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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와 잔혹 공존, 소녀들 흑백초상 '구명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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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와 잔혹 공존, 소녀들 흑백초상 '구명선 작가'
  • 박미례 객원기자
  • 승인 2014.02.26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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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박미례 객원기자] 영원히 박제된 소녀들.

구명선 작가의 그림을 보면 떠오르는 첫 인상이다. 섬세하게 연필로 그려낸 흑백 초상은 누아르 영화 속 욕망에 충실한 요부의 얼굴이자 몽환적이고 신비롭게 그려진 덜 자란 소녀들의 얼굴이기도 하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며, 순수와 잔혹을 오가는 속을 알 수 없는 두 얼굴이다.

▲ 구명선 작가

작품 제목은 늘 흥미롭다. 말랑말랑한 유행가 가사같기도 하고, 막장 드라마 속 복수심에 불탄 여주인공의 성난 말투같기도 하다. 2008년 첫 개인전 '복수할거야'를 시작으로 '낭만에 대하여' '추억은 꺼내는 게 아니야'를 지나 지난해 12월 '여러가지 진실 중 어느 것을 말해야 할까'로 이어지는 타이틀은 작가가 만들어낸 주인공이 내뱉는 성장 이야기처럼 들린다.

첫 개인전 그림 속 소녀들은 어느새 성숙해진 모습이다. 화면 정면을 당차게 응시하던 초상들은 화면 밖으로 조금씩 관조의 시선을 던지고 있다. 작가를 만나 얼마 전 끝난 개인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아마 늦은 여름 밤이었을거야'(2013년, 사진 왼쪽)와 '새벽이 흐르는 밤'(2013년)...Pencil on Paper

"갈수록 작업에 대해 설명하기가 어려워져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소설가는 문장으로, 음악가는 선율로 대신하듯이 제 생각을 저만의 그림 언어로 그렸어요. 이번 전시는 마음 가는대로 그려진 감정의 기복 같아요. 전시 제목 '여러 가지 진실 중 무엇을 말해야 할까'는 세상의 모든 이치는 어느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으며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님을 알아가는 저의 성찰을 담았어요."

그는 이어 '‘재료는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나?' '그림 속 인물의 의도는 무엇이냐?' 등 작품 형식에 관한 질문들이 자신을 지치게 한다고 고백했다. 진부하게 여겨진단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그런 질문들은 저 깊은 곳에 묻어두고 그저 자신의 목소리를 따라 그림을 그렸다.

작가는 개인전 오픈 3개월 전에 이별을 경험했다. 연애는 그에게 늘 커다란 심리 변화를 가져다주는데 일상의 반복 속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는 것만큼 온전히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강렬한 경험은 드물다고 말했다.

"이별의 순간보다 그후에 밀려드는 감정에 허우적대는 저를 바라볼 때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살아있음을 느껴요. 그런 경험이 작업에 힘이 되죠.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감정을 비워둔 각자의 방이 필요하다는 걸 이번에 깨달았어요. 각자의 방에서 저를 다시 되돌아보겠죠. 관계가 끝난 후 감정에 솔직했던 저를 이번 전시에 고스란히 담아 놓았어요."

유독 사랑을 이야기할 때 작가의 눈이 빛난다. 약삭빠른 사랑이 넘쳐나는 요즘, 그의 이야기는 순수해 보이기까지 한다. 작가와 꼭 닮은 초상들의 성장담일까. 어쩌면 지독한 나르시스트의 고백일까. "작업 과정에서 나를 알아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작가의 말이 그가 빚어낸 그림과 딱 맞아 떨어진다.

"이번 작품들에서는 저도 모르게 배경을 그리게 됐어요. 소녀의 정서를 보여주듯 내면의 풍경들이 생겼죠. 영화 '상실의 시대'에서 이별을 경험한 여주인공이 산으로 오르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의 산은 제게 잔인한 풍경처럼 보였어요. 풍경에도 표정이 많음을 인식한 뒤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라는 검은 풍경화를 그렸어요."

▲ '당신의 눈빛은 참 섬세해'(2013년)...Pencil on Paper

"갈수록 제 그림에 호기심을 갖는 관객이 다양해져요. 중년의 남자, 젊은 여자 등 성별과 나이를 떠나 각자의 마음에 자리한 여린 소녀 같은 부분을 제 작품에서 느끼는 것 같아요"라는 작가의 말처럼 아픔 없는 성장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유년의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왔을 터라 공감이 가능했을 것이다.

작가는 너그럽고 여유 있는 중년을 소망한다. 주름이 있을지라도 마음은 늙어 보이지 않으며, 본인의 욕망에도 충실한 섹시한 중년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게 되려면 영어도 잘하고, 운전도 할 줄 알고, 돈도 조금은 있어야겠다며 웃어보였다. 소녀에서 여인으로, 서른 넷의 여정을 지나는 작가는 설레는 듯 보였다.

◆ 구명선 작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학부 및 전문사 과정 졸업. 2008년 175갤러리 '복수할 거야'전, 2013년 조선갤러리 '여러 가지 진실 중 어느 것을 말해야 할까'전 등 4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 개최. 자신의 감정이나 심리를 반영한 소녀의 초상을 흑백 연필로 섬세하게 묘사한다. 서울 이태원 이슬람사원 근처 작업실에서 느릿한 고양이와 함께 지내며 작업하고 있다.

redfootba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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