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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는 독일축구 생태계 파괴범? [김의겸의 해축돋보기]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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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는 독일축구 생태계 파괴범? [김의겸의 해축돋보기]⑧
  • 김의겸 기자
  • 승인 2020.08.26 1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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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김의겸 기자] '해버지(해외축구의 아버지)'로 통하는 박지성이 지난 2005년 7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에 진출한 이래 대한민국 축구팬들은 주말마다 해외축구에 흠뻑 빠져듭니다. 그 속에서 한 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울 법한 이야기들을 인물을 중심으로 수면 위에 끄집어내고자 합니다. 고성능 돋보기를 갖다 대고 ‘숨은 그림 찾기’라도 하듯. [편집자 주]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 탓에 늦어지긴 했지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까지 막을 내리면서 비로소 유럽축구 2019~2020시즌이 종료됐습니다. 이번 시즌 UCL에선 파리 생제르맹(PSG)이 사상 처음 결승에 진출하고, 올림피크 리옹이 10년 만에 4강에 오르는 등 새 역사가 쓰였는데요.

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팀 중 하나가 바로 황희찬의 새 소속팀 RB 라이프치히입니다. 창단 11년 만에 유럽 4강에 들면서 신흥 강호의 등장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라이프치히가 독일 분데스리가 안에선 따가운 눈총을 받는 팀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독일 축구 풍토를 이해한다면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텐데요. 스포츠Q(큐)와 함께 살펴보시죠.

RB 라이프치히는 창단 11년 만에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사진=라이프치히 공식 홈페이지 캡처]

◆ RB가 레드불이 아니야?

스포츠 음료 브랜드 레드불(Red Bull)은 2009~2010시즌 독일 5부리그였던 SSV 마크란슈태트를 인수해 라이센스를 획득한 뒤 팀명과 엠블럼, 유니폼까지 모두 바꿔 RB 라이프치히로 재탄생시킵니다.

독일 프로축구의 ‘50+1(구단 지분 51%를 공적 지분이 소유해야 한다)’ 규정을 피해 구단을 ‘소유’하는 개념이 아닌 ‘후원’한다는 명목 아래 팀을 빠르게 성장시켰습니다. 원칙적으로 팀 이름에 모회사 이름을 표기할 수 없기 때문에 ‘RB’ 역시 레드불이 아닌 독일어 ‘Rasenball(잔디에서 하는 공놀이)’의 약자라고 설명합니다. 사실상 모기업인 레드불의 약자로 보이도록 술수를 쓴 셈이죠. 

레드불의 공격적인 투자를 등에 업은 라이프치히는 7년 만인 2016~2017시즌 1부로 승격했고, 최근 두 시즌 연속 3위를 차지하며 UCL 무대까지 밟게 됐죠.

하지만 현지 팬들은 라이프치히의 행보가 독일축구가 자랑스레 여기는 50+1 룰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비판합니다. 리그 입성에 반대하며 라이프치히 원정경기를 보이콧하는 것은 물론 과격한 시위도 불사했죠. 라이벌 클럽 디나모 드레스덴 팬들은 라이프치히를 상징하는 황소의 머리를 잘라 피치에 던지기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라이프치히는 독일 분데스리가 '공공의 적'으로 통한다. [사진=라이프치히 공식 홈페이지 캡처]

◆ 독일에서 50+1 규정이 갖는 의미

'50+1' 규정은 서포터(조합원)들이 구단 운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실질 권리를 부여하는 독일축구 관행이 깃든 규정입니다. 클럽(혹은 그 조합원)이 51% 이상 지분을 갖고, 팀에 전반적인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외부 자본으로부터 흔들리지 않도록 만들기 위함이죠. 1998년 이전에는 모든 독일축구 클럽은 비영리로 운영됐고, 개인 투자가 금지됐습니다. 현재는 개인 투자를 허용하지만 여전히 50+1 룰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도르트문트에는 14만 명에 달하는 의결권 보유 멤버들이 있고, 바이에른 뮌헨 역시 매년 30~60유로(4만2000원~8만4000원)에 연간 멤버십과 의결권을 부여합니다. 시즌권과는 다른 개념으로 K리그 시민구단의 주주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협동조합을 만들어 구단 현안에 목소리를 내고 있죠. 분데스리가 티켓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이유 역시 입장권 인상을 위해선 이 구단 주주들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라이프치히에선 의결권을 가진 이가 단 17명에 불과하며 심지어 이 중 대다수가 레드불 직원입니다. 레드불은 현재 지분 49%만 소유하고 있다고 하지만 지금껏 투자한 규모를 돌아보면 설득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게 중론입니다. 표면적으로만 50+1을 준수하고 있다는 비판이 꼬리표처럼 붙는 이유죠.

하지만 ‘공공의 적’ 취급 받는 라이프치히라 할지라도 지지 세력이 없는 건 아닙니다. 분데스리가가 서독에서 출범했기 때문에 독일 통일(1990년) 이후 분데스리가에 편입된 구동독 지역 클럽들이 힘을 내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이 가운데 독일 동부에 연고지를 둔 라이프치히가 구동독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호응을 얻고 있다는 관측입니다.  

또 50+1 룰이 현 뮌헨의 독주 체제를 만들었으며 리그 전체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리는 터라 라이프치히가 그 인식 전환의 선봉대장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분데스리가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처럼 외부 투자유치를 통해 외형을 키워야 한다는 이유에서 50+1 찬반논란이 치열하다고 합니다. 실제 지난 2018년 3월 분데스리가1·2 36개 구단 회장이 모여 이사회를 열고 규정 존폐 및 개정 여부를 논의했는데, 당시에는 현행을 유지하기로 결정한 바 있습니다.

호펜하임의 최대 개인 투자자 디트마르 호프를 비난하는 현수막을 내건 바이에른 뮌헨 원정팬. [사진=로이터/연합뉴스]

◆ 호펜하임과는 어떻게 다른 걸까?

지난 3월 독일 진스하임 프리제로 아레나에서 열린 호펜하임과 뮌헨의 시즌 24라운드 맞대결은 서포터즈의 항의 탓에 경기가 2차례 중단됐습니다. 경기가 재개되자 양 팀 선수들은 해당 서포터즈에 항의하는 뜻으로 서로 공을 돌리며 시간을 흘려보내기까지 했죠.

이날 원정석에 자리한 일부 뮌헨 팬들이 호펜하임의 최대 투자자 디트마르 호프를 비난하는 현수막을 내걸었기 때문입니다. 50+1 규정에 자부심이 강한 독일 팬들 사이에서 호펜하임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같은 맥락에서 자행된 일입니다. 

지난 2015년 분데스리가에는 ‘20년 이상 지속해서 특정 팀을 지원한 사람이나 기업이 해당 구단을 소유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이 생겼습니다. 호프는 이를 처음 활용한 인물이죠. 그는 이후 호펜하임 구단 지분 96%를 사들이며 최대 투자자에서 사실상 구단주가 됐습니다. 그동안 분데스리가가 지켜온 50+1 룰에 철저히 위배되는 일이 벌어진 거죠.

소프트웨어 업체 SAP의 공동창업자인 호프는 호펜하임 유스 출신으로 1989년 호펜하임에 투자를 시작했고 지금껏 투자를 이어왔습니다. 당시 5부리그였던 호펜하임은 호프의 투자 이후 승격을 거듭했고, 2008~2009시즌 부로 1부에서 활약하고 있으니 라이프치히와 닮은 점이 많네요.

지난해 12월 도르트문트 팬들도 호펜하임 홈구장을 방문한 뒤 유사한 행위를 저지른 바 있습니다. 2018년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난 일이었죠. 이에 독일축구협회(DFB)는 향후 두 시즌 동안 도르트문트 팬들의 호펜하임 원정 응원을 금하고, 구단에 5만 유로(6600만 원)의 벌금 징계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축구 시장에 거대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닌데요. 라이프치히가 머지않아 호펜하임과 같은 절차를 밟을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올해 라이프치히의 약진으로 50+1 규정이 새삼 주목받고 있습니다. 분데스리가가 고유의 전통을 언제까지 지켜내며, 또 새로운 변화에 어떻게 대처할지 축구계 이목이 쏠리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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