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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숙인 정찬성, 볼카노프스키의 특별한 존중 [UFC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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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숙인 정찬성, 볼카노프스키의 특별한 존중 [UFC 273]
  • 안호근 기자
  • 승인 2022.04.11 0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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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안호근 기자] “챔피언이 될 수 없다는 걸 느낀다.”

8년 8개월 만에 다시 타이틀전에 나선 정찬성(37·코리안좀비MMA·AOMG)은 무력감을 느꼈다. 자신감이 넘쳤기에 더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다.

정찬성은 10일(한국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잭슨빌 비스타 베터런스 메모리얼 아레나에서 열린 UFC 273 메인이벤트로 열린 페더급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알렉산더 볼카노프스키(34·호주)에게 4라운드 45초 만에 TKO 패를 당했다.

앞서 은퇴에 대한 생각을 밝히기도 했던 정찬성은 마지막을 암시하는 말까지 남기며 팬들로부터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정찬성이 10일 UFC 273 페더급 챔피언 타이틀전에서 알렉산더 볼카노프스키에 패한 뒤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AFP/연합뉴스]

 

거의 9년 만에 다시 챔피언 타이틀을 노렸다. UFC 등장 후 3연승을 달린 정찬성은 2013년 8월 조제 알도(브라질)를 만났다. 엄청난 맷집과 펀치력, 그래플링 기술까지 두루 갖춘 정찬성은 ‘코리안 좀비’라는 애칭을 얻으며 UFC를 뜨겁게 달궜고 매우 빠르게 타이틀샷을 얻었다.

좋은 경기를 보였으나 어깨가 탈구되며 고개를 숙였다. 이후 수술과 재활, 병역 이행으로 3년 6개월의 공백을 거쳐야 했다.

긴 링러스트(장기간 공백으로 인한 경기감각 저하) 우려가 따랐지만 정찬성은 믿기지 않는 경기력으로 복귀했고 이후 다시 승승장구했다. 브라이언 오르테가(미국)에 패하며 주춤하기도 했으나 다소 운도 따르며 페더급 4위로서 볼카노프스키와 격돌할 기회를 맞았다.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쳤다. 정찬성은 “알도와 대결할 때는 진짜 싸운다는 생각으로 나섰다면 이젠 진짜 스포츠로서 대하게 됐다”며 “당시보다 모든 면에서 더 좋아진 걸 느낀다”고 말했다.

어깨 탈구와 안와골절 등으로 부상이 있었고 30대 중반에 다다른 나이에도 정찬성은 더 완성형 선수로 변모했다. 대회 전마다 찾는 ‘파이트레디’에서 UFC 전 챔피언 헨리 세후도(미국) 등 걸출한 상대들과 훈련했고 최고의 파트너들과 함께 모든 면에서 능력치를 끌어올렸다. 완벽한 경기를 위해 많은 스태프와 훈련캠프 비용 등 많은 지출도 감내했다.

그럼에도 대부분 전문가들은 정찬성의 열세를 예상했다. 페더급 역사에 남을 파이터로 인식됐던 맥스 할로웨이(미국)를 꺾고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고 이후 방어전을 통해 명실상부 1인자임을 재확인한 볼카노프스키가 상대이기 때문. 철저히 계산된 경기를 펼치는 영리한 볼카노프스키를 상대로 정찬성이 파고들 틈이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뒤따랐다.

철저히 준비하고 나선 정찬성(왼쪽)이지만 무결점 파이터 볼카노프스키의 벽은 넘어설 수 없었다. [사진=게티이미지·AFP/연합뉴스]

 

우려는 현실이 됐다. 1라운드 탐색전을 치르면서도 기회가 나면 주먹을 주고 받았는데, 유효타로 인한 충격이 적지 않았다. 2라운드에 나서기 전부터 벌써 출혈이 발생했다. 2라운드도 상황은 마찬가지. 3라운드 물러서는 볼카노프스키를 상대로 더 과감히 주먹을 내며 분위기를 뒤집는 것처럼 보였으나 큰 반전은 없었다. 볼카노프스키의 주먹은 정찬성의 안면을 예리하게 파고들었고 큰 충격의 유효타가 연속으로 꽂혔다. 강력한 펀치에 정찬성이 넘어졌고 파운딩 세례까지 받아야 했다. 라운드 종료 공이 정찬성을 도왔다.

4라운드 시작 전 심판은 정찬성의 상태를 체크했다. 누가보더라도 기운 승부였다. 에디 차 코치도 정찬성에게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정찬성의 답변은 “해야죠.”

4라운드 시작과 함께 볼카노프스키는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경기를 끝내려는 듯 보였다. 결정타를 맞은 건 아니지만 이미 일방적으로 기운 경기에 주심은 경기를 종료시켰다.

경기 후 정찬성은 “어느 때보다도 자신 있고 몸과 상태가 좋았다. 지치지도 않았는데 넘을 수 없는 벽을 느꼈다”며 “경기 지면 그렇지만 언제나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봐야 알겠지만. 내가 더 이상 챔피언이 될 수 없다는 걸 느낀다. 이걸 계속 하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은퇴를 암시하는 씁쓸한 발언.

경기 중에도 많은 팬들은 ‘좀비’를 연호했다. 경기 후에도 퇴장하는 그를 향해 뜨거운 박수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자신에게나 국내 격투기 팬들에게나 모두 아쉬운 결과. 그러나 정찬성의 행보만큼은 박수를 받아야 한다. ‘스턴건’ 김동현(41)이 UFC 13승으로 선구자 역할을 했다면 정찬성은 한국인 파이터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확인시켜주고 가능성을 입증한 선수다. 수많은 강호들을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고 휘청이면서도 다가가는 ‘좀비’의 면모로 한국인의 강함을 세계에 알렸다.

볼카노프스키(왼쪽에서 2번재)는 경기 후 "정찬성은 이 스포츠를 위해 많은 것들을 이룬 전설이다. 그가 타이틀샷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고 존중을 나타냈다. [사진=AP/연합뉴스]

 

8년 8개월 만에 챔피언 재도전이라는 것도 의미가 남다르다. 타이틀전에 다시 나선 선수 중 가장 긴 기간. 선수 생명이 그리 길지 않은 종합격투기 특성을 고려하면 그 기간 동안 정상급 선수로 꾸준히 자리를 지켰다는 것만으로도 박수가 아깝지 않다.

경기 후 볼카노프스키도 정찬성에 대한 특별한 존중을 보였다. 우선 정찬성의 실력보다 자신이 페더급에서 ‘어나더레벨’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내가 다른 레벨에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말해왔다”며 “내가 오늘 한 것처럼 정찬성에게 했던 선수는 없었다. 너무 크게 실망할 필요가 없다. 왜냐면 내가 모든 선수들보다 몇 수 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찬성에 대해 특별한 존중심을 갖고 있다. 이 스포츠를 위해 많은 것들을 이룬 전설이다. 그가 타이틀샷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며 “여전히 정상에 있는 선수다. 매우 공손하고 아주 좋은 선수다. 정찬성은 누구와 싸워도 항상 정상급에 머물 수 있다”고 전했다.

오랜 기간 UFC 선수로 활약하며 힘든 길을 걸어온 정찬성. 막대한 훈련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유튜브 촬영과 방송 출연 등을 했으나 뒤따른 건 비판이었다. 훈련에 집중하지 않고 한 눈을 판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정찬성을 전진하게 했던 건 챔피언을 향한 도전정신 때문이었다. 볼카노프스키를 통해 느낀 챔피언에 오를 수 없다는 좌절감이 정찬성의 행보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 당장 은퇴를 하더라도 누구보다 뜨거운 박수를 받아야 마땅한 한국 격투기계의 전설로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가 어떤 결정을 하든 지지할 것이라는 팬들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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