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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인터뷰] 이호정 '피겨판 오뚝이'(上) 넘어져도 일어서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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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인터뷰] 이호정 '피겨판 오뚝이'(上) 넘어져도 일어서면 돼
  • 김의겸 기자
  • 승인 2020.03.27 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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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스포츠Q(큐) 글 김의겸·사진 손힘찬 기자] ‘두려움은 두고 가/떨지 마 감지 말고 두 눈 뜨고 가/넘어져도 일어서면 돼/부끄러워 마.’

2012년 발매된 프라이머리의 ‘3호선 매봉역’이라는 곡의 가사다. 어린 나이부터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이호정(23) SBS 피겨스케이팅 해설위원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문득 이 같은 가사가 절로 떠오른다.

최근 유영(16·수리고), 차준환(19·고려대) 등 ‘여왕’ 김연아(30·은퇴)를 보고 꿈을 키운 이른바 ‘연아 키즈(Kids)’가 세계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이 달 중순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여파로 세계피겨선수권대회가 취소됐을 때 가장 아쉬워했던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이호정 해설위원이다.

일찍이 참는 데 도가 텄던 아이는 선수로서 신던 스케이트는 벗었지만 여전히 빙판 위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현재는 지도자이자 해설위원으로 후배들을 격려 중인 이호정 해설위원. 만 23세, 그가 걸어온 나날들은 단지 ‘길지 않다’는 이유로 ‘풋풋하다’고만 치부하기는 어려웠다. 

실로 피겨라는 종목이 그렇다. 넘어지면 털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험난한 과정의 연속이다. 숱하게 넘어졌지만 꿋꿋이 일어서 밝게 웃고 있는 이호정 해설위원,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호정 SBS 피겨스케이팅 해설위원은 일찍이 스케이트에 재능을 보였다.

◆ 참는 데 도가 텄던 아이

이호정 해설위원은 본인이 생각해도 스케이트에 재능이 있었다. 유치원 때 체육프로그램 중 하나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탔는데 선생님이 선수로 추천했다. 그는 “대회만 나갔다하면 다른 아이들을 한 바퀴씩 잡으면서 이겼다. 스피드스케이팅보다 덜 위험해 보이는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하게 됐는데 시키는 대로 바로 늘어 흥미를 느꼈다”고 회상한다. 

선수를 해보라고 제안한 코치가 바로 김연아를 가르쳤던 김세열 코치. 이 해설위원은 초등학교 1, 2학년 때 이미 선수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렸을 때는 정말 스케이트만 보고 살았다”는 그다.

“초등학교 때 스케이트를 타면서도 항상 전교 1등을 했다. 국회의원 상도 받고, 영재 교육 제안도 받았다. 어머니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고 했다. 다시 태어나면 어머니는 공부를 시킬 거라 한다. 워낙 힘든 운동이고, 장비며 대관이며 비용도 상당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태어나도 춤이나 운동 등 예체능 쪽으로 가고 싶다.” 야무지기 그지없다.  

이호정 해설위원은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국가대표가 됐다. 태릉선수촌에서 대표팀 훈련에 참여하고, 끝나면 개인 팀에서 운동했다. 지금만큼 체계적인 훈련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던 때다. 요령 피우지 않고 시키면 곧이곧대로 따르는 모범생이었기 때문일까. 가장 화려하게 비상하던 때 큰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2007년 '김연아 장학금'을 받았던 이호정(오른쪽 두 번째) 해설위원. [사진=연합뉴스]
2011 세계주니어피겨선수권대회 출전 당시. [사진=연합뉴스]

“당시에는 코치가 타라고 하면 무조건 타야 했던 시기다. 한 쪽 발목이 부러져 다른 한 발로만 스케이트를 탄 적도 있다. 어렸을 때 잘하다 부상을 겪으면서 싱글 선수로서 바닥을 쳤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관리가 잘 안됐다. 뼈가 다 자라기 전 과부하에 걸린 셈이다. 모래주머니 3~4kg를 차고 계단 6칸을 뛰기도 하고, 나보다 무거운 친구를 업고 뛰기도 했으니 지상 훈련도 무식하게 했다”고 떠올렸다. 

큰 대회를 가장 많이 나갔던 2010~2011시즌 도중 발목뼈가 부러졌는데, 그 상태로 시즌을 거의 다 치러냈다. “환부를 냉각하고, 진통제를 먹고, 주사를 놓고 경기했다. 제대로 걷기 힘들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아픈 걸 참고 하는 걸로 유명했다. 지금은 왜 그랬을까 싶다”며 “어린 나이에 견디는 게 익숙해졌고, 몸이 소위 맛이 갔다. 시키는 대로 요령 없이 열심히 했다. 오히려 요령 피웠던 애들이 롱런했다”고 말하며 웃는 그의 미소 이면에 당시의 마음고생이 묻어났다.

2010년 9월 주니어 그랑프리 일본 대회에 나갔는데 밖에서는 잘 걷지 못할 정도였다. 발만 디뎌도 눈물이 났고, 공식 연습도 제대로 못 탈 만큼 아팠다. 부상 때문에 이례적으로 어머니가 대회에 동행했는데, 통증을 견디면서 타야 하는 상황에 어머니도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시즌 두 차례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각각 9. 6위를 차지하며 좋은 성적을 냈으니 전성기 때 가장 큰 부상으로 날개가 꺾인 셈이다.

그는 2010~2011시즌 그랑프리 2회에 출전한 데 이어 김해진이 부상당하자 대타로 주니어세계선수권도 나가게 됐다. 김해진 대체 선수로 이름을 올렸던 그가 참가하지 않으면 한국 대표팀 티켓이 모두 날아가는 상황이 되다보니 수술을 계속 미루게 됐다. 

“최고의 성적은 아니었지만 버티면서 하다 보니 그런 대로 성적이 나왔다”는 그는 그 시즌 이후 두 차례 수술을 거쳐 복귀하기까지 1년 가까이 걸렸다.

어려서부터 마음 고생, 몸 고생을 많이 해서일까. 나이보다 어른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 시련 또 시련

“다른 선수들에 비해 일이 많긴 했다. 또래에서 아픈 것 하면 이호정이었다. 안 아파 본 데가 없다. 어머니도 관련 지식이 전문가에 준한다. 그만 두고 쉬는 게 답이었지만 생각처럼 잘 안됐다. 뼛조각이 신경을 건드리면 더 이상 걷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수술을 결정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때는 매 순간 후회 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선택들을 한 것이다.”

수술 당시 국가대표였던 그는 대표팀에서 재활했다. 피겨 특성 상 한창 성장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이호정 해설위원은 “복귀했을 때 다들 ‘인간 승리’라고 했다. 걷는 법을 까먹을 만큼 큰 부상이었고, 아직도 큰 흉터가 남아있다. 스케이트는 발이 생명인데 걷는 것, 서는 것부터 재활하면서 다시 트리플 루프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트리플 플립, 럿츠는 찍는 동작이라 충격이 센 탓인지 발목이 버텨주지 못했다”고 그 때를 씁쓸하게 기억했다. 

무엇보다 힘든 건 홀로 정체된 듯한 기분이었다. “(김)해진이나 (박)소연이 같은 친구들은 한창 늘어 국제대회도 나가고 아이스 쇼도 하는데, 나는 기초부터 하고 있으니 이를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주위로부터 ‘빨리 올라와야 한다’는 압박도 받았고, 개인 팀이 아닌 대표팀에서 훈련해 경쟁자들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봤던 때라 힘들었다. 그 친구들은 2014 소치 올림픽까지 나갔다. 지나고 보면 그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싱글 선수로서 하락세를 걷던 그는 좋은 기회에 아이스댄싱으로 전향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댄스가 하고 싶었던 그가 다시 올림픽을 꿈꾸게 된 것이다. 감강인과 팀을 결성했다. 2015년 첫 출전한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덜컥 4위를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2017년 2월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에서 4위에 오르며 가능성을 보였다.

2017년 4대륙 피겨선수권대회에 출전했던 이호정(왼쪽)과 감강인. [사진=연합뉴스]
올림픽 출전의 꿈을 다시 접게 됐다. [사진=스포츠Q DB]

하지만 돌연 팀을 해체하게 됐다. 두 번째 시련이 찾아온 것이다. “올림픽을 위해 다음 시즌 음악을 고르고 있었는데 결별 통보를 받았다. 아시안게임 때 성적은 좋았지만 사실 사이는 가장 좋지 않았다. 훈련 스타일과 성격이 많이 달랐고, 의견 차도 컸다”면서 “그 때 배운 게 많다”고 담담히 말했다.

평창 올림픽을 1년도 채 남기지 않은 시점 팀 해체는 사실상 그에게 은퇴나 마찬가지였다. 꿈에 그리던 올림픽 무대를 바라보며 버텨왔지만 당시 이호정 해설위원은 이미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몹시 지쳐있었다. 

“우리나라에 남자 선수가 많지 않기도 했다. 다른 귀화 파트너를 만난다고 바로 대회에 나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좋은 파트너를 만나는 게 참 쉽지 않다. 캐나다에서 혼자 지내면서 평창을 목표로 훈련 중이던 때다. 이후 쉽게 다시 도전하지 못했다. 물론 지치기도 했다.”

“당시 운 좋게 세계 최고의 코치진과 함께하게 됐다. 아이스댄싱을 하려고 홀로 캐나다에서 집을 구해 타지 생활을 했다. 너무 많이 힘들었다. 연맹이나 외국 팀에서 아이스댄싱을 계속 해보자는 제안도 많이 받았다. 댄스를 워낙 좋아해서 욕심났지만 외국에서 훈련하는 비용도 컸고, 다시 어머니께 ‘하고 싶다’고 말하기 쉽지 않았다”며 은퇴 배경을 설명했다. 그렇게 평창 올림픽도 포기하게 됐다.

[SQ인터뷰] 이호정 ‘피겨판 오뚝이’(下)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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