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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스타 지금은] (1) '유도 명인' 전기영, 非주류에서 飛주류로 인생 업어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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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스타 지금은] (1) '유도 명인' 전기영, 非주류에서 飛주류로 인생 업어치기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5.09.16 1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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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한국 최초 'IJF 명예의 전당' 헌액…비 용인대 출신 첫 용인대 교수로 '제2의 인생'

[편집자주] 올해는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가 창립한지 95년이 되는 해다. 어느덧 한국 스포츠도 100년의 역사를 바라보게 됐다. 그 역사만큼이나 한국 스포츠에는 수많은 레전드가 있다. 올림픽과 각종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등에서 정상에 오른 메달리스트도 있고 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한국 스포츠 페이지의 한 역사를 장식한 전설도 있다. 감동의 도전으로 한국 스포츠의 위상을 높이고 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줬던 그 시절 그 스타들이 은퇴 이후 어떤 인생을 개척해 어떻게 오늘을 살아가는지 따라잡기 해본다.

[200자 Tip!] 자신의 종목에서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는 것은 자신의 업적과 명성을 전세계적으로 인정받고 평가받는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그 종목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인물로 영원히 남게 된다. 지난달 24일 국제유도연맹(IJF)의 주최로 열린 명예의 전당 행사에 한국인이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1990년대 한국 유도의 전성시대를 이끌었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도 시원스러운 업어치기로 세계를 제패했던 인물, 그리고 지금은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는 전기영(42) 용인대 교수다.

▲ 전기영은 시원스러운 업어치기로 1990년대 세계 유도를 지배했다. 그리고 유도에서 쌓은 업적으로 유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그러나 그가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까지는 비주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용인=스포츠Q 글 박상현·사진 이상민 기자] 고등학교 때부터 전국대회 6관왕에 오르며 최강으로 군림했던 전기영은 1993년 2월 파리 오픈에서 윤동식을 꺾고 금메달을 획득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어 7월 대표선발전에서 김병주, 윤동식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1993년 세계선수권에서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요시다 히데히코(일본)를 업어치기 절반으로 물리쳐 약관에 생애 첫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전기영은 2년마다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3연패를 달성했다.

역시 가장 화려한 업적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이다. 1회전에서 마르크 후이징가(네덜란드)를 상대로 판정승을 거둔 것을 제외하고 결승전까지 모두 한판승을 거둬 강인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1999년 한국마사회에서 은퇴했으니 그의 대표 생활은 6년 정도였다. 현역 생활은 짧았지만 적지 않은 유도 팬들은 전기영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그야말로 '업어치기의 달인'이었다.

이미 전기영은 1999년 IJF에서 명예의 전당 창설 얘기가 있었을 때부터 강력한 후보였다. 그만큼 전기영의 현역 업적은 짧고도 굵었다. 그리고 얘기가 나온지 16년 만에 드디어 유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유도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됐다.

▲ 오늘의 전기영은 용인대 유도지도학과 교수 겸 학과장으로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다. 그러나 전 교수는 한국 유도계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용인대를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실력 하나만으로 비용인대 출신으로 용인대 교수가 되는 기록을 남겼다.

◆ 비주류였던 전기영, 이젠 주류에서 세계 유도를 이끈다

전기영은 비주류였지만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온 결과 지금은 주류의 중심이 됐다.

청주 교동초등학교에서 처음 유도를 접한 전기영은 청석고 2학년 때 전국체전에서 우승한 것을 시작으로 3학년 때까지 6관왕을 달성했다. 그러나 전기영은 한국 유도의 '주류'라는 용인대에 진학하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 당시 청석고 교사로 전기영을 지도했던 강형원 충북유도회 명예회장이 용인대 진학을 적극 권유했지만 전기영은 경기대를 택했다.

"많은 선배들이 '네 자유분방한 스타일이면 용인대에서 두 달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둔다고 나올 것'이라며 겁을 줬어요. 어린 마음에 잔뜩 겁을 먹고 경기대로 진학했죠. 제가 경기대로 가는 바람에 강형원 선생님과 관계가 많이 소원해지긴 했지만 당시 제 결정에는 크게 후회하지 않아요."

전기영이 이후 세계선수권 3연패에 두 체급 석권까지 이뤄내고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냈으면서도 현역 생활을 일찌감치 마감했다. 이 역시 이유가 있었다.

"평소 강형원 선생님께서 유도를 하게 되면 꼭 공부를 하고 교수가 되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한국마사회에 있으면서 1998년에 석사과정을 마치긴 했지만 계속 선수로 뛰면서 박사과정 공부를 하기는 무리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현역 생활을 접었죠. 일본 유학을 떠나 공부를 한 덕분에 '한일 유도 코치의 지도행동인식과 선수만족도의 차이'라는 박사 논문을 완성시킬 수 있었죠."

▲ 20세에 처음으로 출전한 세계선수권에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꺾고 금메달을 따낸 이후 1997년까지 3연패를 달성했다. 또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러나 1993년 세계선수권 대표로 뽑힌 이후 1999년 은퇴하기까지 그의 대표선수 생활은 6년에 그쳤다. 전기영의 현역 생활은 이처럼 짧고도 굵다.

2004년 경기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기영은 이듬해 용인대 교수로 임용됐다. 비용인대 출신으로 용인대 교수가 된 첫 사례였다. 당시 용인대 총장이었던 김정행 대한체육회 회장이 "전기영처럼 유도에서 훌륭한 업적을 이뤄냈던 선수 출신으로 박사학위까지 땄는데 용인대, 비용인대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전격 임용했다.

"김정행 회장의 전향적인 자세도 있었지만 그 뒤에는 강형원 선생님의 적극 추천도 있었죠. 용인대 출신이셨던 강형원 선생님께서 제가 경기대에 진학했을 때는 많이 서운해하셨지만 제가 교수로 임용됐을 때 많이 밀어주셨어요. 대학 진학 때 서먹했던 것도 지금은 하나의 추억일 뿐이죠."

'교수님'이 된 전기영은 유도지도학과 학과장이다. 비용인대 출신이지만 용인대 유도를 이끄는 리더가 된 셈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일본, 지금은 유럽세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 유도계에서 전기영의 존재감은 비주류라는 한국 유도의 한계를 훨씬 넘어선다. 이제 명예의 전당에 헌액까지 됐으니 더더욱 그렇다.

"제가 현역 생활은 짧았지만 그동안 세계 유도계를 위해 열심히 뛰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유도인이자 대학교수로서 후배들과 후학들에게 제 경험을 전수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체코나 이탈리아, 산마리노 등으로 나가 유도 강습회를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거든요. 또 IJF의 스포츠 커미셔너로 일하면서 지난해 덴마크, 영국, 홍콩, 카자흐스탄에서 세미나를 열기도 했어요. 세계 유도 발전에 모든 것을 쏟는 노력을 인정받은 것이 아닌가 싶어요."

▲ 전기영 교수가 용인대 자신의 연구실에서 국제유도연맹으로부터 받은 명예의 전당 헌액 액자를 들어보이고 있다. 한국 선수로 유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것은 전 교수가 최초이자 유일하다.

◆ 비주류의 고단한 삶, 실력으로 깨다

지금은 주류의 중심에서 추억을 회상할 수 있지만 그가 선택한 경기대에서 시작한 비주류의 삶은 참으로 고단했다. 용인대 편향적인 한국 유도계와 1990년대만 하더라도 일본에 유리하게 판정을 내렸던 세계 유도계에서 경쟁해야만 했다.

"대학 때 경기에 나서면 구설수가 참 많았죠.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제가 대학 재학했을 때만 해도 용인대 선수에게 관대한 판정 때문에 시비가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 선수를 던져서 이기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제게 업어치기라는 주무기가 있었고 그것 하나면 판정 시비 없이 정정당당하게 이길 수 있었어요."

전기영이 '업어치기의 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보면 비주류였기 때문에 더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좌우 업어치기를 연마하며 중학교 입학 시절 '물건이 나타났다'는 평가를 들었던 전기영이었다.

이후 대표 선발전에서 약관의 나이에 대선배들을 이겨내고 세계선수권과 올림픽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도 비주류로서 주류를 이기는 방법을 일찌감치 터득했기에 가능했다. 판정으로 가게 될 경우 자칫 판정 시비로 휘말릴 수 있으니 이를 아예 사전차단하기 위해 그 전에 한판이나 절반 등 확실한 기술로 압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기영이 요시다를 두 차례 꺾은 것도 저돌적인 자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993년 세계선수권에 처음으로 나가 금메달을 따냈을 당시 요시다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다. 전기영은 '져도 본전'이라는 생각에 거침없이 몰아붙였고 종료 20초 정도를 남기고 자신의 주특기인 왼쪽 업어치기로 절반을 뽑아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 전기영이 용인대에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것을 축하하는 현수막 앞에서 유도학과 및 유도경기지도학과 제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2년 뒤 일본 지바 세계선수권에서도 86kg으로 체급을 올려 요시다와 다시 만났다. 요시다와 접전을 벌인 전기영은 종료 2분 정도를 남기고 소매 업어치기에 이어 소매 밭다리걸기로 연달아 기술을 걸어 한판승을 거뒀다.

저돌적인 자세는 지금 현재 유도의 흐름과 잘 맞는다는 것이 전기영의 설명이다. 재미가 없고 팬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하면 올림픽에서 퇴출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세계 유도의 규정도 위장 공격 등에 대해서는 단호하다는 것이다.

"태권도만 하더라도 재미없는 경기가 계속 돼 퇴출 얘기가 나오니까 규정을 바꿔서 좀 더 박진감있는 경기로 만들어냈잖아요. 유도라고 다를 것은 없죠. 지금 유럽세가 확실하게 지배하고 있는 유도이기 때문에 조금 더 공격적인 경기를 요구하죠. 그래야만 유도가 더 재미있어지니까요. 한국 선수들이 이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내년 올림픽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봐요."

◆ 명예의 전당 헌액 그 이후, 전기영의 삶은

어느덧 불혹을 넘어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는 전기영 교수에게 딱 하나 후회되는 것이 있다면 현역 은퇴로 시드니 올림픽에 나가지 않은 것이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만 하더라도 겨우 27세에 불과했고 1997년 파리 세계선수권에서도 금메달을 따낸 그였기에 올림픽 출전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시드니 올림픽 유도 대표팀 사령탑이 '간접 사제지간'인 박종학 감독(청주대 교수)였기에 올림픽 2연패를 차지한다면 좋은 시나리오가 될 수 있었다.

"그동안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해왔지만 그래도 박종학 감독님께는 죄송하죠. 직접 저를 가르치시진 않았지만 제가 중학생일 때는 청석고 감독이셨고 청석고에 다닐 때는 청주대 감독이셨으니 항상 인사드리고 함께 훈련을 했었던 간접 사제지간이었으니까요. 제가 시드니 올림픽에 나갔으면 의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만들 수 있었는데 아쉽죠. 게다가 당시 시드니 올림픽에서 금메달 하나 따내지 못했으니까요(은 2, 동 3)."

▲ 전기영 교수는 40 평생을 살아오면서 후회할만한 길을 걸어오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다만 간접 사제지간인 박종학 감독과 함께 시드니 올림픽에 나가지 못한 것은 하나 아쉬운 부분이라고 말한다.

시드니 올림픽에 나가지 않은 것을 제외한다면 전기영은 결코 후회할만한 길을 걸어오지 않았다. 자신의 선택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했고 그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에 책임을 졌기 때문이다. 후회없는 삶은 결국 그를 명예의 전당으로 이끌었다.

명예의 전당에 올랐지만 그의 유도가(家), 유도 명인(名人)로서 인생은 아직 진행형이다. 전기영 교수는 조금 이른 나이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는 생각은 들지만 앞으로 더욱 세계 유도를 위해 힘써달라는 의미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국과 세계 유도계에서 할 일은 아직 많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더 많은 일을 해달라고 저를 명예의 전당에 올려놓은 것이 아닌가 싶어요(웃음). 지금은 유도를 가르치고 있는 지도자가 됐지만 이제는 인생도 함께 가르치는 유도인이 되려고 해요. 예로 시작해서 예로 끝난다는 '예시예종'의 유도 정신을 일깨워주고 싶어요. 인성과 실력을 모두 겸비한 후학들을 많이 길러내고 싶습니다."

■ 전기영 프로필

△ 생년월일 = 1973년 7월 11일
△ 출생지 = 충북 청주
△ 출신학교 = 교동초-대성중-청석고-경기대-경기대 교육대학원(석사)-경기대 대학원(박사)
△ 실업팀 경력 = 한국마사회(1995~1999)-다이코로(1999)
△ 수상 경력
- 1993년 해밀턴 세계선수권 78kg급 금메달
- 1995년 뉴델리 아시아선수권 86kg급 금메달
- 1995년 지바 세계선수권 86kg급 금메달
-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86kg급 금메달
- 1997년 파리 세계선수권 86kg급 금메달
- 1996년 호치민 아시아선수권 86kg급 동메달
- 2015년 국제유도연맹 명예의 전당 헌액
△ 주요 경력
- 1996년 경찰청 명예경찰관
- 2005년~ 용인대학교 유도경기지도학과 교수
-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유도 국가대표팀 코치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유도 국가대표팀 코치
- 2012년 싱가포르 유도 국가대표팀 감독

[취재후기] 어느 사회를 보더라도 '줄'이라는 것이 있다. 잘 나가는 사람의 줄만 잘타면 승승장구할 수 있다는 것이 상식인 시대다.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전기영 교수는 그 줄을 잘 타지 못한 경우다. 용인대가 아닌 경기대를 갔다는 이유로 스승과 소원해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실력으로 이겨냈고 이젠 주류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스포츠 현장은 아직까지 실력과 능력만 인정받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으니 아직까지는 건강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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