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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패자 조재호, 승리의 참가치를 알기에 [P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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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패자 조재호, 승리의 참가치를 알기에 [PBA]
  • 안호근 기자
  • 승인 2021.11.24 1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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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안호근 기자] 다시 한 번 고개를 떨궜지만 조재호(41·NH농협카드 그린포스)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누구보다 승리가 간절한 그이기에 승자가 누릴 기쁨의 자격에 대해 존중했다. 한 끝 차이로 주인공이 되진 못했음에도 주인공을 밝게 비춰주는 명품 조연이었다.

조재호는 23일 경기도 고양시 소노캄고양에서 열린 2021~2022 PBA(프로당구) 투어 3차전 휴온스 PBA 챔피언십 결승에서 에디 레펜스(52·벨기에·SK렌터카 위너스)에 세트스코어 1-4(10-15 15-10 8-15 8-15 0-15)로 져 준우승에 그쳤다.

그러나 ‘패자’ 조재호는 우승자 레펜스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름다운 스포츠 정신으로 상대가 더욱 빛날 수 있도록 기꺼이 조연을 자청했다.

조재호가 23일 휴온스 PBA 챔피언십 결승에서 우승자 에디 레펜스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다. [사진=PBA 투어 제공]

 

조재호에게도 간절했던 우승이었다. 대한당구연맹(KBF) 소속 시절 세계선수권과 월드컵 등 국제대회에서 11차례나 입상했던 조재호다. 2014년엔 월드컵에서 정상에 서기도 했다.

그렇기에 지난 시즌 도중 갑작스럽 PBA 합류는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미 자리를 잡은 프레드릭 쿠드롱(벨기에·웰컴저축은행 웰뱅 피닉스), 강동궁(SK렌터카 위너스) 등과 함께 리그를 호령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적응기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첫 시즌 최고 성적은 32강. 올 시즌엔 첫 대회에서 8강에 오르며 적응을 마친 듯 보였으나 2차 대회 128강 탈락하며 고배를 마셨다.

이번 대회는 반드시 최고 성적을 내겠다는 굳은 각오로 나섰다. 128강에서 강동구(3-0), 64강에서 정호석(3-0)을 가볍게 격파한 조재호는 32강에서 김현우와 풀세트 접전 끝에 승리를 거둔 뒤 16강에서 이태현, 8강에서 강민구(블루원리조트 엔젤스)를 각각 3-1로 꺾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1차 목표를 이뤘지만 반드시 결승에 나서야 했다. 상대가 1차 대회에서 8강에서 쓴맛을 안긴 다비드 사파타(스페인·블루원리조트)였기 때문. 1세트를 내줬음에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2,3세트를 가져왔고 4세트를 내준 뒤엔 5,6세트를 내리 따내며 결승행을 확정했다.

결승 상대 레펜스 또한 우승이 간절하긴 마찬가지였다. 당구 인생 40년 동안 국내(벨기에) 대회에서만 정상에 섰던 그였기에 다국적 선수들이 모여 펼치는 PBA 투어 우승은 꿈에 그리던 목표였다.

준우승자 조재호(왼쪽)가 우승을 차지한 레펜스와 함께 환한 미소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PBA 투어 제공]

 

간절한 만큼 어느 때보다 집중력이 돋보였다. 조재호는 1세트 키스 행운이 겹치며 9점을 몰아쳤는데 이후 레펜스가 11득점하며 역전에 성공해 결국 기선제압을 당했다. 조재호 또한 에버리지 5를 기록했지만 선공을 잡은 레펜스의 기세가 남달랐다.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조재호는 2세트 2이닝에 8점을 몰아치며 다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3세트는 내줬으나 4세트 다시 흐름을 바꿀 기회가 있었다. 0-2로 끌려가던 3이닝 4연속 득점에 성공한 뒤 되돌려치기 기회가 왔는데 아쉽게 놓쳤고 이후 레펜스가 6연속 득점 등으로 달아나며 승부가 기울었다. 조재호는 이 장면을 승부처로 봤다.

세트스코어가 1-3까지 벌어지자 조재호의 집중력은 급격히 무너졌다. 5세트에선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대회를 마무리해야 했다.

아쉬움이 가득할 법했으나 특유의 밝은 미소를 보였다. 승자 레펜스를 위한 것이었다. 엄지까지 치켜들며 상대에게 존중을 나타냈다.

경기 후 조재호는 “10년 이상 경쟁해 온 선수로서 유대관계를 잘 유지해왔다. 축하를 해주기도, 받기도 했다. 상대 선수지만 적이라기보단 친구라고 생각한다”며 “잘했다고 우승을 축하해주는 이유는 내가 우승했을 때도 그런 축하를 받기 때문이다. 운이 따르지 않아 졌다고 생각하고 그런 표정을 짓는다면 상대도 기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진심 어린 마음으로 축하해준다면 내가 이겼을 때도 진심어린 축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패배의 아쉬움보다는 승리 자격을 갖춘 선수가 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성숙한 자세가 돋보였다.

레펜스에게 아낌 없는 축하를 보낸 조재호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축하해준다면 내가 이겼을 때도 진심어린 축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PBA 투어 제공]

 

100% 만족할 수만은 없다. 조재호는 “대회 전에 우승하는 꿈을 꿨다. 개꿈인가 싶었는데 결승까지 올라오게 돼 ‘꿈이 실현되려나’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는데 결정적인 상황에서 안일한 대처로 실수한 게 뼈아팠다”고 말했다.

인터뷰실에 들어오며 “죄지은 것 같다”고 말한 그에게 그 뜻을 묻자 “예전부터 인터뷰에서 말했었는데 외국에 가보면 준우승은 물론이고 4강에 들어도 축하를 받는다”며 “우리나라는 수고했다는 말이 전부다. 이젠 좀 바뀌었지만 국내에서도 우승자 외 선수들에게도 축하를 전하는 문화로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우승을 놓친 건 아쉬움과는 별개로 조재호에겐 큰 의미가 있는 대회였다. 1차 목표인 8강을 넘어섰고 무엇보다 어깨를 짓누르던 부담감을 떨쳐낼 수 있었기 때문. 조재호는 “8강이 가장 중요했다. 그 전에 8강에서 졌기에 승리하면 또 하나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4강은 또 져서는 안 되는 상대를 만났다. 이번엔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결승에서 만난 레펜스는 충분히 우승할만한, 한큐 한큐를 소중하고 정확하게 치는 상대였다”고 설명했다.

언제 정상에 서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는 게 그에 대한 평가였다. 다만 새로운 룰과 환경에 대한 적응, 커다란 기대 등이 부담으로 작용해 제 실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커다란 산 하나를 넘어섰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큰 대회다. 조재호는 “4강, 결승에 오고도 우승을 못하니까 기분이 썩 좋지 않을 수도 있다”면서도 “처음 입상을 했다고 생각한 것에 의미를 둔다. 다만 첫술에 배부를 수 없으니 더 열심히 다음 대회를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승리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자신을 꺾은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조재호. 다음 대회에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부족한 점을 메우겠다는 각오다. ‘슈퍼맨’의 비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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