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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록담(談)] 故 글렌 프레이, '운명적 만남' 돈 헨리와 이끈 '이글스'의 도전과 비상...'Take It Easy'에서 'Hotel California' 거쳐 'I Dreamed There Was No War'로 긴 여정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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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록담(談)] 故 글렌 프레이, '운명적 만남' 돈 헨리와 이끈 '이글스'의 도전과 비상...'Take It Easy'에서 'Hotel California' 거쳐 'I Dreamed There Was No War'로 긴 여정 마무리
  • 류수근 기자
  • 승인 2016.01.21 12: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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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큐) 류수근 기자] ‘파인(fine)’ 보이스와  ‘허스키(husky)’ 보이스. 글렌 프레이와 돈 헨리는 이글스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쌍두마차였지만 보이스 컬러는 극명하게 달랐다. 솔로 활동을 포함해 깨끗한 음색의 글렌 프레이보다 돈 헨리의 음색에서 파워풀하고 록적인 성향이 더 느껴졌다. 우리나라 팬들 대부분이 ‘이글스’하면 떠올리는 대표곡 ‘호텔 캘리포니아(Hotel California)’도 돈 헨리가 드럼을 치며 리드 보컬을 맡았고 글렌 프레이는 기타와 백보컬을 담당했다.

강경한 록 팬들 가운데는 다소 연성 이미지의 글렌 프레이(Glenn Frey, 1948.11.6~2016.1.18)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도 그의 매력 중의 하나였다. 그는 묘한 매력의 소유자였고 팀을 이끈 리더 격인 존재였다

돈 헨리 "글렌은 점화플러그 같은 존재였다"

돈 헨리는 글렌 프레이의 사망에 붙인 조사에서 “글렌은 그 모든 것을 시작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점화플러그(spark plug) 같은 존재였고, 계획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파퓰러 뮤직에 대한 백과사전식 지식을 가졌고 멈출 줄 모르는 근면성을 지녔다. 그는 유쾌했고(funny) 고집스러웠으며(bullheaded), 활달했고(mercurial) 너그러웠으며(generous), 깊은 재능을 지녔고 의욕이 넘쳤다”고 글렌 프레이를 회상했다.

프레이는 다재다능한 뮤지션이었다. 보컬은 물론 기타, 드럼, 피아노에도 능했고 싱어송라이터였다. 어느 분야든 초일류라고 평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평범함까지도 맞닿는 듯한 비범함으로 대중에게 깊고 친근하게 다가왔다.

글렌 프레이는 1948년 11월 6일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시에서 출생했다. 5세 때는 피아노를 쳤고 후에 기타로 바꿨다. 1960년대 중반 디트로이트 록신의 일원이 됐다. 디트로이트 시절에는 나중에 지역을 대표하는 로커가 되는 봅 시거(Bob Seger)와 밴드를 만들었다. 20세 때인 1968년, 봅시거의 싱글 ‘램블링 갬블링 맨’(Ramblin′ Gamblin′ Man)에서 어쿠스틱 기타와 백보컬로 직업 레코딩을 처음 경험했다.

J.D 사우더와 잭슨 브라운의 만남 '가야할 길을 보다'

글렌 프레이는 1960년대 말 LA로 이주한다. 아이러닉하게도 음악적인 꿈을 쫓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자친구인 가수지망생 조안 슬리윈을 쫓아서였다. 여자친구와의 관계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지만 LA행은 그가 뮤지션으로서 본격적인 첫발을 내딛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LA에서 알게 된, 같은 디트로이트 출신의 제이 디 사우더(John David Souther)와 잭슨 브라운(Jackson Browne)과 함께 지내며 뮤지션으로서 성공의 기회를 잡았다. 후에, 두 뮤지션과의 만남은 글렌 프레이와 이글스의 음악여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제이 디 사우더는 글렌 프레이를 LA로 향하게 만든 여자친구의 언니(알렉산더 슬리윈)와 사귀는 사이였다.

글렌 프레이는 사우더와 함께 ‘롱브랜치 페니위슬’(Longbranch Pennywhistle)이라는 듀오를 결성했고, 1969년에는 음반도 발매했다. 이 기간에 위대한 싱어송라이터 중 한 명인 잭슨 브라운도 만났다. 브라운, 프레이, 사우더 셋은 당시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하지만 롱브랜치 페니위슬의 데뷔 앨범은 전혀 호응을 얻지 못했고 듀오는 곧 해산됐다. 프레이는 나중에 당시 브라운이 아랫집에서 노래하는 것을 들은 것이 곡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회상했다.

린다 론스태드 "글렌은 머지않아 큰 인물이 될 사람이라 생각"

그후 직업 없이 소일한 프레이는 1971년이 돼서야 비로소 인기 여가수 린다 론스태드(Linda Ronstadt, 11차례 그래미상 수상)의 백밴드로 안정을 되찾았다. 그 전해인 1970년, 프레이는 드러머 돈 헨리를 만났다.

린다 론스태드는 남자친구인 제이 디 사우더의 조언으로 글렌 프레이, 돈 헨리, 랜디 마이즈너, 버니 리던을 백밴드로 고용했다. 린다 론스태드는 글렌 프레이에 대한 첫인상을 “머지 않아 큰 물건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

이후 글렌 프레이는 백밴드 동료인 돈 헨리(Don Henley), 버니 리던(Bernie Leadon), 랜디 마이즈너(Randy Meisner)와 의기투합해 밴드 ‘이글스’(Eagles)를 구성하고 린다 론스태드로부터 독립해 어사일럼 레코드와 계약했다. 글렌 프레이는 밴드 구성과 계약을 주도했다. 마침내 이글스가 탄생한 것이다. 이글스(독수리)는 아메리카 인디언 호피 족이 숭배하는 대상이었다. 이후 이글스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음반을 판 밴드의 하나로 성장한다.

1972년 데뷔 앨범 '이글스' 발매, '테이 잇 이지'로 쾌조의 스타트

▲ 이글스는 모두 일곱 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사진= 스포츠Q DB]

이글스는 1972년 6월 프로듀서 글린 존스와 함께 잉글랜드에서 데뷔 앨범 ‘이글스’를 녹음했고, 1972년 6월 1일 발매됐다. 데뷔 앨범은 빌보드 톱40 싱글 차트에 3곡이나 랭크시켰다. 글렌 프레이와 잭슨 브라운이 쓰고 프레이가 리드보컬을 맡은 ‘테이크 잇 이지(Take It Easy)’는 ‘빌보드 핫 100’ 12위에까지 올랐다.

이글스의 창립 멤버 4명은 각기 다른 배경을 지녔다. 하지만 글렌 프레이는 이들의 개성을 융합해 내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창단 초반, 다른 멤버들은 자신의 음악에만 치중했지만 프레이는 밴드의 운영을 이끌었다.

보컬리스트로서의 글렌 프레이는 돈 헨리와는 전혀 다른 음색을 지녔다. 달콤함과 그늘짐이 동거하는 듯한 개성적인 목소리는 이글스의 매력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는 ‘테이크 잇 이지’(Take It Easy) ‘라잉 아이스’(Lyin' Eyes) ‘뉴 키드 인 타운’(New Kid In Town)’ ‘하테이크 투나잇’(Heartache Tonight) 등의 히트 넘버에서 리드 보컬을 담당했다.

 마지막 앨범 속 경음악 "전쟁 없는 세상을 꿈꿨다"에 짙은 여운

이글스는 1980년 해체됐으나 1994년 재결합했다. 1994년, 재결성 후 처음 내놓은 앨범 타이틀은 ‘헬 프리지스 오버(Hell Freezes Over)’였다. 이 제목은 속어로 ‘결코~않다’라는 뜻을 지닌다.

1994년 이글스 재결성 콘서트에서, 글렌 프레이는 “공식적으로, 우리는 결코 해체된 적이 없다. 우리는 다만 14년의 휴가를 보냈을 뿐이다”라고 말해 앨범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내비쳤다.

이글스는 2007년 일곱 번째 정규앨범 ‘롱 로드 아웃 오브 이든’(Long Road Out of Eden)을 발매했고, 프레이는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진행된 ‘더 로드 아웃 오브 이든 투어’에 참가했다. 이글스는 글렌 프레이와 함께 마지막으로 만든 이 앨범에서, 제이 디 사우더의 곡을 리바이벌한 ‘하우 롱’(How Long)과 경음악 ‘아이 드림드 데어 워스 노 워(I Dreamed There Was No War)’로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글렌 프레이는 ‘하우 롱’에서 리드 보컬을 맡았고, '아이 드림드 데어 워스 노 워‘는 작곡했다. '전쟁 없는 세상을 꿈꿨다'는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2015년 7월 29일 루이지애나주 보시어 시티(Bossier City)에서 펼쳐진 이글스의 월드 투어(2년간 진행) 마지막 무대는 글렌 프레이의 생애 고별 무대가 되고 말았다.

컨트리록 & 포크록의 편안한 조화, 그리고 R&B로의 진화

초기의 글렌 프레이는 컨트리 록과 포크 록을 섞은 듯한 음악성을 보였다. 이후 R&B에 심취해 이를 음악에 반영했다. ‘하테이크 투나잇’은 R&B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곡이다.

글렌 프레이는 1982년 솔로로 전향한 후 그런 경향이 더욱 짙어졌다. 테네시주 멤피스와 어깨를 나란히 한 ‘서던 소울’(Southern Soul)의 성지인 머슬 숄즈 스튜디오에서 레코딩을 하기도 했다. ‘디 올라이터’(The Allnighter)’와 ‘소울 서칭’(Soul Searchin′) 앨범은 그같은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스머글러스 블루스’(Smuggler’s Blues) ‘섹시 걸’(Sexy Girl)’ ’리빙 라이트‘(Livin′ Right) ‘트루 러브’(True Love), ‘소울 서칭’(Soul Searchin) 같은 곡들이다.

이 시기에 발표한, 에디 머피의 영화 ‘비벌리 힐스 캅’의 메인 테마곡이었던 ‘더 히트 이스 온(The Heat Is On)’은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2위를 기록, 이글스 멤버가 솔로로 발표한 곡 중 가장 상위에 랭크됐다.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솔로 시절, 그 내면에 대한 상반된 시각  

이글스 시대 상대적으로 눌린 듯하던 글렌 프레이와는 달리, 솔로로서 활동할 때의 글렌 프레이는 차분한 음악성을 보였다. 가사도 지극히 일반적인 러브송이 주를 이뤘다. 성인 음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처럼 릴랙스한 음악은 이글스 멤버로서의 긴 여행을 끝내고 안정을 찾으려는 긍정적인 경향으로 풀이할 수 있지만, 힘든 여행에서 도피하려는 부정적인 영향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글렌 프레이는 두 번에 걸쳐 결혼했다. 첫 부인 재니 벡스와 이혼 한 뒤 1990년 신디 밀리컨과 재혼했으며, 3자녀를 두고 있다.

◆ '사랑과 존경' 남기고 하늘 나라로 

2016년 1월 18일, 프레이는 만 67세의 나이에 뉴욕에서 장수술에서 회복되던 중 류마티스 관절염, 극심한 궤양성 대장염, 폐렴의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글스의 공식 웹사이트는 멤버와 가족의 명의로 “우리의 슬픔도, 그가 우리와 가족, 음악 공동체, 전 세계 수백만의 팬들에게 주었던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존경은 무슨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뮤지션과의 이별을 표현했다.

이글스를 잉태한 '트루버도어'

글렌 프레이와 돈 헨리가 만나 이글스를 출발시킨 곳은 트루버도어(Troubadour)였다. 이 곳은 캘리포니아주 웨스트할리우드 시에 위치한 나이트클럽이다.

1957년 오픈한 트루버도어는 1960년대 포크 뮤직의 중심지였고 그후에는 싱어송라이터들과 록음악을 위한 장소가 됐다.

엘튼 존이 미국 데뷔 공연을 치른 곳으로 유명한 이곳은 린다 론스태드, 닐 다이아몬드, 제임스 테일러, 조니 미첼, 캐롤 킹, 잭슨 브라운, 밴 모리슨, 버팔로 스프링필드 등 미국 대중음악계의 거물들이 인연을 맺었다.

이곳에서 ‘이글스’의 양축인 글렌 프레이와 돈 헨리는 의기투합했고, 그후 전설적인 컨트리록 그룹으로 개화하며 전성기 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전 세계 대중음악 팬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글렌 프레이와 돈 헨리의 주요 리드보컬 히트곡들

둘은 연주 뿐만아니라 작사·작곡에도 탁월한 실력을 보였고, ‘이글스’의 대표곡들은 대부분 둘의 목소리를 앞세워 탄생했다.

글렌 프레이는 ‘테이크 잇 이지’(Take It Easy), ‘피스풀 이지 필링’(peaceful easy feeling) ‘테킬라 선라이즈’(Tequila Sunrise), ‘라잉 아이스’(Lyin′ Eyes), ‘뉴 키드 인 타운’(New Kid in Town), ‘하테이크 투나잇’(Heartache Tonight) 등에서 리드 보컬을 맡았다.

돈 헨리는 ‘위치 워먼’(Witchy Woman) ‘원 오브 디즈 나이츠’(One of these Nights) ‘데스페라도’(desperado) ‘베스트 오브 마이 러브’(Best of My Love) ‘호텔 캘리포니아’(Hotel California)’ ‘더 롱 런’(The Long Run) ‘비지 빙 패뷸러스’(Busy Being Fabulous) 등에서 메인 보컬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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