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Q 글 용원중기자·사진 이상민기자] “실감이 나질 않아요. 연락이 뜸했던 선배, 동창들이 전화를 많이 하면서 스코어를 자각하는 중이죠. ‘베를린’ 때는 그런 전화가 오질 않았거든요.”
1000만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날, 강동구 천호동에 있는 영화사 외유내강 집무실에서 만난 강혜정(45) 대표의 얼굴엔 웃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다찌마와 리’(2008)가 망하는 바람에 월세마저 못내 강남 사무실을 빼고 눈물바람으로 둥지를 틀었던 곳이다.
류승완 감독에게도, 그의 아내 강혜정 대표가 이끄는 외유내강 필모그래피 가운데서도 ‘천만 영화’는 처음이다. 처음부터 장밋빛 낙관이 드리워진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 7월1일 크랭크 업한 뒤 무려 3차례나 개봉이 연기(10월- 구정- 5월- 8월5일)됐으며, 외화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의 1주 전 개봉과 톱스타 톰 크루즈의 방한, 민감한 재벌 이야기 등 악재가 도처에 있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이뤄졌을까. 강 대표는 “신나는 공감”을 가장 먼저 꼽았다.
◆ 500만 예상 '베테랑' 개봉 첫 주만에 손익분기점 넘겨 얼떨떨
“성수기인 여름시장의 특수성도 있었겠지만 사회적 공분이랄까 스트레스가 쌓여서 케미컬이 생긴 듯해요. ‘베테랑’이 전 세대가 공감할 만한 영화는 아니라, 개봉 전에는 500만명 정도를 예상했어요. 그런데 첫 주말에 손익분기점(250만명)을 넘겨서 얼떨떨했죠.”
강 대표는 무엇보다 한국영화가 연중 가장 뜨거운 시장을 장악한 점에 고무돼 있었다. 예전부터 7~8월은 ‘외화 시장’, 추석·구정은 ‘한국영화 시장’으로 여겨졌는데 지난해 ‘명량’에 이어 올해 ‘암살’ ‘베테랑’이 이 공식을 뒤집으며 ‘8월은 우리 꺼야’란 자신감을 갖게 된 셈이다.
“한국영화가 연이어 관객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역사적 순간에 있다는 게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뻐요. 영광이고요.”
‘베테랑’은 순제작비 100억원을 훌쩍 넘기는 블록버스터가 아닌 60억원에 불과했음에도 천만 영화에 등극했다. 대형 투자배급사 CJ엔터테인먼트 입장에선 저비용 고효율의 반가운 파트너일 수밖에 없다. 류승완 감독과 외유내강은 CJ와 퍼스트 룩(First Look) 계약을 체결, ‘짝패’ ‘부당거래’ ‘베를린’에 이어 ‘베테랑’까지 연이어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다.
“‘베를린’ 때도 유머가 별로 없었는데 시나리오를 고쳐달란 말이 없었어요. 감독과 작품, 필름메이커에 대한 리스펙트가 확실해요. 재벌의 악행에 응징을 가하는 ‘베테랑’을 대기업인 CJ가 투자배급을 맡는 게 어색했을 법도 한데 의미 있는 작품으로 받아들이고는 긍정적 모니터링을 해줬어요. 고마운 부분이죠.”
◆ '예산·스케줄 준수는 감독의 직업윤리'라 여기는 류승완 마음으로 업어줘
제작자 입장에서 ‘칼 같이’ 거품을 덜어내고 제작 시간을 엄수하는 감독 류승완은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존재다.
“류 감독은 주어진 예산으로 찍고, 약속된 스케줄을 준수하는 게 감독의 직업윤리라고 여겨요. 영화계 입문 후 오랜 기간 조수 생활을 하고, 단편영화를 만들며 빠듯한 예산으로 크리에이티브한 결과물을 만들어와서인지 몸에 뱄어요. 꼭 찍고 싶은 장면이 있을 때는 PD들과 회의를 통해 신중히 결정하고요. 그래서 로스율이 거의 없죠. 현장 편집본과 최종 편집본의 분량 차이가 별반 없어요. 찍고 나서 버릴 거 같으면 아예 안 찍더라고요. 마음으로 업고 다니죠. 후후.”
‘베테랑’ 제작 단계에서 가장 짜릿했던 순간을 캐스팅 당시로 복기한다. ‘부당거래’에서 인연을 맺은 황정민은 ‘국제시장’을 촬영하던 시기라 스케줄에 무리가 많았음에도 ‘콜’을 외쳤다. 오달수 유해진이 속속 합류했다. “진짜야?”라며 반신반의했다. 유아인까지 정해졌을 땐 환희와 흥분이 외유내강을 지배했다. 100억원대 영화에서 모일 수 있는 배우들이 류 감독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로 모인 것이다.
◆ 배우 드림팀 구성에 흥분...유아인 캐스팅 가장 드라마틱
“한 마디로 드림팀이었죠. 특히 청춘 아이콘인 유아인의 합류는 드라마틱했어요. 조태오의 뺀질뺀질함을 다르게 해석해낼 거란 기대가 컸죠. 천진난만한 얼굴인데 눈이 돌아가면 완전히 다른 얼굴이 나오겠다 싶어서 짜릿했고. 중간에 소속사가 바뀐 뒤 미국여행을 떠나서 2개월간 연락이 두절돼 안절부절 했어요. 류 감독이 카톡을 보냈는데 ‘1’이 계속 떠 있어서 씹힌 줄 알고 좌절하기도 했죠. 나중에 알고 봤더니 출연을 결심하고 떠난 거였는데...”
한국으로 돌아온 뒤 드라마 ‘밀회’에 애착을 보여 스케줄을 조정하는 배려를 했고, 유아인은 고마운 마음에 촬영지인 부산에서 출연진과 스태프 회식을 한우로 쐈다. 극중 서도철(황정민)과 조태오가 룸살롱에서 맞닥뜨리는 장면이 첫 촬영 신이었는데 전혀 밀리지 않는 유아인, 유아인이 마음껏 연기하도록 맏형처럼 다 받아주는 황정민의 모습에 감동했다. 두 배우의 빛나는 앙상블은 그렇게 만들어져 갔다.
◆ 운동권 여대생에서 영화인으로 극적 반전...5년 열애 끝 류감독과 결혼
고려대 가정교육과에 입학한 강혜정 대표는 대학시절 운동권 학생이었다.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아 여학생위원회 활동을 했다. 1993년 졸업 후 과외를 하면서 노동현장에 투신할 계획을 벼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거리에서 독립영화협회 전단지 속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란 문구를 보고는 뭔가에 홀린 듯 다이얼을 돌렸다. 사회주의 종주국 소비에트 붕괴 후 운동권 내부는 극심한 방향성의 혼란을 겪던 시기였기에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난 영화로 해보자”란 생각을 품었다.
“독립영화협회 워크숍에서 만난 류승완 감독이 박찬욱 감독에게 부탁을 해서 코아아트홀 전단지 제작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어요. 첫 작품이 뉴질랜드 영화 ‘전사의 후예’(95)였죠. 그러다가 영화방에 입사해 마케팅 업무를 했고, 시네마서비스 김미희 이사가 설립한 좋은영화로 옮겨갔어요. 기획실장을 맡았던 당시 현장을 모르는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그때 김미희 대표께서 프로듀서를 하려면 현장을 알아야 한다며 ‘밀회’ 때 제작부 막내로 발령을 내주셨죠.”
협찬을 받고, 공문을 만들어 돌리고, 현장에 나뒹구는 담배꽁초를 주워가며 몸으로 때웠던 시절이었다. 푸대접에 모멸감을 느끼기도 했으나 영화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임을 배웠던 황금시대이기도 했다. 옆에서 류 감독이 속삭이던 “영화는 노동자의 손으로 만드는 거다”란 말을 몸소 확인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180도 바뀌었다.
5년의 교제 끝에 98년 강혜정 대표와 류승완 감독은 결혼에 골인했다. 각자 영화작업을 하던 두 사람은 2005년 5월7일 영화사를 설립했다. 연애 시절부터 만들어놓은 외유내강(바깥사람은 유씨, 안사람은 강씨란 의미)을 회사명으로 신고했다.
◆ '베테랑' 후반작업 거치며 자신감 회복...다양한 영화제작 시도
“어렸을 땐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란 확신에 찼지만 어느 순간부터 관객 한명 한명이 소중하다는 걸 느끼게 됐어요. 관객을 위해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역량, 영향력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요.”
영화 ‘베테랑’은 '제작자 강혜정'을 바꾼 소중한 작품이기도 하다. 후반작업 시기부터 주체적이고 자신감을 가진 제작자로 전환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전엔 남편을 온전히 직업적 파트너로 보지 않았어요. 컨펌 받으려 했고, 지적 받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있었죠. 직원들의 업무 역시 일일이 내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상한 책임감에 짖눌렸고요. 내가 만든 박스 안에서 섭섭해 하고 괴로워했어요. 그런데 딱 그 시기를 거치면서부터 감독, 배우, 스태프들이 각자의 일을 잘 하게끔 모든 공정의 책임자로 존재하자는 자각이 들더라고요. 만약 그런 변화를 맞지 않았다면 지금도 전전긍긍하고 있을 거예요.”
과거의 실패와 성공이 자신을 제약하지 못하도록 할 만큼 자유로워졌기에 하루하루가 가볍고 신난다. 올해 영화인생 20년을 맞은 강혜정 대표, 창립 10년이 된 외유내강은 멜로영화 2편을 제작한다. 김하늘 주연의 ‘여교사’는 촬영 중이며 박보영 강하늘 주연의 ‘너의 결혼식’은 곧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류승완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구상하고 있다.
“현재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영화를 준비하고 있으며, 언젠간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영화를 꼭 제작해보고 싶어요. 다양한 영화를 만들려고요. 그래야 활력이 넘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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