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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느리게' 그레인키 김광현, 5G 시대 맞선 '느림의 미학' [ML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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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느리게' 그레인키 김광현, 5G 시대 맞선 '느림의 미학' [MLB]
  • 안호근 기자
  • 승인 2020.08.25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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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안호근 기자] 시속 53.5마일, 86㎞가 찍혔다. 리틀야구가 아닌 야구의 정점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서 나온 구속이다.

휴스턴 애스트로스 잭 그레인키는 24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펫코 파크에서 열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원정경기에 선발 등판, 6이닝 4피안타 2볼넷 4탈삼진 3실점했다.

승리를 챙기지는 못했지만 이날 그레인키는 어느 때보다 주목을 받았다. 바로 타자의 허를 찌른 ‘이퓨스볼’, 일명 ‘아리랑볼’ 때문이다. 5G 시대가 도래하며 점점 빠른 속도가 중시되는 사회가 됐지만 ‘더욱 느리게’를 외치는 투수들이 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 잭 그레인키가 24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전에서 87㎞ 초 슬로커브를 던져 화제를 모았다. [사진=AP/연합뉴스]

 

팀이 3-0으로 앞선 3회말 2사 후 트렌트 그리샴을 만난 그레인키는 볼카운트 1-1에서 스트라이크 존을 파고드는 이퓨스볼을 던졌다. 완전히 타이밍을 빼앗긴 그리샴은 이 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불리한 카운트에 몰리게 됐고 결국 삼진으로 물러났다.

류현진의 옛 동료이기도 한 그레인키는 리그 최고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이영상을 수상했던 정상급 기량을 뽐낸다.

그러나 빠른 구속과는 거리가 멀다. 사이영상을 수상했던 2009년엔 평균 155㎞의 빠른공을 던졌지만 구속은 서서히 떨어졌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4개월이나 지각 개막한 올 시즌엔 140㎞까지 하락했다.

그럼에도 성적은 큰 영향이 없었다. 다양한 무기를 바탕으로 매 시즌 15승 이상을 거두고 있다. 이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슬로 커브다. 100㎞ 근처까지 속도를 낮춰왔던 그레인키는 지난해 95㎞ 커브를 던져 화제를 모았는데 이날 그 구속을 더욱 떨어뜨린 것.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김광현도 슬로 커브를 바탕으로 23일 빅리그 선발 첫 승을 따냈다. [사진=AP/연합뉴스]

 

올 시즌 빅리그에 진출해 최근 선발 첫 승을 거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김광현도 마찬가지다. 김광현하면 150㎞를 웃도는 빠른공과 날카롭게 떨어지는 슬라이더가 떠오른다. 반대로 투피치에 가까운 투구 스타일은 빅리그 도전을 앞둔 그를 바라보는 우려스러운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시범경기부터 적극적으로 슬로 커브를 던지며 구종 다양화에 나선 김광현은 지난 23일 이 공을 바탕으로 꿈에 그리던 선발승을 따냈다.

KBO리그에서 많은 삼진을 잡아냈던 김광현은 이날 과감한 승부로 범타를 유도해내며 투구수를 아꼈다.

커브가 주효했다. KBO리그에서 빠른공이 주무기였던 김광현이지만 시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폼이 많이 떨어졌고 구속도 크게 줄었다. 속구와 슬라이더의 구속 차이가 크지 않은 만큼 구속차를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KBO리그에서 느린공으로 대표되는 두산 베어스 유희관. 금세 사라질 것이라는 평가에도 7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따내며 롱런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광현은 체인지업과 커브를 동시에 장착했는데 특히 느린 커브는 속구와 슬라이더의 위력을 더욱 배가시켰다. 100㎞대 커브를 수차례 스트라이크 존에 집어 넣으며 타자들과 승부에서 우위를 점했고 이 공은 빠른공 대처를 더욱 힘들게 했다.

국내에선 두산 베어스 유희관이 대표적이다. 속구 평균 130㎞ 가량의 공을 던지는 유희관이지만 7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챙기며 자신만의 길을 구축했다. 구속에 비해 높은 회전수, 최대한 앞으로 끌고 나오는 릴리스포인트 등 단순히 구속만으로 그의 속구를 평가하긴 어렵기도 하지만 느린 커브와 체인지업 등을 던진 뒤 던지는 빠른공은 절대 130㎞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타자들의 평가다.

투수들은 완급조절을 위해 같은 구종이라도 구속을 다르게 하곤 한다. 김광현도 최근 등판에서 슬라이더의 구속을 조절해 효과를 봤다고 했다. 타자들을 최대한 헷갈리게 만들면서도 빠른공의 위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느린 공으로 타자들의 눈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여전히 160㎞를 던지는 투수들은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고 이들에 팬들은 환호한다. 하지만 구속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투수들의 존재는 야구의 더욱 재밌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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