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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비 첫 득점-부상 속 11초 연기, '꼭 메달만 감동인가요' [도쿄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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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비 첫 득점-부상 속 11초 연기, '꼭 메달만 감동인가요' [도쿄올림픽]
  • 안호근 기자
  • 승인 2021.07.27 1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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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안호근 기자] 일본 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연일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2020 도쿄올림픽에 나선 용사들의 열정을 잠재울 수는 없다. 두려움을 안고도 5년간 준비한 올림픽 하나만을 바라보고 용기 있는 도전을 택한 이들이다.

물론 모두가 메달리스트가 될 수는 없다. 출전 선수라면 누구나 높은 곳을 바라보기 마련이지만 메달 수는 한정적이다.

다만 메달의 유무, 색깔과 감동의 크기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도전 정신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한 게 올림픽 무대고 그들의 투혼과 노력은 보는 이들을 감동시키고 눈물을 빼앗기도 한다.

[사진=연합뉴스]

 

26일 7인제 럭비 조별리그 A조 1차전에서 뉴질랜드를 만난 한국 대표팀. 세계 2위 뉴질랜드는 31위 한국엔 너무도 높은 벽이었다. 결과는 5-50 대패. 그러나 결과만으론 이들의 노력과 소외되고 고됐던 역사를 모두 담아낼 수 없었다.

한국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탓에 관심도 쉽사리 받지 못하고 대패라는 결과만으로 아쉬움을 가질 법하지만 한국 럭비 역사에 이정표를 세운 날이었다. 올림픽 첫 득점. 

에이스 정연식(28)은 0-7로 끌려가던 전반 5분경 장용흥(28)의 패스를 받아 오른쪽 빈곳을 파고들었다. 거세게 따라붙는 상대를 제치고 골라인 안 쪽에 공을 찍으며 ‘트라이(득점)’에 성공했다. 5점 획득.

기적적인 일이다. 뉴질랜드는 인구 500만으로 한국에 비해 규모가 작지만 럭비 선수만 16만 명에 달하는 강국이다. 국군체육부대(상무) 포함 실업팀이 단 4개, 성인 선수가 100명여에 불과한 한국으로선 점수를 내는 것 자체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사진=연합뉴스]

 

득점에 성공한 선수들은 마치 금메달이라도 따낸 듯 서로를 부둥켜 안고 기뻐했다. 그럼에도 쉽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방송사에서는 펜싱과 수영 등 메달 유력 종목을 중계하고 있었다. 단신으로 소개된 내용에도 ‘첫 득점’의 의미가 크게 부각되진 않았다.

다만 이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이들의 노력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의 감정은 남달랐다. 현장을 찾은 최윤 럭비협회장과 봅슬레이스켈레톤 대표팀 총감독을 맡았던 이용 국민의힘 국회의원 등 관계자 몇 명, 소수의 한국 취재진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자신감을 얻은 선수단은 이후 열린 호주전에서도 또다시 트라이를 성공하며 연이어 득점 ‘맛’을 봤다. 이날 오전 10시엔 아르헨티나와 조별리그 최종전을 치른다. 이번엔 어떤 장면으로 감동을 안겨줄까. 이들은 럭비의 매력을 알리겠다는 사명감으로 마지막 경기에 나선다.

올림픽 정신엔 나이도, 국경도 없다. 자메이카 체조 선수 다누시아 프랜시스(27)의 도전도 감동을 전하기에 충분했다.

[사진=다누시아 프랜시스 인스타그램 캡처]

 

프랜시스는 지난 25일 여자 기계체조 예선에서 최하위를 기록했다. 그의 연기는 단 11초 동안만 볼 수 있었다. 경기 이틀 전 왼쪽 무릎 전방십자인대 파열을 당했기 때문. 경기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프랜시스는 어렸을 적부터 꿈꿔온 올림픽 앞에서 포기하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을 딛고 당당히 꿈의 무대에 섰다.

영국 태생인 그는 2012년 런던 대회에서 영국 대표팀의 대체 선수로 나섰지만 끝내 출전 기회를 잡지는 못했다. 9년을 기다렸고 이번엔 부모님의 국적을 따라 자메이카 국기를 가슴에 달고 나섰다.

의사들은 만류했다. 스스로도 좋은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포기는 없었다. 왼쪽 무릎에 붕대를 여러 겹 감은 채 이단평행봉 연기에 나섰고 간단한 연기만을 수행한 뒤 아름다운 밝은 미소와 함께 평행봉에서 내려섰다.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에 따르면 프랜시스는 “정말 특별한 순간이었다”며 “내가 꿈꿨던 연기는 아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커다란 성취”라고 말했다. 사과의 뜻을 전한 그와 달리 심판진은 감동적인 퍼포먼스에 수행 점수 9.033을 부여하며 화답했다. 전 동료인 영국 선수들을 비롯해 현장에서 그의 연기를 지켜본 이들도 뜨거운 박수로 프랜시스를 격려했다.

특히 영국 대표팀에서 연을 맺었던 해나 웰런, 베키 다우니는 자신들의 SNS를 통해 “너무 자랑스럽다”고 말했고 자메이카 대표팀도 “우리는 다누시아의 용기가 그 어떤 것보다 자랑스럽다”고 감격스러워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아름다운 프로포즈도 빼놓을 수 없는 스토리다. 아르헨티나 방송 TyC스포츠와 로이터통신은 아르헨티나 여자 펜싱 선수 마리아 벨렌 페레스 마우리세(36)는 펜싱 여자 사브르 개인전 32강에서 탈락했는데 이후 펼쳐진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했다.

패배 후 실의에 빠진 채로 인터뷰를 하고 있는 마우리세에게 한 남성이 종이 한 장을 들고 다가왔다. 루카스 사우세도 코치였는데, 마우리세와 17년 간 만난 남자친구였다. 이를 발견한 기자는 마우리세에게 돌아보라고 했고 그가 바라본 종이에 “나랑 결혼할래?”라고 적혀 있었고 이를 본 마우리세를 비명을 지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마우리세는 무릎을 꿇은 사우세도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청혼을 받아들였다.

마우리세는 “(청혼 문구를 본 순간) 모든 걸 잊었다”며 “우리는 서로 많이 사랑하고 있고 남은 생을 함께 보내고 싶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가 바비큐 파티로 기념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우세도는 201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한 차례 청혼했는데 당시엔 마우리세는 “지금은 너무 어리다”며 거절했었다고. 그러나 11년이 지난 뒤 가장 실망스러웠을 상황에서 받은 프로포즈는 아픔을 모두 잊을 만큼 너무도 달콤했다. 

메달리스트들이 전한 여운도 진했다. 26일 양궁 남자 단체전에서 생애 2번째 금메달을 수확한 오진혁(40·현대제철), 유도 남자 73㎏급 안창림(27·KH그룹 필룩스)이 이뤄낸 투혼의 동메달도 값졌다.

[사진=연합뉴스]

 

오진혁은 어깨 회전근 힘줄이 4개 중 3개가 끊어져 의사로부터 은퇴 권유까지 받았지만 진통제를 달고 살며 어깨 유연성을 늘려주는 주사까지 맞아가며 투혼을 발휘했다. 든든한 맏형으로서 결정적일 때 마다 10점을 쏴주며 한국 남자 양궁 단체전 2연패를 이끌었다.

“젊게 마음을 먹으면 몸이 젊어진다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다”는 불혹 궁사의 한마디는 울림을 더했다.

재일동포 3세로 일본의 귀화 제의까지 거절하고 태극마크를 단 안창림의 도전도 값졌다. 32강부터 연이은 연장승부로 체력이 바닥났다. 16강에선 상대와 충돌해 코피를 흘리기도 했다. 결국 준결승에서 8분 37초간 혈투를 벌였는데,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아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도 3개를 받아 반칙패로 분루를 삼켜야 했다.

루스탐 오루조프(아제르바이잔)와 동메달결정전에서도 연장 승부가 펼쳐지는 듯 했다. 그러나 경기 종료를 7초 앞두고 힘을 쥐어짠 회심의 업어치기로 절반을 획득, 감격적인 동메달 사냥에 성공했다. 개인 첫 올림픽 메달이자 차별과 맞서면서도 힘들게 한국 국적을 지켜낸 끝에 일본 유도의 심장 ‘도쿄 일본무도관에서 태극기를 들어올려 더욱 뜻깊은 성과였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안창림은 경기 후 “대한민국 국적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생명을 걸고 지키신 것이다. 한국 국적을 유지한 걸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해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을 덩달아 뜨겁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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