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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어 유희관', 편견 부순 이단아는 떠납니다 [SQ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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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어 유희관', 편견 부순 이단아는 떠납니다 [SQ현장]
  • 안호근 기자
  • 승인 2022.04.03 2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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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스포츠Q(큐) 안호근 기자] “사회인 야구에서나 통할 구속”, “야구 선수라고 믿기지 않는 몸매”, “다음 시즌이면 안 통할 것.”

‘느림의 미학’ 유희관(36)을 둘러싼 편견. 선수 생활 내내 잘할 때나 못할 때나 편견과 싸워야 했지만 돌이켜보면 위대한 업적을 쌓은 전설로 우뚝 섰다.

유희관은 3일 오후 2시 서울시 송파구 잠실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 한화 이글스의 2022 신한은행 SOL(쏠) KBO리그(프로야구) 경기 종료 후 은퇴식을 통해 선수 생활을 공식 마무리했다.

두산 선수단이 3일 한화 이글스전 종료 후 열린 은퇴식의 주인공 유희관에게 헹가래를 치고 있다. [사진=두산 베어스 제공]

 

8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통산 101승(69패)을 챙긴 유희관은 두산 프랜차이즈로는 가장 많은 승리를 따낸 좌투수로 이름을 올렸다. 팀 역사를 통틀어도 장호연(109승)에 이어 2번째다.

그러나 다른 100승 투수들과 달리 유희관을 향한 평가는 극명히 갈렸다. 선수 생활 막판 부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다. 2009년 입단해 빛을 발하지 못했던 유희관은 국군체육부대(상무)에서 복무를 마친 뒤인 2013년 더스틴 니퍼트의 결장으로 인해 우연히 잡은 기회를 살렸고 이후 승승장구했다. 그럼에도 그를 향한 평가는 박하기만 했다. 한창 잘 나갈 때도 늘 안 좋은 시선과 싸워야 했다.

최고 시속이 130㎞ 중반도 넘지 못하는 그를 향해 “다음 시즌이면 간파 당할 것”이라는 의심 어린 시선이 쏟아졌지만 유희관은 그렇게 8년을 버텼다.

승수에 비해 높은 평균자책점(ERA, 4.58)은 비판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줬다. 넓은 구장을 안방으로 쓰고 뛰어난 수비이 야수진, 심지어는 심판 콜의 혜택까지. 오직 운으로 만들어진 선수라고 매도하는 이들도 있었다.

경기에 앞서 시구자로 나서 최원준(왼쪽)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유희관. [사진=두산 베어스 제공]

 

물론 운 좋게 한 시즌 10승을 챙길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8시즌 연속 이 같은 성적을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넓은 구장과 뛰어난 수비가 뒷받침되도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성과다. 영리한 경기운영과 리그 톱 수준 제구력이 있기에 이뤄낼 수 있었던 대업이다.

지난 시즌 부진했으나 스트라이크 존 변화로 인해 유희관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럼에도 유희관은 “후배들이 성장하는 걸 보며 이제는 물러나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 1월 은퇴 기자회견 때 한바탕 뜨거운 눈물을 쏟았던 유희관은 이후 다양한 예능프로그램에 등장했고 KBSN스포츠 야구 해설위원으로 변신하며 미련 없이 제2의 삶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날은 또 달랐다. 올 시즌 개막과 함께 육성응원을 제외한 대부분 제한이 풀렸고 많은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다. 개막 2번째 경기인 이날도 1만1345명이 잠실구장을 찾았고 유희관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유희관(가운데)과 오랜 만에 경기장을 찾은 그의 부모님. [사진=두산 베어스 제공/연합뉴스]
유희관(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자신의 유니폼이 담긴 액자를 들고 전풍 두산 베어스 사장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두산 베어스 제공/연합뉴스]

 

‘대투수’의 마지막을 기념하듯 두산은 마운드의 힘으로 한화를 제압했다. “지면 관중들이 열받아서 나갈 수 있다. 반드시 이겨라”라는 주인공의 특명을 받고 나선 선발 최원준은 6이닝 동안 81구만 던지며 한화 타선을 완벽히 틀어막았고 이어 등판한 홍건희, 임창민은 각각 홀드를, 김강률(이상 1이닝)은 세이브를 챙겼다.

야수진도 힘을 냈다. 허경민과 안재석은 믿기지 않는 슈퍼캐치로 실점 위기를 지워냈고 오랜 기간 동고동락했던 김재환은 우측 담장을 넘기는 대포로 선배의 마지막 길을 축복했다. 1-0 두산의 승리.

떠나는 유희관을 위한 승리이기도 했다. 경기 후 김태형 감독은 “은퇴식을 갖는 유희관이 좋은 기운을 준 것 같다”고 말했고 최원준은 “희관이 형이 부담을 많이 줬는데 처음이자 마지막 은퇴식을 앞두고 승리할 수 있어서 기분 좋다”고 했다. 결승 홈런의 주인공 김재환은 “희관이 형의 은퇴식을 기분 좋게 치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기뻐했다.

경기 후 시작된 공식 은퇴식. 평소 마음 졸여 경기장을 찾기 힘들어하셨던 부모님이 그의 마지막에 동행했고 선수들은 일제히 그의 등번호 ‘29’가 새겨진 기념 티셔츠를 입고 특별한 시간을 맞이했다.

은퇴식에서 단상에 선 유희관은 북받쳐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사진=두산 베어스 제공]

 

전광판엔 처음 기회를 잡았던 날씬했던 시절의 그를 비롯한 수많은 활약상, 우승 확정 장면, 배꼽을 잡게 했던 상의 탈의 댄스 세리머니 등 본인에게도, 팬들에게도 행복했던 시절의 영상이 흘러나왔다.

이어 오재원, 김재호, 박세혁, 지금은 팀을 떠난 양의지(NC) 등이 영상으로 등장해 떠나는 그를 격려하고 앞으로의 길을 축복했다. 팬들도 뭉클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이들의 한마디에 동감했고 일부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자마자 스스로 예상한대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던 유희관은 힘겹게 감정을 추스른 뒤 “수백 번, 수천 번 두산 베어스 유희관 선수라는 말을 했는데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속상하고 안타깝고 슬픈 하루”라며 구단 관계자들과 김태형 감독, 코치진, 동료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어 “최강 10번타자 두산 팬 여러분, 잘할 때나 못할 때나 항상 응원과 격려, 질책해 주셔서 더 힘을 내고 야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며 ”여러분 존재 자체가 제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말해도 말해도 부족함이 없는 팬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유희관이 선수로서 마지막으로 오른 잠실구장 마운드에 키스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사진=두산 베어스 제공]
수많은 관중들은 경기 종료 후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유희관(아래 가운데)의 마지막을 끝까지 함께 했다. [사진=두산 베어스 제공]

 

두산 팬들에게도 유희관은 특별한 존재다. 2013년 그의 반등과 함께 두산의 전성기가 시작됐고 이후 3차례나 우승 트로피를 거머쥘 수 있었다.

잠실구장 인근인 송파구 문정동에 살면서 20년 넘게 두산을 응원해 온 최태현(41) 씨는 “유희관 선수는 구속만 보면 사회인 야구에서 잘하는 선수 수준처럼 보이는데 이런 커리어를 쌓은 게 정말 대단하다”며 “은퇴식 소식을 듣고 일부러 오늘 경기장을 찾았다. 은퇴를 하지만 해설 등 방송일을 계속할텐데 두산 선수가 아닌 길도 계속 지켜보며 응원하겠다”고 밝혔다.

유희관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인천에서 먼 발걸음한 김서진(17) 군은 “선수로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뭉클하다. 울컥하기도 했다”며 “당분간은 두산 역사에 이처럼 뛰어난 좌투수가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 앞으로도 그를 쉽게 잊지 못할 것”이라고 떠나는 프랜차이즈 스타에 대한 애틋함을 나타냈다.

“(공이 느린 투수들이) 날 보고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 스트라이크 존도 넓어져서 그걸 잘 이용한다면 느린 공도 다 각광받을 수 있다. 이제 느린공 투수는 제2의 유희관이라고 기사에 나오더라. 느린 공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트렌드를 리그에 제시한 것 같다.“

느린 공으로도 대업을 이룬 프로야구의 이단아. 한국 야구에 거대한 존재감을 남긴 그는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과 자부심으로 아름다운 끝맺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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