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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스타 지금은] (3) 올림픽 첫 골든펜서 김영호, 펜싱클럽으로 '인생 2막' 꿈은 영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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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스타 지금은] (3) 올림픽 첫 골든펜서 김영호, 펜싱클럽으로 '인생 2막' 꿈은 영글고!
  • 민기홍 기자
  • 승인 2015.11.02 1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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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시드니올림픽 금메달 '펜싱장인', 로터스클럽서 아이비리그 진학과 저변확대 이끄는 사업가 변신

[200자 Tip!] 2000년 시드니. 아시아인이 104년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펜싱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대이변이 일어났다. 그것도 펜싱의 꽃인 남자 플뢰레에서. 흰옷 입고 칼 찌르는 생소한 종목이던 펜싱이 효자 종목으로 거듭나기 시작한 건 그 때부터였다. 15점째를 알리는 버저가 울리자 피스트에 무릎을 꿇고 포효하던 김영호(44). '골든 펜서' 그가 없었다면 한국 펜싱은 여전히 변방일지도 모른다. 15년이 흐른 현재 그는 펜싱클럽의 상무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생활체육 저변 확대에 앞장서는 김영호 감독은 펜싱뿐 아니라 체육계를 향해서도 의미있는 메시지를 던지는 금메달리스트 사업가로 변신했다.

[한남동=스포츠Q 글 민기홍·사진 최대성 기자]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은 양궁 남녀 단체전과 윤미진, 레슬링 심권호, 태권도 김경훈, 정재은, 이선희 그리고 펜싱 김영호까지 총 8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 김영호 감독은 태릉선수촌에서 지도자 생활을 접고 2008년 12월부터 로러스펜싱클럽 상무이사로 인생 2막을 열었다.

올림픽 금메달의 영광이야 모두 짜릿하지만 그중에서도 김영호의 금메달은 특히 더 감동적이었다. 양궁, 레슬링, 태권도야 아시안게임, 올림픽마다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하는 효자 종목이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펜싱은 메이저 대회에선 들러리 종목이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주상복합 건물에 자리잡은 로러스펜싱클럽. 다이어트 펜싱 모집 광고가 보인다. 30평 남짓한 공간에 피스트 3개가 깔려 있는데 기자의 눈을 사로잡는 건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 휘장이다.

김영호의 직함은 상무이사. “상무로 부르는 게 낫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냥 감독이라 불러달라”며 활짝 웃더니 벽을 가리키며 “좋은 곳에 넷이나 보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김영호 감독의 이야기는 체육계에 전하는 울림이 크다.

◆ 명문대생의 펜싱 선생님, 김영호 

“20대 후반 때죠. 유럽의 펜싱 클럽에 갔는데 정말 잘 하는 선수가 있더라고요. 알고 보니까 국가대표래요. 충격이었죠. 그 친구들은 우리처럼 태릉선수촌같은 곳에 모여 훈련하는 게 아닌 겁니다. 일반 클럽에서 국가대표가 뛸 수 있는 환경. 펜싱이 개인종목이니까 가능하거든요. 그 때부터 언젠가는 펜싱클럽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딴 금메달을 목에 걸고 웃고 있는 김영호 감독. 아시아인이 올림픽에서 따낸 첫 펜싱 금메달이었다.

2003년 20년간의 현역 생활을 마치고 은퇴한 김영호는 당시 소속팀이던 대전도시개발공사 코치를 시작으로 국가대표 남자, 여자 플뢰레 코치를 지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고심을 거듭한 끝에 태릉선수촌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평소 꿈꾸던 펜싱클럽을 만드는데 도움을 줄 사업 파트너를 만난 것.

“2007년 우연히 정규영 대표를 만나게 됐어요. 스탠포드대를 졸업한 사업가입니다. 스포츠의 중요성을 잘 아시더라고요. 펜싱에 정말 관심이 많으시더군요. 신사도 그런 신사가 없습니다. 돈은 내가 알아서 벌테니 학생들을 가르쳐달라고 하시는 겁니다. 겁이 났죠. 왜 안 났겠어요. 대표팀에서 지도자 생활 계속하면 되는데요. 고민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시기의 문제더라고요. 언젠가는 할 일이었어요. 좋은 분을 만나 앞당겨진거죠.”

로러스펜싱클럽은 우수한 일반 학생들이 미국 명문대에 입학하는데 펜싱을 주특기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반대로 엘리트 펜싱선수가 특기자로 아이비리그에 진학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입학 후에는 미국대학스포츠(NCAA) 선수로 성장하는 과정까지 관리, 감독해 끈끈한 관계를 유지한다. 펜싱 유학 컨설팅 회사인 셈이다.

로러스펜싱클럽은 올해 이도형(콜럼비아대), 강종우(프린스턴대), 손정재(노틀담대), 조재준(공군사관학교) 등을 배출했다. 2009년 학생선수 차유진(브라운대)을 시작으로 2013년 이래나(예일대) 등 매년 4~5명의 아이비리그 입학생을 길러내고 있다.

정규영 대표는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한국 체육계를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김영호 감독은 “공부만 해서는 미국 학생들을 이길 수 없다.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하려면 운동을 통해 리더십, 적응력을 배양해야 한다”며 “귀족들이 술을 곁들이면서 풍류로 즐기는 스포츠, 전신을 활용하면서 동시에 머리도 써야 하는 펜싱이야말로 학생들이 명문 학교로 진학하는데 가장 좋은 종목”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김영호 감독은 '공부하는 선수, 운동하는 학생' 캠페인에 앞장서며 펜싱 저변 확대를 외치고 있다.

◆ '공부하는 선수, 운동하는 학생' 길러내는 김영호 

로러스펜싱클럽과 김영호 감독이 단순히 ‘유학컨설팅’만 하는 것은 아니다. 스포츠 선진국 미국의 사례를 통해 어떻게 해야 체육이 보다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지를 연구하고 있다. 김영호 감독은 “엘리트 선수들은 공부를, 일반 학생들은 운동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로러스펜싱클럽은 2008년 12월 설립 때부터 '공부하는 선수, 운동하는 학생'이라는 슬로건의 캠페인을 진행해오고 있다. 2011년부터는 매년 미국의 대학생들을 초청해 한미대학펜싱선수권(KUEFI) 대회를 개최했다. 1회 부산, 2회 인천, 3회 제주, 4회 송도 대회에 이어 5회 대회는 강원도 양양에서 열렸다.

김영호 감독은 “단순한 대회가 아니다. 명문대를 나온 이들이 함께 한 자리에 모여 묵으면서 네트워킹을 할 것 아닌가. 한국 졸업생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사회 지도층이 돼 후진을 양성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라며 “우리가 벌이는 이 캠페인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국 체육계에 전하는 바가 있다”고 말했다.

▲ 김영호 감독이 재직하는 로러스펜싱클럽은 2011년부터 매년 한미대학선수권대회를 개최해 학생들의 네트워킹을 유도하고 있다.

엘리트 스포츠와 생활체육을 잘라 구분지었던 그도 이런 활동을 통해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귀띔한다. 김영호 감독은 “선수였던 난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 통합 작업에 처음엔 반대했지만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다”며 “통합이 되면 운동선수들도 할 수 있는 게 많아진다. 어느 지역에서든 합종연횡이 가능한 것 아닌가. 금메달 딴다고 체육선진국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펜싱 다이어트 프로그램, 취미반 등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김영호 감독은 “여력만 된다면 더 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김영호 감독의 절친한 동갑내기 친구이자 로러스클럽 설립 멤버인 1998 방콕 아시안게임 여자 에페 금메달리스트 고정선은 경기도 안양에서 펜싱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펜싱도 생활체육 종목 중 하나로 점차 입지를 굳혀가고 있는 것이다.

◆ 천상 검객, 타고난 펜싱인 김영호 

인터뷰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김영호 감독은 “다른 사람들이 평생 한 펜싱, 일로도 하는 데 지겹지도 않냐고 하는데 그럴 때마다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 난다”고 했다. 스트레스 받으면 머리 아프고 신경질만 나지 고민해 무엇하겠느냐며, 한 평생 펜싱과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란다. 다시 태어나도 무조건 펜싱이고 플뢰레라니, 하늘이 내린 펜싱인이다.

칼은 그에게 운명이었다. 육상부 중거리 선수였던 그는 충남 논산 연산중 1학년 때 펜싱부를 보고서는 펜서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김영호 감독은 “대나무로 칼싸움을 했는데 학교에서 진짜 칼을 들고 하는 것 아닌가. 어찌나 멋진 일이냐”며 “어머님이 3개월 동안 칼싸움 좀 그만하라고 뜯어말리셨다. 그거 해서 뭐 먹고 살거냐고 그러셨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배꼽을 잡게 하는 일화 하나 더. 시골에서 윗동네 아랫동네로 나뉘어 전쟁놀이를 하곤 했는데 어느날 바위에서 돌칼을 발견한 적이 있단다. 그런데 그 칼이 불국사에 전시된 문화재에 버금갈 정도였다니. 쉽게 믿을 순 없지만. 그는 “국가에서 빼앗아 갈까봐 말도 못 한다. 국보급 돌칼”이라며 “그런걸 보면 펜싱과 나는 정말로 운명인가 보다”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내도 딸도 펜싱인이다. 충남기계공고 1학년 때 우연히 체육관에서 만난 ‘첫사랑’ 김영아(43) 씨가 김영호 감독의 반려자. 역시 펜싱 국가대표를 지냈던 김 씨는 1996년 결혼과 동시에 은퇴했고 4년 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배우자가 됐다. 장남 동수(16) 군의 동생 기연(14) 양은 성남여중에서 플뢰레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지난 6월 소년체전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땄다. 부전여전이다.

행복하단다. 낙천적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김영호 감독은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라 그런지 가르치기만 하면 2,3가지를 알아듣는다. 그러니 재밌어 죽겠지 않겠느냐”며 “모래도 쥐면 다 빠져나가는데 억지로 시켜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즐기면서 운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치들에게도 지도법에 대한 이야기도 일절 하지 않는다고.

▲ 김영호에게 칼, 펜싱은 운명이다. 그는 "펜싱과 한 평생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라며 "삶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마냥 좋은 사람 같아보이지만 운동과 타협은 절대 없었던 그다. 1997년 남아공 세계선수권대회 결승 당시 쥐가 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옷핀으로 계속 찔러 도북을 붉게 물들이고선 끝까지 싸웠다. 1998 방콕 아시안게임 직후 기흉으로 7개월 공백 진단을 받고선 가슴에 구멍 세 곳을 뚫는 수술을 받고 단 일주일 만에 태릉에 복귀했던 '악바리'였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사업을 하는 김영호다. 마냥 웃는 것 같지만 안 되면 되게 할 근성이 있는 김영호다. 한국 체육에 ‘공부하는 선수, 운동하는 학생’ 시스템이 완전히 자리잡는 그날까지 김영호 감독은 쉴 새 없이 움직일 것이다. 언젠가는 꼭 실업팀 선수도 신경쓰겠다니 보통 욕심이 아니다. 역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레전드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 김영호 프로필

△ 생년월일 = 1971년 4월 9일
△ 출생지 = 충남 논산
△ 출신학교 = 연산중-충남기계공고-대전대
△ 수상 경력
-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
- 1994년 체육포장 수상
- 1997년 케이프타운 세계선수권 개인전 은메달
- 1997년 백상체육대상 개인부문 수상
-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개인전 은메달
- 1999년 서울 세계선수권 개인전 동메달
-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인전 금메달
- 2001년 코카콜라 체육대상 최우수선수상 수상
- 2001년 대한민국체육상 경기분야 수상
- 2001년 백상체육대상 개인부문 수상

- 2006년 체육훈장 청룡장
△ 주요 경력
-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펜싱 국가대표팀 코치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펜싱 국가대표팀 코치
- 2008년~ 로러스펜싱클럽 총감독
- 현재 한국대학펜싱연맹 부회장, 대한펜싱협회 이사

[취재 후기] 2012 런던 올림픽,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연방 애국가를 울려대던 펜싱대표팀이 심상치 않다. 리우 올림픽이 1년도 남지 않았는데 세계선수권, 월드컵에서 메달 소식이 끊겨버렸다. 김영호 감독은 태릉의 지도자, 선수들이 분발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엘리트 선수들과 몸만 떨어져 있을 뿐 마음만은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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