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22:11 (금)
한일통산 300세이브 대기록 뛰어넘는 '창용불패'의 도전
상태바
한일통산 300세이브 대기록 뛰어넘는 '창용불패'의 도전
  • 이재훈 기자
  • 승인 2014.05.04 22: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많은 시련과 좌절 딛고 대기록 달성

[스포츠Q 이재훈 기자] ‘창용불패’ 임창용(38·삼성 라이온즈)이 꿈에 그리던 한·일 통산 300세이브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임창용은 4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2014 한국야쿠르트 세븐 프로야구 NC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 4-3으로 앞선 9회 마운드에 올라 선두 타자 손시헌(35)을 중견수 뜬공으로 처리한 뒤 박정준(31)과 오정복(29)을 각각 중견수 플라이, 2루 땅볼로 제압하며 한·일 통산 300세이브 달성에 성공했다.한국에서 172세이브, 일본에서 128세이브를 기록했다.

임창용의 이번 기록은 선동렬(52) 현 KIA감독도 선수시절 달성 못한 대위업이다. 일본선수로는 ‘대마신’ 사사키 가즈히로(46·현 야구 평론가)가 시애틀 매리너스 소속이던 2001년 8월2일 디트로이트와의 경기에서 미·일 통산 300세이브를 달성했을 뿐이다.

그동안 길고 긴 길을 돌아 이 자리에 온 임창용은 끝없는 도전 의지를 숨길 수가 없었다. 그는 이날 경기 후 방송 인터뷰에서 “한일 통산 기록이라 300세이브가 내게 큰 의미는 없다. 앞으로 국내에서 300세이브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임창용의 이러한 도전 정신은 이후 인터뷰에서도 드러났다. 임창용은 이날 “평소 타자들이 ‘임창용하면 직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 변화구를 많이 던지려고 노력했다”며 변함없는 '창용불패'의 위력은 도전과 변화였음을 드러냈다.

사실 임창용에게 있어 ‘도전과 변화’는 늘 따라다니는 단어였다. 광주 진흥고를 졸업하고 1995년 해태에 입단했을 때부터 그는 도전자였다. 그의 앞엔 선동렬이란 거인이 있었고 마무리를 맡아온 선동렬이 1996년 일본 주니치로 진출한 뒤에는 해태 왕조의 뒷문을 잠궈야 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럼에도 임창용은 1997년 불펜과 마무리를 오가며 135이닝 동안 14승 8패 25세이브 2.33의 평균자책점의 성적으로 ‘창용불패’라는 별명을 얻으며 해태의 통산 9번째 한국시리즈 제패에 일조했다.

1998년 삼성으로 트레이드된 뒤, 임창용은 불펜과 마무리를 오가며 맹활약해 3년 연속 30세이브 이상의 위업을 이뤘다. 이런 임창용에게 당시 생긴 별명은 삼성 휴대폰 모델명과 같은 ‘애니콜’이었다.

이후 임창용은 선발로 보직을 전환한 뒤 2001년부터 3시즌 동안 두자릿수 승수를 달성하며 펄펄 날았고, 다시 마무리로 복직한 2004년 36세이브로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랬던 임창용에게도 시련이 왔다. 2005년 시즌 후에 그는 팔꿈치 수술울 받았다. 그간 팀을 위해 선발, 불펜을 가리지 않고 뛰었던 탓에 탈이 난 것이다. 2006년 말 복귀했으나 2007년 그는 5승7패 3홀드, 평균자책점 4.90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이며 은퇴기로에 서게 됐다.

이에 임창용은 자신의 처지를 변화시키기 위한 도전을 선택했고, 고작 2년 1500만엔이라는 헐값에 일본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하며 새로운 무대에서의 도전을 택했다.

도전을 택했던 임창용의 행보는 성공적이었다. 야쿠르트에서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다섯 시즌을 뛰면서 11승 13패 128세이브를 올리며 ‘미스터 제로’의 위용을 과시했다.

특히 2008년 야쿠르트의 주전 마무리였던 이가라시 료타(34) 대신 마무리를 맡아 33세이브를 올렸고, 주전 마무리로 시즌을 시작한 2009년 5승 4패 28세이브를 기록해 소속팀을 A클래스(1~3위)에 올려놓으며 가을야구 무대를 밟는데 일조했다.

특히 구속은 한국무대에서 보다 무려 10km가 오른 구속 160km(일본야구사상 3번째로 빠른 구속)를 기록하며 팔꿈치 수술의 성공적인 사례이자 인간승리를 보여주기도 했다.

임창용의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전에 또 다시 ‘팔꿈치 수술’이라는 시련이 찾아왔다. 보통 두 번째 수술을 받으면 오랜 기간 재활로 인해 은퇴를 선언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무대인 메이저리그에 도전했고, 결국 2012년 말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으며 미국 땅을 밟았다. 물론 결과적으로 이 도전은 ‘실패’로 끝났고, 결국 임창용은 전 소속팀 삼성과 5억원에 입단을 채결했다.

▲ 임창용(가운데)이 지난 3월 26일 경북 경산볼파크에서 삼성과 연봉 5억원에 별도 인센티브가 포함된 조건으로 1년 계약을 맺고 7년만에 한국 프로야구에 복귀했다. 임창용이 삼성과 입단 계약을 맺은 뒤 김인 사장(왼쪽), 송삼봉 단장(오른쪽)과 손을 맞잡고 있다. [사진=스포츠Q DB]

한국으로 복귀한 임창용은 담담했다. 오히려 “미국에서 재활을 더 잘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좋은 경험이었고 복귀해서 좋은 성적이 나온 것 같다”고 말하는 등 미국에서의 실패를 새옹지마로 삼았음을 밝혔다.

물론 임창용에게 국내무대는 만만히 볼 곳은 아니었다. 본인도 “타자들도 7년 전보다 많이 변한 것 같다. 파워 컨택면에서 지금보다 더 나아진 듯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끊임없는 변화와 도전이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것이다.

임창용은 이날 인터뷰에서도 “오승환의 기록(한국프로야구 277세이브)를 넘어 300세이브를 하는 것이 목표”라며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 그가 보여줄 ‘창용불패’의 도전은 언제까지 계속될지 궁금해진다.

steelheart@sportsq.co.kr

도전과 열정, 위로와 영감 그리고 스포츠큐(Q)


주요기사
포토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