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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스포츠1994] (1) "늬들이 골키퍼의 애환을 알아?"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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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스포츠1994] (1) "늬들이 골키퍼의 애환을 알아?" (上)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4.07.31 1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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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광 한국 U-16 축구대표팀 골키퍼 코치

케이블채널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94’(2013년10월 18일~12월 28일)가 지난해 연말 뜨거운 인기를 모았다. 극 중 간간히 보여준 농구대잔치와 프로야구 장면은 스포츠팬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물론 1994년에는 농구대잔치와 프로야구만 인기를 모았던 것은 아니다. 그 해에는 릴리함메르 동계올림픽을 비롯해 미국 월드컵과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등 굵직굵직한 국제대회가 넘쳐났다. 여기에 K리그는 물론 배구 슈퍼리그가 스포츠팬들의 시선을 집중케 했다. 그리고 수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팬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다. 그로부터 20년 뒤 그들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시리즈 ‘응답하라 1994스포츠’가 그들을 지금 만나러 간다. <편집자주>

[300자 Tip!] '알까기'. 야구나 축구에서 이 단어는 사실상 금기어다. 선수들에게 알까기는 그야말로 굴욕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알까기가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경우라면 비난의 화살을 한 몸에 받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 비난만 받으면 다행이다. 이것이 끝내 심리적인 부담이 돼 기량이 뚝 떨어지기도 한다. 바로 20년 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남자축구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 일방적인 공격을 펼치고도 알까기 하나로 결승골을 내주는 바람에 0-1로 져 결승 진출이 좌절됐다. 지금은 16세 이하(U-16) 한국 축구 대표팀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차상광(51) 골키퍼 코치의 이야기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까닭일까? 그는 이제 그 충격에서 벗어나 한국 골키퍼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 차상광 한국 U-16 대표팀 코치는 4년마다 돌아오는 아시안게임만 되면 1994년 히로시마 대회의 악몽이 떠오른다. 지금은 웃고 넘길 정도가 됐지만 우즈베키스탄전 통한의 실수는 아직까지도 아픔으로 남아 있다.

[파주=스포츠Q 글 박상현·사진 최대성 기자] "그럼 그렇지. 왜 최진철(43) 감독이 아닌 나를 인터뷰 대상으로 삼았나 했어. 그것 때문이지?"

경기도 파주 대표팀 트레이닝센터에서 만난 차상광 코치에게 아시안게임에 대해 얘기하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 앉았다. 20년 전의 기억은 그에게 쉽게 잊혀지지 않는 악몽이다. 물론 지금은 웃고 넘길 정도가 됐지만 그 일이 있은 후 10년 동안 아시안게임에 대한 것은 주변에서 절대로 꺼내지 말아야 할 말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아시안게임 시즌이 찾아올 때마다 물어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지금도 차상광 코치처럼 팬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한 몸에 받는 골키퍼가 있다. 브라질 월드컵에서 제대로 활약을 하지 못한 정성룡(29·수원 삼성)이 그 '슬픈 바통'을 이어 받았다. 공교롭게도 차상광 코치와 정성룡은 성남 일화(현재 성남 FC)에서 함께 생활했던 사제지간이기도 하다.

성남을 떠나 최진철 감독이 이끄는 U-16 한국 대표팀의 골키퍼 코치를 맡은 그는 오랜 프로 생활과 당시 뼈아팠던 것을 바탕으로 한 경험을 아들 뻘 되는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제자들이 커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배가 부른 듯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 차상광 한국 U-16 대표팀 코치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우즈베키스탄과 4강전에서 절대 우세 속에서 중거리 슛을 놓치면서 결승골을 내줬다. 차 코치는 설마 하다가 실점했다며 자신이 준비가 부족했음을 회상했다.

◆ 준비가 안됐던 아시안게임, 준비의 필요성 강조한다

당시 한 신문은 이렇게 묘사한다.

'축구대표팀 골키퍼 차상광에겐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이야말로 영원히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픈 대회. 우승 후보로 손꼽히며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한국축구대표팀은 홈그라운드의 일본을 꺾고 준결승에 진출, 우즈베키스탄과 맞붙었다. 한국은 27-4의 절대 슛 우세 속에 압도적인 경기를 펼쳤으나 후반 19분 압두라이모프의 중거리 슛에 어이없는 골을 허용, 0-1로 패했다. 차상광은 그의 정면으로 굴러온 볼을 일부러 피하기라도 하듯 결승골을 허용한 후 귀국할 때까지 말문을 닫고 중죄인처럼 지냈다.'

당시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86년 서울 대회 이후 8년만에 금메달을 따낼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터였다. 미국 월드컵에서 2무 1패의 성적을 거둔 뒤 맞은 아시안게임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아나톨리 비쇼베츠라는 실력이 검증된 외국인 감독이 지휘했기에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4강전에서 일방적인 경기를 펼치고도 단 한방에 무너졌다. 그 이후 한국 축구는 2010년 광저우 대회까지 16년 더 금메달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어느새 금메달의 기쁨을 누린지가 28년이 지났다.

"그 때는 준비가 안 되어 있었죠. 우리 대표팀이 공격만 하고 있을 때 내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게 안됐어요. 한번 넘어온 우즈베키스탄의 공격 당시 슛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설마 하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이후 모든 화살은 그에게 쏟아졌다. 사실 27-4의 슛 우위라 두 골이라도 넣었으면 이기는 경기였다. 어떻게 보면 공격수도 같이 욕을 먹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지금이야 선수들이 서로 감싸주고 보호해주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책임을 지는 희생양이 있어야 했어요. 그게 나에게 온 것이죠. 그 당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요."

▲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당시 통한의 실수로 한동안 입을 닫고 산 차상광 한국 U-16 대표팀 코치는 지금 당시 아팠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차상광 코치가 대표팀 훈련 도중 골키퍼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

이후 차상광은 한동안 입을 닫았다. 10년 가까이 아시안게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지금은 웃어넘길 정도의 지난 얘기라고 하지만 그에게는 '흑역사'임에 분명하다.

1986년 럭키금성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그에게 1994년 아시안게임 악몽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1994년 유공에서 뛰면서 22경기에서 21실점으로 경기당 평균 1골 이하의 선방 능력을 보였지만 이후 전성기만큼의 기량은 잘 나오지 않았다.

1995년 LG로 이적한 그는 15경기에서 21실점을 기록했고 다시 1996년 부천으로 돌아왔으나 1경기 출전에 그쳤다. 자신의 프로 선수 마지막 시즌인 1997년에는 천안에서 뛰면서 14경기 17실점의 기록을 남겼고 은퇴했다.

"포털 사이트에 내 이름을 치면 관련 검색어가 나와요. 그걸 지우고 싶긴 한데 이제 신경은 크게 안쓰니까 그냥 놔둡니다. 그런데 일반 분들이 저와 좀 친해지면 한번씩 찾아보는 모양이에요. 그러면 그 때마다 그냥 좋은 것만 찾아보라고 하죠.(웃음)"

그러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고 실수를 통해 성공을 이루기도 한다. 차상광 코치는 당시 뼈아팠던 경험이 큰 교훈이 돼 제자들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그런 아팠던 기억이 지금 지도자로 일하면서는 가르치는 바탕이 되죠. 선수들에게 항상 위치 선정부터 준비를 철저하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상대 공격수와 거리나 위치 선정에 대해서도 좀 더 공부하게 되고 이를 선수들에게 잘 가르칠 수 있게 된 거죠."

[응답하라 스포츠1994] (1) 차상광 한국 U-16 축구대표팀 골키퍼 코치②로 이어집니다.

tankpark@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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