우승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다"며 "다만 아직 탄천종합운동장의 분위기가 끓어오르지 않고 있다. 축구장을 많이 찾는 문화와 분위기가 정착되는 것이 우선"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다른 팬들 역시 성남이 FA컵 우승과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계기로 좀 더 알찬 구단이 되기를 바랐다.

K리그 역사에 모범 사례를 보였던 시도민 구단은 있었다. 그러나 기업구단과 과도한 경쟁, 무분별한 선수 영입, 문어발 확장 등으로 인해 자본금 잠식 상태가 돼 존폐위기에 몰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서울월드컵경기장에 모여든 팬들은 K리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당당하게 장식하고 있는 성남답게 시민구단으로서도 롤 모델이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취재후기] 한국 스포츠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바로 프로구단이 돈을 벌지 못한다는데 있다. 마케팅 능력이나 연구 부족과 함께 기업구단으로서 적자가 나면 기업에서 메워주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는 풍토가 아직까지 뿌리깊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2014년은 프로구단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쓰여지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순수 프로야구단 기업인 넥센은 한국시리즈에서 국내 최고의 기업이 후원하는 삼성을 상대로 한국시리즈에서 당당하게 맞서 싸웠다. 넥센 히어로즈는 모기업 없이 마케팅과 스폰서, 관중 수입으로만 운영된다. 넥센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팀들이 바로 K리그 시도민구단들이다. 그러나 K리그 시도민구단은 아직까지 마케팅 능력에서 떨어져 자치단체의 지원금으로 연명하고 있다. 현재 성남의 위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자생할 수 있는 구조가 된다면 자치단체에서 독립해 진정한 시민과 도민들의 구단이 될 수 있다. 성남의 FA컵 우승과 AFC 챔피언스리그 티켓 확보가 그 출발점이길 바란다.

tankpark@sportsq.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