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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스포츠1994] (4) 3세대 레전드의 AG 시선, 박태환이 부럽고도 안타까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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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스포츠1994] (4) 3세대 레전드의 AG 시선, 박태환이 부럽고도 안타까운 이유
  • 이세영 기자
  • 승인 2014.09.15 1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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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영 세번째 AG 2연패 지상준

케이블채널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94(2013년 10월 18일~12월 28일)’가 지난해 연말 뜨거운 인기를 모았다. 극 중 간간이 보여준 농구대잔치와 프로야구 장면은 스포츠팬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물론 1994년에는 농구대잔치와 프로야구만 인기를 모았던 것은 아니다. 그 해에는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을 비롯해 미국 월드컵과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등 굵직굵직한 국제대회가 넘쳐났다. 여기에 K리그는 물론 배구 슈퍼리그가 스포츠팬들의 시선을 집중케 했다. 그리고 수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팬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다. 그로부터 20년 뒤 그들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시리즈 ‘응답하라 스포츠 1994’가 그들을 만나러 간다. <편집자주>

▲ [그림=스포츠Q 일러스트레이터 신동수] 한국 수영은 역대 아시안게임에서 모두 4명의 레전드가 2연패 신화를 이룩했다. 1970,1974년 '아시아의 물개' 고 조오련, 1982,1986년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 그리고 2006,2010년 '마린보이' 박태환. 그렇다면 1990,1994년 2연속 금빛 물살을 가른 한국수영의 3세대 스타는?

[300자 Tip!] 한국 수영은 10년에 한번씩 스타가 나온다. 박태환(25·단국대대학원)이 유일한 한국 수영의 불세출 스타로 알고 있는 팬들이 적지 않지만 한국 수영 스타 계보는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 '아시아의 물개' 고(故) 조오련을 시작으로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47)가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수영의 스타였다. 그리고 박태환이 2000년대 중후반부터 지금까지 한국 수영의 에이스로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1990년대는? 국내외 굵직굵직한 대회에서 무려 70개의 한국신기록을 세웠고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한 수영스타가 있었다. 바로 지상준(41)이다.

[수원=스포츠Q 이세영 기자] 인천 아시안게임 개막이 나흘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박태환이 전인미답의 아시안게임 3연패를 차지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박태환은 이미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과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통해 3개씩 모두 6개의 금메달을 거둬들였다. 도하 대회때는 200m와 400m, 1500m에서 우승했고 광저우 대회에서는 100m, 200m, 400m에서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역대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선수가 2연패를 달성한 것은 박태환이 처음이 아니다. 2009년에 작고한 고(故) 조오련이 1970년 방콕 대회와 1974년 테헤란 대회에서 자유형 400m와 1500m를 제패한 것이 처음이다.

이어 가수 유현상의 아내로도 유명한 최윤희가 1982년 뉴델리 대회에서 배영 100m와 200m, 개인혼영 200m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1986년 서울 대회에서 배영 100m와 200m 금메달을 따내며 2연패를 달성했다. 지금은 50대를 바라보고 있는 중년 여성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당시만 최윤희의 인기는 '피겨 여왕' 김연아(25·올댓스포츠)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뛰어난 미모로 남성팬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최윤희와 박태환 사이에 또 한 명의 스타가 있으니 바로 지상준이다. 1983년부터 1997년까지 현역으로 뛰며 아시아 수영을 제패했던 지상준은 한국 수영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배영 50m와 100m, 200m에서 모두 한국신기록을 보유했던 지상준은 1990년 베이징 대회와 1994년 히로시마 대회에서 배영 200m 금메달을 연속 따냈다.

1999년에 선수생활을 마감한 뒤에도 지상준은 수영과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2000년 대전동구청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뒤 성남시청 수영팀 코칭스태프로 일하다 소속팀이 해체된 후에는 수영교실을 만들어 장애인 학생을 비롯한 수영 꿈나무들을 가르치고 있다.

▲ [수원=스포츠Q 이세영 기자] 지상준이 수원의 한 피트니스 클럽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상준은 이곳에서 수영 꿈나무들을 육성하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다.

◆ 괴산 촌놈, 수영으로 태극마크 달다

지상준이 본격적으로 수영을 시작한 시기는 운호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83년이었다. 그 전까지 수영이라고는 자신의 고향인 충북 괴산군에 있는 개울가에서 물장구를 치는 게 다였지만 그는 학교에 있는 수영부에 가입하면서 선수로서 수영을 시작했다.

“괴산에는 수영장이 없어서 수영장 훈련을 하기 위해서는 청주 시내까지 나가야만 했어요. 자주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안 되다보니 정상적인 훈련을 많이 하지는 못했죠. 때문에 괴산에 있는 강가에서 훈련을 더 많이 했습니다. 훈련 환경이 열악했어요.”

지상준은 초등학교 때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탓에 나가는 대회마다 예선에서 탈락했던 것. 그러던 지상준이 수영에 눈을 뜨기 시작한 시기는 청주 운호중학교 2학년 때인 1987년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배영에 집중했던 그는 배영에 전념한 지 1년 만에 전국대회에서 입상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나간 소년체전에서 처음으로 2등을 했어요. 그리고 국가대표 초년인 중학교 3학년 때 제 기록은 전국 10위권이었습니다. 그때가 1988년 10월이었는데, 5개월 정도 훈련한 뒤 1989년 3월에 배영 100m에서 처음으로 한국 신기록을 세웠어요. 그때부터 기록이 점점 좋아졌습니다.”

급속도로 성장세를 보인 지상준은 운호중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8년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10년간의 태릉선수촌 생활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감독님, 코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니 선수촌 생활이 힘들다거나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과 단절돼 있다는 것을 인식하니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지상준은 1년 중 11개월을 태릉선수촌에서 보냈다. 특히 충북체육고등학교 때부터는 외부에서 선생님이 선수촌으로 들어와 수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선수촌 밖으로 나갈 일이 거의 없었다. 한국체육대학교 입학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태릉선수촌의 하루는 훈련의 연속이었다. 새벽 4시30분에 일어난 뒤 아침 7시까지 새벽훈련을 하고 오전 수업을 소화한 뒤에는 웨이트 트레이닝과 수영훈련을 반복했다. 방학 때는 새벽, 오전, 오후, 저녁으로 나누어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했다.

지상준은 웃으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훈련량이 정말 많았어요. 하루에 수영한 거리가 25km정도 됐으니까요. 말이 25km지 엄청난 거리거든요. 그래서 훈련을 하다가 힘들어서 그만 둔 친구들이 많았어요. 막상 시간이 지나고 당시를 떠올려보니 그때는 어떻게 훈련을 했는지 모르겠네요.”

▲ 1994년 히로시아 아시안게임 출전 당시 지상준. 당시 그는 배영 200m에서 2분00초65를 기록하며 일본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사진=지상준 제공]

◆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우승은 페이스 조절의 승리

지상준이 처음으로 출전한 아시안게임은 1990년 베이징 대회였다. 당시 지상준은 개최국 중국이 40개 메달 중 32개를 독식한 상황에서 자신의 주종목인 배영 200m로 당당히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2년 뒤인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배영 200m에서 전체 29위를 기록하며 세계무대에서 가능성을 확인한 그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당시 배영 200m 아시아 신기록(1분59초49)을 가지고 있던 라이벌 이토이 하지메(일본)를 0.69초차로 제치고 2분00초65를 기록, 1위로 들어왔다.

조오련(1970, 1974년)과 최윤희(1982, 1986년)에 이어 한국선수 가운데 3번째로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한 것이다.

예선에서 어느 정도의 기록이 나오면 결승에 진출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지상준은 무리한 레이스를 펼치지 않았고 무난히 결승에 올랐다.

지상준은 결승에서 2번 레이스를, 이토이는 7번 레이스를 배정받았다. 지상준은 당시 결승을 이렇게 기억했다.

“이토이가 저보다는 개인 기록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1990년, 1994년 아시안게임에서는 제가 그 선수를 제치고 우승했습니다. 히로시마 대회 때 초반 레이스는 이토이가 저보다 앞섰어요. 저는 50m지점에서는 4위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150m 지점부터 스퍼트를 내면서 이토이를 앞질렀고 그 뒤로 역전을 허용하지 않았어요. 배영은 수영할 땐 옆 레인밖에 안 보이지만 턴 할 때는 물속에서 다 보여요. 그때 페이스 조절을 했던 거죠.”

이후 지상준의 행보는 탄탄대로였다. 그는 1995년 8월 후쿠오카 유니버시아드 남자 배영 200m 결승에서 2분01초19로 1위를 차지하며 한국 수영사상 최초로 세계규모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는 기염을 토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해 12월 새한미디어 수영팀에 입단한 지상준은 이듬해 아시아선수권 배영 200m에서도 라이벌 이토이를 제치고 2분02초10을 기록, 우승을 차지했다.

지상준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한국 신기록을 적어도 70개 정도 세웠을 거예요. 한 대회에서 5개를 기록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때는 국내에서 저를 넘어선 선수가 없었어요.”

▲ [수원=스포츠Q 이세영 기자] 지상준(왼쪽에서 두번째)이 자신이 지도하는 학생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시대를 잘못 탔다는 생각해본 적 있어"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았던 기량이 1997년을 기점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1997년 동아시아대회에서 3위에 그친 것이 그 시작이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13위를 기록하며 아시아 대회에 대한 희망을 이어간 지상준은 1997년 동아시아대회 배영 200m 결승에서 2분02초75로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1위를 차지한 중국의 후 용에 2초02 뒤진 기록이었다.

그해 열린 시칠리아 유니버시아드에서 배영 200m 3위, 범태평양대회 배영 200m에서 8위에 머무른 지상준은 1997년 12월 소속팀에 사표를 낸 뒤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1997년 이후로 기록이 생각한 대로 나오지 않더라고요. 그때 제가 스물다섯 살이었는데 그 당시 기준으로 그 나이면 수영선수로 황혼기나 다름없는 나이였습니다. 더 이상 기록이 향상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던 거죠.”

이후 2년 뒤인 1999년 11월 박석기 전 수영대표팀 감독의 지도 아래 현역으로 복귀했지만 이전과 같은 실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박태환이 인천 아시안게임을 통해 3연패를 노리고 있는 같은 나이인 25세에 지상준은 현역 은퇴를 선택했다.

지상준은 15년 동안 선수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아쉬운 점에 대해서도 털어놨다.

“한국 수영은 아시안게임을 포함한 국제대회에서 꾸준히 메달을 따면서 국위선양을 했는데 그에 비해 협회나 다른 단체들의 지원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지금도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갖춘 박태환이 제대로 지원을 못 받고 있는 상황이죠. 그리고 은퇴 후에도 지도자나 다른 길로 나갈 수 있게끔 도와줘야하는데 전혀 그런 게 마련돼 있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러면서 지상준은 자신이 시대를 잘못 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말했다. 박태환이 시대가 요구한 스타였던 반면 자신은 운동할 때 전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는 것.

“기업에서 후원을 해준다거나 협회에서 전담팀을 꾸리도록 허락해준다는 것은 제가 선수로 활동했을 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주변 환경이 조금만 더 좋았다면 더 오랫동안 현역으로 뛸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 게 아쉬움으로 남아요.”

비록 자신의 선수생활은 아쉬움 속에 끝났지만 지상준은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 배영에 출전하는 임태정(19·안양시청)과 박선관(24·대전시체육회)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지금 선수촌에서 막바지 훈련 중일텐데 끝까지 잘 마무리하길 바라고, 레이스를 할 때는 도착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후회하지 않는 경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뒤에서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취재후기]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스포츠 영웅들이 은퇴 후 사회에서 자리 잡지 못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다. 이는 비단 1990년대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많은 선수들이 현역에서 물러난 뒤 방황하고 있으며 때로는 범법자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들이 은퇴 후에도 자신의 재능을 의미 있게 쓸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제 더 이상 스포츠 영웅들이 쓸쓸한 말로를 맞는 일은 없어야 한다.

syl015@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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