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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주목 않는 여자 럭비, '희망만은 주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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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주목 않는 여자 럭비, '희망만은 주목해 주세요!'
  • 민기홍 기자
  • 승인 2014.05.13 10:1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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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팀 하나뿐, 아시안게임 1승 찍고 리우 올림픽 도약 노리는 여자 럭비대표팀

[300자 Tip!] 럭비가 온 국민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IMF 외환위기 사태로 어려움을 겪던 1998년, 한국 럭비는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아시아 최강 일본을 꺾으며 감동 신화를 썼다. 남자 럭비대표팀은 ‘아무도 그들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라는 제목의 공익 광고까지 출연하며 럭비를 알렸다. 이제 여자 럭비대표팀이 그때 그 우승 신화를 쓰는데 중심에 섰던 용환명 감독의 지휘 아래 감동 스토리를 이으려 한다. 그들은 한국 여성스포츠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다음 주자를 자처하고 있다.

[수원=스포츠Q 글 민기홍·사진 이상민 기자] 7인제 여자 럭비대표팀이 훈련하고 있는 수원여자대학교. 아담한 캠퍼스 가운데 위치한 잔디 운동장에서 파란 옷을 입은 여자 럭비대표팀이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 여자 럭비대표팀이 수원여대 운동장에서 아시안게임 1승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검은 바람막이를 입은 사나이가 멀찌감치 떨어져 날카로운 눈으로 선수들의 훈련을 주시하고 있다. 한국 여자 럭비대표팀 용환명(42) 감독이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팔짱을 풀고 반갑게 맞는다.

“보시면 알겠죠? 아직 한참 멀었어요.”

용환명 감독이 미소를 지으며 건넨 말이다. 용 감독은 올해 초 여자 럭비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연세대-상무-삼성중공업으로 이어지는 럭비 엘리트 코스를 거친 그는 2010년 은퇴한 후 중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다 조국의 부름을 받고 한국땅을 다시 밟았다.

한국 남자 럭비는 1998년 방콕과 2002년 부산에서 2회 연속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6년 도하 은메달, 2010 광저우 동메달까지 획득하며 아시아의 강호로 올라선 반면 한국 여자 럭비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의 말처럼 공을 주고받는 선수들 중에 동작이 어설퍼 보이는 선수들이 꽤 눈에 띄었다. 이유를 물었다.

▲ 용환명 감독이 훈련 도중 선수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아직은 '걸음마' 수준, "지켜봐달라"

“이제 소집됐어요. 걸음마 수준입니다. 물론 아시안게임 1승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대표팀 아니, 대표팀 상비군은 지난달 4일 소집됐다. 지난 3월 29일 고려대 안암 캠퍼스에서 열린 대표팀 선발전에서 8명을 발탁했다. 기존에 함께 했던 선수들을 포함해 현재 18명이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 나가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이진욱(38) 코치도 같은 생각이다. 그는 “이제 소집된 지 한 달 남짓 됐을 뿐”이라며 “주장도 두 달 가량을 지켜본 후 선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럭비는 남자가 하기에도 거친 운동이다. 훈련 도중 크고 작은 부상 위험이 늘 따른다.

코칭스태프의 말대로 훈련은 기본기 위주의 기초체력 훈련이 주를 이뤘다. 선수들은 볼을 다루는 훈련보다는 부지런히 몸을 놀리며 근력과 근지구력을 높이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용 감독은 “기초체력이 없는 선수들을 데리고 이 시점에 볼 훈련을 시키면 모두 드러누울 것”이라며 “현재로서는 즐기고 참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 이진욱 코치는 지도자뿐 아니라 스카우트 역할까지 해내고 있다.

◆ 여자 럭비대표팀, 그들은 누구인가

여자 럭비대표팀 구성원은 누구일까.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한국 여자 럭비의 시작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2009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남녀 7인제 럭비를 채택하자 대한럭비협회가 나서 여자 럭비대표팀을 꾸렸다. 기자, PD, 대학생 등이 모인 대표팀은 3개월 연습 후 나간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239점을 내주며 6전 전패했다.

이번 멤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다수가 휴학중인 대학생이다. 고등학생도 섞여 있다. 축구, 태권도, 육상 등 다른 종목을 하다가 전환한 경우가 다수인데 간혹 럭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른 채 단순히 재미있어 보여 지원한 이들도 있다.

때문에 선수들간의 기량도 천차만별이다. 대표팀의 맏언니 최민정(23)의 경우 외국인 클럽에서 15인제 럭비를 숱하게 경험한 반면 팀 합류가 불과 열흘밖에 안 된 선수도 있다. 당연히 아직 럭비 룰도 숙지하지 못한 상태다.

▲ 대표팀 선수들이 '패싱 맨투맨' 훈련을 소화하고 있다.

용 감독은 아시안게임 최종 엔트리인 12명을 추리더라도 나머지 선수들을 훈련 때 꾸준히 안고 갈 생각이다. 부상이 많은 종목 특성상 끝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는데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표팀에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용 감독은 “경기력이 좋았던 선수들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많이 떠나갔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며 “가진 자원들을 최대한 잘 활용해 팀을 꾸려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학팀이 2개만 더 생겨도 대표팀 구성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소집을 해도 실전 감각이 없는 상태”라고 덧붙였다.

남자 럭비가 연세대, 고려대, 단국대, 경희대로 구성된 1부 리그에다 서울대, 세한대, 원광대 등이 참여하는 2부 리그까지 운영되는 것에 반해 여자 럭비팀은 지난 3월 창단한 수원여대 한 팀뿐이다. 중,고교 팀은 전무하다. 그들이 수원여대를 훈련 장소로 선택한 이유다.

수원여대의 감독이 바로 대표팀 이진욱 코치다. 국내 최초의 여자럭비팀 창단은 그가 발벗고 나서지 않았다면 요원했던 일이었다. 그는 지도자뿐 아니라 뛰는 것에 최적화된 축구나 육상 선수들을 눈여겨봤다가 럭비로의 전환을 권유하는 스카우트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 올림픽 종목 럭비, '우리의 목표는 2016 리우올림픽'

그렇다면 이들의 현실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2016 리우데자이네루 올림픽과 2019 하노이 아시안게임이다.

럭비는 1924년 이후 92년만에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널리 알려진 럭비는 15인제인데 반해 올림픽에 진입한 종목은 7인제 럭비다. 전,후반 7분과 휴식시간 1분으로 경기시간이 단 15분인 7인제 럭비가 스포츠팬들의 이목을 끌기에 더 적합하다는 판단에서였다. 15인제 럭비는 전,후반 40분, 휴식시간 10분이다.

▲ 대표팀 선수들은 힘든 훈련 과정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용 감독과 이 코치는 바로 2016 리우 올림픽을 바라보고 플랜을 세웠다. 현재 아시아에 배정된 올림픽 진출 티켓 1.5장을 따내기 위한 여정은 결코 만만치 않다. 그 시작으로 가장 먼저 대표팀의 시스템 정착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용 감독은 “여태껏 대표팀은 모이면 쳇바퀴 돌 듯 또 기초체력 훈련을 시작해야했다”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장기 합숙을 늘릴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스포츠 재활 박사기도 한 이 코치 역시 “그동안의 대표팀은 시스템을 갖출 수 없는 환경이었다”며 “기초 체력부터 확실하고 탄탄하게 다질 생각이다. 수원여대라는 팀도 생긴만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용 감독은 1998년 방콕과 2002년 부산에서 아시안게임 연속 금메달, 이 코치는 2002년에 아시안게임 2관왕(7인제·15인제)을 경험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체득한 아시아챔피언의 노하우와 승리 DNA를 전수하기 위해 훈련 중에도 선수들과 함께 뛰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들 코칭스태프는 한 목소리로 “한국 여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라며 핸드볼·축구·하키 등 태극낭자들이 일궈낸 신화를 언급했다. 이 코치는 “한국 여성 특유의 승부욕이 럭비와 잘 맞는다”며 “투지와 근성이 있는 친구들이 많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대한럭비협회는 지난 3월 여성 수장을 맞았다. 새로 부임한 박윤경 회장은 여자 럭비에 애정을 보이며 여러 지원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 현재 대표팀의 훈련은 기초체력 보완에 중점을 두고 진행되고 있다.

다만 용 감독은 “하지만 여기서 더 늦어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시스템을 갖추고 지속성을 보완해 대표팀의 경쟁력을 끌어 올릴 것”이라고 다짐했다.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던 대표팀은 오는 8월 아시아시리즈에, 9월에는 아시안게임, 10월에는 상하이  국제대회에 연이어 출전해 감각을 끌어올린다.

◆ "손가락 부상쯤이야", 럭비를 사랑하는 여자들

대표팀 선수들은 “럭비 왜하나”는 말을 달고 산다. 그들은 ‘럭비는 남 신경쓰면 절대 못하는 종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 왼쪽부터 정시윤, 서미지, 이주연. 셋은 "대표팀 분위기가 정말 좋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어느덧 대표팀의 중고참급이 된 서미지(23)는 2012년 럭비를 하다 다쳐 오른쪽 발목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다. 그는 “재활을 하는데도 럭비를 못하면 안될텐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단다.

서미지는 “여러 명이 뭉쳐서 목표 하나를 이루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며 “아직 단 한 번도 머리에 그렸던 플레이를 해본 적이 없다. 이번 대표팀과 호흡을 맞춰 반드시 이뤄낼 것”이라는 각오를 밝혔다.

정시윤(19)은 럭비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대표팀 2년차인 그는 “처음에는 단지 호기심에 발을 들였다. 선수가 모이기도 힘들었던 지난해와는 달리 지금은 제대로 된 훈련을 하는 것 같다. 분위기도 최고조”라고 들뜬 마음을 전했다.

막내 이주연(18)은 대표팀에 들어온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고교생이다. 이 코치는 400m 육상선수였던 그를 눈여겨 보고 대표팀에 합류시켰다. 그는 “언니들이 길을 열어주며 뛰라고 하는게 고맙다. 전에는 럭비가 ‘무식한 운동’이라고 생각했는데 매력이 넘치는 종목”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주연은 “아버지가 젊었을 때 펜싱을 하셨다. 꿈이었던 국가대표를 못해본 한을 내 덕에 푸신다”며 태극마크에 대한 자부심도 드러냈다.

▲ 채성은(왼쪽)은 럭비를 하며 손가락, 허리, 갈비뼈까지 다쳐봤다. 최수현도 발목을 다쳤다.

2010년 당시 막내로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던 채성은(21)은 손가락 부상으로 훈련 대열에서 이탈해 홀로 몸을 풀고 있었다. 그는 “이정도 쯤이야 가벼운 부상”이라고 웃어넘기며 “갈비뼈 두 개가 나갔는데 그것도 모르고 경기를 뛴 적도 있다”라는 일화를 무덤덤하게 전했다. 훈련 중 발목이 돌아갔다는 최수현(19)도 “이 정도 다치는 거야 각오가 돼있죠”라고 아무렇지 않게 거들었다.

원래 축구를 했다는 채성은은 “럭비를 해보니 축구가 재미가 없어지더라”며 “허리디스크가 왔는데도 미련이 남더라. 럭비를 버리지 못하겠다”며 진한 애정을 나타냈다.

■ 여자 럭비대표팀은

▲ 여자 럭비대표팀. 대표팀은 2년 후를 내다보며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

용환명 감독, 이진욱 코치가 이끄는 한국 여자럭비대표팀은 성혜란 트레이너, 정시윤 정혜수 이애리 한은호 임재원 백예영 김동리 서보희 최민정 채성은 서미지 최예슬 이서현 이지수 최수현 이주연 박혜연 임은지 허경희 등으로 구성돼 있다.

[취재 후기] 훈련을 마친 후 이어진 단체사진 촬영. “요정 이리와”라는 농담이 오고 가며 웃음꽃이 피었다. 화목한 분위기 속에 저마다 멋지게 나오겠다며 다양한 포즈 아이디어를 냈다. 용 감독과 이 코치가 그린 큰 그림 속에서 대표팀이 한 곳을 바라보고 달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은 멀었다’는 그들의 말대로 실력은 다소 부족해 보였지만 자부심, 각오, 태도만큼은 대표팀다웠다. 태극낭자들의 감동 스토리를 이을 다음 주자가 럭비 대표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sportsfactory@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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