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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여제' 김가영이 돌린 '3쿠션', 영광과 아픔 그리고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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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여제' 김가영이 돌린 '3쿠션', 영광과 아픔 그리고 도전
  • 민기홍 기자
  • 승인 2014.04.30 0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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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차유람에게만 집중된 관심 때문에 슬럼프 빠지기도

[300자 Tip!] 김가영이 지난 2월 또 국제대회에서 우승했다. 우승 횟수가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정도로 여자 포켓볼에서 김가영이 차지하는 위상은 대단하다. 세계랭킹 1위를 오랫동안 지켜왔고 지금도 늘 상위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오랜 시간 정상권을 유지하는 비결부터 꼭 함께 거론되는 차유람까지. ‘당구여제’와 유쾌한 대화를 나눴다.

[스포츠Q 글 민기홍·사진 이상민 기자] 서울 뚝섬 인근의 당구클럽. 2006 도하아시안게임 포켓볼 남자 국가대표였던 이근재(41)가 운영하는 곳이다. 김가영(31)은 늘 이곳에서 실력을 갈고 닦는다.

김가영은 지난 2월 2014 미국여자프로당구협회(WPBA) 마스터스대회 결승에서 서든데스까지 가는 혈투 끝에 켈리 피셔(영국)를 꺾고 챔피언에 올랐다. 하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많이 보도되지 않고 크게 다뤄지지도 않았다.

▲ 김가영은 여전히 세계 최정상급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우승이 무덤덤하지만 '더 잘칠 걸'이라는 생각을 하는 '악바리녀'다.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며 인터뷰를 시작하자 생글생글 웃으며 “감사합니다”라고 답한다. 마주보고 앉는 순간부터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 “아직까지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다”, 김가영의 행복한 고민

어느덧 서른이 넘었다. 선수 김가영은 은퇴시기를 고민해야 하는 나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직도 늘 최상위권인 성적 때문에 아직 갈피를 못잡고 있다.

“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잘할 줄 몰랐어요. 아직도 성적 유지가 되네요.(웃음)”

김가영은 인천 용현초등학교 4학년 때 당구장을 운영한 아버지로부터 4구와 3쿠션을 배웠다. 당구가 재밌었던 그는 용현여중 1학년 때 포켓볼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천부적인 감각을 바탕으로 두각을 나타낸 그는 인천정보산업고를 졸업하고 대만당구연맹 측의 제안으로 유학을 결심했다. 당구를 더 잘 치겠다는 마음 하나로 2002년 혈혈단신 대만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004년 비로소 그 결실을 봤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컵을 거머쥔 것이다. 2년 후 그는 세계선수권 2연패에 성공했다. 2년에 걸쳐 세계당구협회(WPA) 세계랭킹 1위를 유지했다.

“솔직히 이젠 우승에 큰 감흥은 없는 것 같아요. 근데 우승은 계속 해야겠어요.”

세계적인 선수다운 자신감이다. 세계최강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김가영의 우승 경력을 나열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본인도 몇 번 우승했는지 잘 모른다. 자신감이 대단하다. 세계 최고수에게서 나오는 여유다. 해볼걸 다해봐서 그런지 랭킹 순위도 크게 연연하지 않는단다.

20대의 김가영은 ‘서른 즈음이면 물러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전히 톱클래스를 지키고 있다. 꾸준히 좋은 성적 때문에 은퇴시기를 정하지 못하는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

▲ 김가영은 대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훈련에 할애하고 있다.

그렇다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는 여전히 많은 시간을 훈련에 쏟아붓고 있다. ‘나는 최고다’라는 자기 암시 속에서 기술훈련과 체력훈련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 ‘세계대회 우승하면 뭐하나‘ 슬럼프에 빠졌던 김가영

김가영을 논할 때 꼭 함께 나오는 이름이 있다. 차유람(28)이다. 한국의 당구팬들은 포켓볼 선수 하면 차유람을 먼저 떠올린다. 세계 톱랭커에게도 슬럼프가 있었냐고 묻자 김가영은 과거를 떠올리며 후배를 언급했다.

“2011년에 대만 생활을 접고 들어왔어요. 유람이는 ‘얼짱’으로 스타가 돼 있더라고요. 저는 세계선수권에서 2연패했는데도 기사 한 줄 나지 않았었는데...”

그는 ‘내가 무엇을 위해 큐대를 잡고 있나’라는 생각에 잠겼다고 회상했다. 대만에서는 외국인이라서 찬밥이었다. 그런데 고국에서마저 김가영을 반겨주지 않았다.

“저는 유람이 나이 때 할 수 있는 모든 타이틀을 가졌어요. 마치 유람이가 세계챔피언인 것 같더라고요. 우리나라가, 우리나라 언론이 스포츠를 보는 관점이 이렇구나 하고 느꼈어요.”

▲ 김가영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를 회상하고 있다. 그는 차유람에게만 집중됐던 관심이 내심 서운했다고 고백한다.

김가영은 “이제는 성숙해졌다. 그때는 어렸다”고 말했다. 이어 “이젠 아무렇지 않다. 유람이 보고 당구 좋아해주시면 당구선수인 나로서도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 도전 또 도전, 욕심쟁이 김가영

김가영은 현재 한국체육대학교 4학년 재학생이다. 선배 현지원(40)의 조언이 김가영을 더욱 열심히 공부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당구계에서 이론과 실전을 겸비한 사람이 없다, 네가 그 적임자’라고 후배에게 펜대를 들 것을 적극 권유했다.

당구선수 김가영에게 미지의 세계였던 대학교는 삶의 활력소가 됐다. 오로지 당구만 알았던 김가영은 대학생으로서의 하루하루가 마냥 즐겁다. 대학교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축구 실기시험을 잘 봤다며 자랑도 늘어놓는다.

2012년에는 댄스스포츠에도 도전했다. MBC의 예능 프로그램 ‘댄싱 위드 더 스타’에 나가 과감한 의상을 입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프로그램 초기 가장 서툴렀던 그는 회를 거듭할수록 발전한 퍼포먼스를 보여줘 심사위원들에게서 극찬을 받았다.

▲ 대학생활과 댄스스포츠 경험담을 이야기하자 김가영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그는 “나는 몸치다. 창피만 당할 것 같아 처음에는 고사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당구라는 정적인 운동과 정반대인 댄스에 대한 도전, 특유의 승부욕이 그를 움직였다.

도전을 택한 선택은 신의 한 수가 됐다. 김가영은 “큰 대회를 많이 나가봤어도 그만큼 긴장해 본 적이 없다. 파트너에게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생방송 아니었나”며 극에 달했던 부담감을 설명했다.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부담과 긴장을 이기려는 노력들은 큐를 잡았을 때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우승을 하고도 ‘더 잘치고 우승할 걸’이란 생각을 하는 김가영이다. 학업도, 댄스스포츠도 완벽히 해내려 노력하는 것을 보니 ‘이래서 세계최고구나’라고 느껴졌다.

욕심쟁이 김가영이다.

◆ ‘당구여제’가 당구계에 전하는 메시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인터뷰가 이어졌다. 화통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가던 김가영은 큐스포츠 전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달라지며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당구계는 최근 몇년 사이 전국체전 정식종목 채택, 빌리어드 TV의 개국이라는 겹경사를 맞았다. 김가영은 “당구가 점점 스포츠로 인정받았다는 증거다. 좋은 컨텐츠를 제공할 수 있는 채널이 생겼다”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 김가영은 폭력, 담배가 떠오르는 당구의 안좋은 이미지를 개선하고 싶어한다. 큐스포츠가 좀 더 고급스런 이미지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반면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에서 탈락하는 악재도 있었다. 2006 도하와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2회 연속 은메달을 따내 국가로부터 연금을 수령하고 있는 김가영은 그 누구보다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는 “후배들을 위해서 아시안게임에 반드시 재진입해야 한다. 연맹에서 꼭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당구장 문화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그는 “당구장의 이미지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며 “당구계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주먹이 오가는 곳, 담배연기 자욱한 곳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본인부터 앞장서서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김가영은 “당구는 신체와 두뇌가 절묘하게 수반되야만 하는 스포츠”라고 큐스포츠의 매력을 어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 “누가 실수하지 않느냐의 싸움이다. 긴장되고 짜릿하지 않은가”라고 덧붙였다.

김가영은 “세계 챔피언이라는 타이틀 말고는 아직 당구계를 위해 공헌한 일이 없다”며 “끊임없이 정진하겠다. 내가 걸어온 길들을 후배들이 더 빨리 걸을 수 앞장서 노력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당구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 김가영의 주요 입상 경력은?

1994 세계여자프로당구협회(WPBA) 선정 올해의 선수, 1998 WPBA 선정 올해의 스포츠인물, 2004·2006 세계당구협회(WPA) 나인볼 선수권대회 우승, 2006·2010 아시안게임 여자 개인 8볼 은메달, 2011 WPBA 투어 챔피언십 우승, 2012 여자 10볼 세계선수권 우승, 제93회 전국체육대회 여자 개인 2관왕, 2013·2014 WPBA 마스터스 우승 등이다.

■ 당구 랭킹은? 

세계당구협회(WPA)와 세계여자프로당구협회(WPBA)로 나뉜다. WPA는 아마 랭킹, WPBA는 프로들간에 매겨지는 랭킹이다. 2014년 4월 현재 김가영의 WPA 랭킹은 현재 12위, 프로들간의 랭킹인 WPBA에서는 2위에 올라있다. 참고로 김가영은 "WPA 랭킹은 수시로 바뀌는 것 같다.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 김가영이 추천한다! 유망주 김보건

그녀가 김보건(14)을 극찬했다. 한국 당구계를 이끌어갈 독보적인 유망주라며 자신을 이을 후계자로 김보건을 콕 집었다. 김보건은 중학생이지만 성인 대회에서 함께 뛰고 있다. 김가영은 “독기 있고 야무지고 생각까지 깊다”며 김보건을 치켜세웠다.

[취재 후기] 박태환, 김연아, 박인비, 양학선의 공통점은 한 종목에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선수들이라는 점이다. 여기 한 명 더 김가영을 추가하자. ‘당구여제’에게 “우승 계속 많이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변이 없는한?”이라는 재치있는 답이 돌아왔다. 자신감은 물론이고 센스까지 갖춘 '악바리 여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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