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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누구? 중학시절부터 꾼 꿈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고비에 강했던 민주주의 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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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누구? 중학시절부터 꾼 꿈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고비에 강했던 민주주의 거목"
  • 류수근 기자
  • 승인 2015.11.22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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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류수근 기자]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화려한 이력만큼 말그대로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을 보냈지만, 고비마다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정치입문 후 목숨을 바쳐 민주화에 헌신했지만 3당 합당으로 여당의 중심 세력으로 급변해 세상을 놀라게 했고,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뒤에는 군사정부의 유산을 청산하는데 압장섰다. 아들이 권력형 비리에 휘말려 오점을 남겼고 IMF 구제금융이라는 사상 초유의 경제 사태를 겪기도 했다.

김영삼은 1927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거제(통영군)에서 김홍조와 박부련 사이에서 1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3년 통영중학교에 입학했고 1945년 경남중학교로 전학했다. 이때부터 그는 대통령이 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장래희망을 물으면 대통령이라고 대답했다. 자신의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씨를 써놓기까지 했다.

경남중학교를 졸업한 후 1947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0년 장택상의 국회의원 총선거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였고 1951년 국회의원 장택상의 비서관이 되었다.

김영삼은 1954년 자유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고, 28세의 나이에 제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3선을 확정하기 위한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된 후 “이 당은 안 되겠다”고 결심하고 자유당을 탈당했다.

1955년 민주당 창당발기준비위원회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 민주당이 결성되자 입당했다. 1958년 제4대 총선에서 부산 서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4.19 혁명 이후에 치러진 1960년 제5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회에 복귀했다.

1960년 12월 민주당을 탈당한 김영삼은 신민당에 입당했고 원내부총무에 발탁됐다. 이해 9월에는 거제군 집에 들어온 무장간첩에게 어머니 박부련 씨가 살해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참여 요청을 거절했고, 1963년 군정연장이 발표되자 윤보선, 허정 등과 함께 군정연장 반대 데모에 참여했다. 이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제3공화국(1962~1972) 기간 동안 제1야당 신민당의 원내총무와 대변인을 거쳤고,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1969년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이철승 등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세웠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결선투표에서 김대중에게 패하였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이후에는 박정희 정권에 맞서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었다. 1974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열린 당총재 경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선명야당론을 주장하며 유신 체제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1979년 YH무역 사건 당시 원내 철야농성을 진두지휘하기도 했으며, 이후 여당에 의해 의원직 박탈을 겪기도 했다. 김영삼의 제명은 부마 항쟁을 촉발해 유신 정권 종식의 계기가 됐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반드시 온다”는 그의 발언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에는 김대중, 김종필 등과 대권을 놓고 경쟁했다. 하지만 전두환과 신군부의 5.17 쿠데타로 좌절되었고, 신군부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했다. 당시 계속된 가택 연금과 정치적 탄압에 항의하며 장기간 단식 투쟁을 단행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1983년에는 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조직했고, 같은해 5월 18일에는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23일간 단식 투쟁을 했다.

1984년 이민우, 김대중 등과 신한민주당을 창당했고,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올라서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다. 1987년에는 김대중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직선제로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 경선에 출마했으나 민주정의당의 노태우에게 패했다. 당시 김대중과 대통령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으나 의견일치에 실패했다. 이후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한 뒤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김영삼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후 평화민주당의 약진으로 제2야당의 당수로 밀려났다. 이해 4월 노무현을 정치계에 발탁했다.

하지만 1990년 1월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전격적으로 ‘삼당합당’을 하여 야합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세상을 놀라게 했고, 3당이 합쳐진 민주자유당의 대표로 취입했다. 이후 노무현은 그와 결별했다.

1992년 5월 19일 김영삼은 마침내 민자당 대통령 후보에 선출된다. 당시 대선은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후보의 3파전이었다. 이해 12월 18일 제14대 대선에서 김대중을 꺾고 32년간의 군사정부를 마감하고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 된다.

김영삼 대통령은 ‘문민정부’ 집권 초기 개혁 드라미브와 부패 청산 정책을 펼쳤다. 군정 부정과 정통성 확립에 집중했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 수사를 통해 처벌을 받게 했고 신군부(하나회) 척결을 이끌어 냈다.

경제사적으로 공직자 재산공개, 금융실명제 도입은 큰 이정표로 기록됐다. 하지만 1997년 외환시장 악화와 함께 초래된 경제적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IMF 구제 금융의 수치를 겪어야 했고, 한보비리에 차남 김현철 씨가 연루돼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32년만의 군사정권을 끝내고 꿈에 그리던 문민정부를 수립하고 큰 희망을 갖고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상대적으로 그 끝은 씁쓸하고 초라했다. 하지만 평생 민주주의 발전에 헌신하고 고비와 위기마다 과단성있는 결정과 실행력으로 담대한 카리스마를 보여줘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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