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08:29 (토)
[뷰포인트] '그때 그때 달라요' 심의 잔혹사
상태바
[뷰포인트] '그때 그때 달라요' 심의 잔혹사
  • 용원중 기자
  • 승인 2014.07.03 16: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포츠Q 용원중기자]

# 장면 1. 2006년 가을, 영국 런던 출장길에서 짬을 내 찾은 레스터스퀘어의 한 극장. 일요일 오전임에도 존 카메론 미첼 감독의 화제작 ‘숏버스’를 보기위해 몰려든 관객들로 북적였다. 성과 사랑에 대한 고민을 가감 없이 다룬 영화는 적나라한 자위, 집단성교, 항문성교, 사디즘과 마조히즘, 동성애 장면들로 가득했다. 유머러스한 대사와 장면에 관객들은 키득거렸고, 관계와 소통이라는 주제의식에 진지해지기도 했다.

# 장면 2. 2014년 여름, 한 영화홍보사 직원은 “1980년대 한국영화 포스터들을 보다가 너무 놀랐다. 남녀가 키스하는 사진이 버젓이 박혀 있더라”라며 자조했다. 그의 얘기인즉슨, 현재 국내 영화 포스터는 남녀의 키스장면이 들어가 있을 경우 심의규정에 걸린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볼에 뽀뽀하는 건 봤으나 제대로 된 키스사진을 본 적이 없는 게 아닌가. 담배와 피, ‘섹스’라는 단어도 안 된다고 귀띔한다.

▲ '숏버스'의 한 장면

위의 ‘숏버스’는 심의를 의식해 모자이크 버전을 제출했음에도 2007년 4월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로부터 수위 높은 성적 표현을 이유로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고, 수입사 측은 이에 소송을 제기했다. 2년여에 걸친 법정공방 끝에 2009년 1월 대법원이 ‘제한상영가 등급분류는 재량권을 일탈·남용한 것으로 위법’이라는 원심 판결을 확정하면서 2월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으로 개봉됐다.

◆ 배우 샤이아 라보프 성기노출 블러처리 이유는 ‘oo’해서?

어린 시절부터 성에 눈뜬 여자 색정광의 이야기를 그린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님포매니악 Vol.1’ 역시 수난을 피해가기 힘들었다. 먼저 배우들의 오르가즘 표정이 담긴 포스터가 블러(Blur·알아보기 힘들게 뿌옇게 처리하는 방식) 처리됐다.

▲ '님포매니악'의 오리지널 포스터(왼쪽)와 블러 처리된 포스터(오른쪽)

이후 제한상영가 판정까지 받았으나 수입사인 무비꼴라쥬에서 영등위에 자문을 구해 ‘센’ 정사장면과 성기노출을 블러 처리해 19금 영화로 극장에 내 걸 수 있었다. 그런데 어린 조(스테이시 마틴)와 관계를 하는 장면에서 할리우드 스타 샤이아 라보프의 성기는 발기된 상태라 블러 처리되고, 영화 초반 남성들의 성기가 주욱 나열된 장면은 ‘감정이 개입’되지 않아 흑백화면 처리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무비꼴라쥬의 한 관계자는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수용했지만 아쉬움이 크다. 관객들이 ‘답답하다’ ‘거장의 걸작을 무삭제판으로 제대로 감상하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내 가슴이 더 답답해진다”고 하소연했다.

◆ 2002년 등장한 제한상영가...전용관 없는 현실에서 폐기처분 의미

영화진흥법에서 ‘등급보류’가 사라지고 2002년 ‘제한상영가’가 등장한 이후 영등위는 전체관람가, 15세 이상 관람가, 청소년 관람불가, 제한상영가로 등급분류를 한다. 제한상영가는 “선정성, 폭력성, 사회적 행위 등의 표현이 과도하여 인간의 보편적 존엄, 사회적 가치, 선량한 풍속 또는 국민정서를 현저하게 해할 우려가 있어 상영 및 광고 선전에 일정한 제한이 필요한 영화”로 규정한다. 태어나자마자 저주의 굴레에 빠진 한 소녀의 잔인한 복수를 그린 ‘미조’가 최근 제한상영가 판정을 연이어 받은 것도 이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에서다.

▲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아 국내 상영이 불발된 '미조' 포스터

문제는 제한상영가 등급 판정은 영화 광고가 금지되는 데다, 우리나라에 제한상영관이 전무하다시피 해 사실상 ‘상영불가’ 즉 사형선고와 다름없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이자 오는 10월 일본 개봉을 확정한 ‘미조’ 측은 “영등위가 지적한 부녀간의 성행위는 서로를 부녀로 인식하고 하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의 잔인한 운명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밝혔다. 특히 근친상간 설정은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뫼비우스’를 포함한 국내외 영화들에서 자주 다뤄졌기에 형평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상황이다.

제한상영 판정은 선정성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현직 대통령과 유력 정치인들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극장 개봉이 막혀온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2011)가 지난 2월 항소심에서 ‘상영 제한이 부당하다’는 판결을 끌어냈다. 하지만 곧장 영등위가 대법원에 항고함으로써 개봉이 지연되는 상태다.

▲ 정치 풍자영화 '자가당착'의 한 장면

영화는 주인공 포돌이가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을 향해 “어머니”라고 외치다 뺨을 맞고, 이명박 대통령을 빗대 쥐 모양 얼굴을 붙인 인물을 등장시켰다. 영등위는 “특정 정치인의 인권 비하와 공권력에 대한 풍자 이미지가 크다”는 이유 등으로 제한상영가 판정을 내렸다

◆ 그때그때 달라지는 심의기준으로 창작자 혼란 가중

앞서 ‘님포매니악’의 성기노출 사례에서도 드러나듯 10여 년 전부터 영화 속 체모 및 성기노출은 용인되는 추세다. ‘영 아담’ ‘뮌헨’ ‘박쥐’ ‘은교’ ‘남영동 1985’ ‘색, 계’ ‘몽상가들’ 등의 작품은 15세 관람가, 청소년 관람불가로 개봉됐다.

지난 2012년 총 117개 조항으로 개편한 등급분류 규정은 연령별 등급에 따라 신체 노출 및 선정성의 표현 정도를 구분하고 있다, ◆15세 관람가= 성적내용과 관련된 신체노출이 있으나, 특정 부위가 선정적으로 강조되지 않은 것(제6조3항2호가), ◆청소년 관람불가= 신체노출이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성기 등을 강조하여 지속적으로 노출하지 않은 것(제6조4항2호가), ◆제한 상영가= 성기 등을 구체적, 지속적으로 노출하거나 실제 성행위 장면이 있는 것(제6조5항2호나)이다.

▲ 박해일 김고은 주연의 '은교'

영등위가 등급분류 기준의 모호성 지적을 반박하고 있음에도 성적 맥락(인과관계)이나 선정성, 노출의 지속성 판단은 심사위원의 재량과 감상평에 주로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여성의 성기노출, 남성의 고개 숙인 성기노출에는 관대하다’ ‘전체적으로 적나라하거나 폭력적인 영화는 불리하다’ 식의 관측이 퍼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과관계와 선정성 판단 잣대는 무언가, ‘부분적으로’ 적나라하거나 폭력적이면 괜찮은가 등 의문이 꼬리를 물게 된다. 결론은 등급분류 기준이 애매모호하다는 점, 심의 기준이 그때그때 다르다보니 창작자의 혼란이 가중된다는 사실이다.

◆ 편의점 청년 알바생 현실 다룬 ‘이우끝’도 청불 판정

한 영화사 관계자는 “시대와 관객 의식의 변화에 맞춘 등급제도의 혁신이 필요하고, 이에 앞서 모든 사람이 승복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라도 정립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청소년 관람불가로 개봉된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의 극중 장면

편의점을 배경으로 10대 후반, 20대 초반 청년들의 현실을 생생하게 그린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이하 이우끝)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개봉(6월 26일)됐다. 세계 유수 영화제 8관왕에 오른 '한공주' 역시 여고생 한공주의 이야기를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냈으나 청불 등급으로 개봉했다. 반면 마약이 등장하고 폭력 및 욕설 수위가 높은 범죄 액션영화 '끝까지 간다'는 15세 이상 관람가를 받았다.

'이우끝'의 김경묵 감독은 "비속어와 욕설, 모방 위험을 이유로 내린 판정은 현실의 청소년들을 미개인 취급하는 처사다. 시대를 역행하는 규제중심의 심의로 예술인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시민의 볼 권리까지 빼앗아가는 영등위의 행동이 개탄스럽다“고 일갈했다.

20세기를 지나서도 여전히 표현의 자유가 거론되고, 영화에 주홍글씨가 새겨져 폐기 처분되고, 예술적 흐름에 상관없이 모자이크·색보정·블러가 이뤄지는 나라. 한류의 메카, 문화선진국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영화 만들기 위해 정치적 망명이라도 해야 하느냐”고 묻는 한 감독의 냉소에 찬 목소리가 쉬 지워지질 않는다.

goolis@sportsq.co.kr

도전과 열정, 위로와 영감 그리고 스포츠큐(Q)

주요기사
포토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