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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포커스] 영웅들이여 "미안하다"고? 그저 그대들을 위해 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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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포커스] 영웅들이여 "미안하다"고? 그저 그대들을 위해 뛰어라
  • 박상현 기자
  • 승인 2014.09.26 11: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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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환·양학선, 인천 아시안게임서 심적 부담 이기지 못해…과도한 관심과 주변 환경 복합 영향

[인천=스포츠Q 박상현 기자] "국민들께 너무 죄송합니다. 연습 때는 좋았는데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남은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무조건 도리인 것 같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힘도 부치는 것 같고요. 많은 관중들이 경기 후에 잘했다고 격려해주시지만 그 얘기를 들을수록 마음이 더 무거워지네요."

제17회 인천 아시안게임 수영 경영 남자 자유형 결선을 마친 뒤 박태환(25·인천시청)이 한 말들이다. 박태환은 연신 '미안하다, 죄송하다'며 고개를 떨궜다. 또 국민들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유독 박태환만이 아니다.

'도마의 신'으로 불리는 한국 체조의 간판스타 양학선(22·한국체대) 역시 고개를 숙였다.

양학선은 25일 인천 남동체육관에서 열린 기계체조 도마 결승전에서 은메달을 딴 뒤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 많은 분들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이라면서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특히 양학선은 24일 마루와 링 결승을 치른 뒤 믹스트존 인터뷰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만큼 취재진들과 팬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워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는 증거다.

박태환, 양학선 뿐 아니라 진종오(35·KT)도 인터뷰를 하면서 '죄송'이라는 단어를 빼놓지 않았다.

진종오는 사격 남자 50m 권총 결선에서 메달에 실패한 뒤 "많은 기대가 있었을텐데 보답하지 못해 죄송하다. 개인적으로 좋은 결과를 예상했지만 아쉽다"고 말했다.

펜싱 남자 플뢰레와 여자 에페 선수들 역시 미안하고 실망스럽다는 반응들이다. 공교롭게도 한국 펜싱이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거둬들이지 못한 종목들이다.

남자 플뢰레의 경우 개인전에서 허준(26·로러스)이 은메달을 땄고 단체전에서는 결승에 오르지 못해 동메달을 획득했다.

여자 에페도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은메달 2개와 동메달 1개를 기록했다. 개인전에서는 신아람(28)과 최인정(24·이상 계룡시청)이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을 차지했다.

남자 플뢰레 선수들은 단체전을 마친 뒤 굳은 표정들이었고 고진(39) 코치는 "금메달을 원했는데 동메달에 머물러 미안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죄송하다"고 말했다. 신아람도 "꼭 이기고 싶었는데 잘 맞아 들어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실망스러웠다"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 홈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

이런 모습들은 최근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 나가 메달만 획득해도 환한 표정을 지었던 신세대 선수들과 다른 모습이다. 금메달은 따지 못했어도 열심히 노력하고 그만큼의 성과를 거둔 선수들은 메달 색깔에 관계없이 모두가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이 때문에 팬들과 미디어들도 "승리 지상주의에서 벗어난 신세대 선수들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다르다. 금메달을 따지 못하니 계속 고개를 숙인다.

그렇다면 '승리 지상주의'가 다시 살아나기라도 한 것일까.

보통 홈에서 열리는 스포츠 경기에서는 '홈 어드밴티지'라는 이점이 존재한다. 홈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을 등에 업으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기량 이상으로 실력을 발휘해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일반 상식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그 좋은 예다.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하던 한국 축구는 한일 월드컵을 통해 숙원이었던 1승과 16강 진출을 넘어서 4강이라는 신화를 썼다. 거스 히딩크 감독의 지도력이 발휘됐고 월드컵을 위해 오랜 기간 합숙까지 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지만 역시 경기장을 가득 메운 국민들과 붉은 악마의 뜨거운 응원이 있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오히려 홈팬들의 응원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홈에서 열리는 경기가 오히려 부담이 돼 자신이 갖고 있는 기량 이하의 성적을 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가장 좋은 예가 바로 2014 브라질 월드컵이다. 브라질은 전세계 누구나 인정하는 축구 강국이고 FIFA 월드컵에서도 다섯 차례나 우승했지만 정작 자국에서 열렸던 두 차례 대회에서는 우승하지 못했다. 특히 지난 7월에 열렸던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독일에 1-7로 참패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홈에서 반드시 우승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홈팬들의 과도한 관심으로 인해 몸이 얼어붙었던 탓이다.

박태환과 양학선, 진종오 등이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저조한 성적으로 기대했던 금메달을 따내지 못한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런 사실은 주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남자 사격 50m 권총에서 함께 진종오와 함께 경쟁했던 팡웨이(중국)는 "진종오가 우승 후보이지만 한국에서 열리는 경기인만큼 많은 압박을 받아 일찍 떨어졌을 것"이라고 이해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또 박태환을 지도한 마이클 볼 코치도 "박태환이 한국에서 열리는 대회에 많은 부담을 갖고 있는 것 같다"며 "홈에서 이런 국제대회가 열린 적이 없어서 부담을 느끼는 것 같다. 컨디션은 나쁘지 않지만 힘이 많이 들어간다"고 밝혔다.

▲ 진종오가 20일 인천 옥련국제사격장에서 열린 인천 아시안게임 사격 남자 권총 50m 결선에서 경기가 풀리지 않자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스포츠Q DB]

◆ 홈팬들의 과도한 시선 집중, 경기 집중력 떨어뜨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여자 수영 국가대표로 출전했던 하은주(28) 씨도 박태환의 모습을 보며 많이 안타까워 했다.

하 씨는 "한국에서 할 때와 외국에서 할 때 성적 편차는 제각각이다. 한국에서 잘하다가 외국에서 적응 못해 못하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며 "하지만 (박)태환이의 경우 팬들의 응원이 상당하고 박태환수영장이라는 이름에서 오는 부담, 3연패를 해야 한다는 긴장감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은 4년마다 열리기 때문에 선수들이 느끼는 심적인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특히 박태환은 400m에서 자신의 기록보다 4~5초 정도 저조했는데 얼핏 보면 큰 것 같지만 쪼개보면 50m에 0.5초, 100m에 1초 정도씩 뒤진 것이다. 이런 기록 저하 현상은 심적인 부담으로 인해 얼마든지 올 수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선수들이 홈에서 큰 부담을 갖고 저조한 성적을 내는 것에 대해 30여년 동안 수많은 대표 선수들과 심리 상담을 해왔던 김병현(62) 박사는 '평가 불안(the fear of evaluation)'이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김 박사는 26일 "홈에서 유독 더 불안감이 증폭된다는 것이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선수들이 관중들이 보내게 될 평가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될 수 있다. 이런 불안과 두려움은 홈경기일수록 더 강해질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평가 불안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 박사는 "인간은 누구나 남들에게 인정받고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한다"며 "박태환, 양학선 등 선수들이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남들로부터 제대로 인정받고 평가받지 못할 정도의 성적을 올렸다는 자괴감에서 나오는 표현"이라고 진단했다.

김병현 박사의 저서인 '국가대표 심리학'에도 선수들이 불안을 느끼는 주된 원인을 '실패와 실수에 대한 두려움(the fear of failure)'과 '관중들이 보내주는 평가에 대한 두려움' 등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선수들이 이런 불안을 느끼는 순간 몸과 마음이 급격하게 흥분되면서 근육이 굳어지고 주의가 산만해지는 것이다.

◆ 도전하는 자세로, 즐기는 마음으로

이처럼 경기에서 불안감을 느낄 때 이를 다루는 방법은 없을까.

국가대표 심리학에서는 크게 7가지에 걸쳐 경기 불안 제어방법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몇개를 들어보자면 '도전적인 마음으로 경기에 임하라', '긍정적인 자기 독백을 하라', '경기를 즐기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이 있다.

박태환이나 양학선, 진종오 등의 공통점은 모두 챔피언이라는데 있다.

박태환은 도하 아시안게임과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이어 정상을 지키고 3연패를 노리는 입장이었다. 도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자들의 거센 도전을 받아주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하기노 고스케(일본)이 박태환보다 좋은 성적을 올린 것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이번 대회 직전 팬퍼시픽수영선수권만 하더라도 박태환의 상대가 되지 못했던 하기노는 아시안게임에서도 잃을 것이 없는 도전자의 입장이었고 이것이 오히려 성적을 끌어올리는 요인이 됐다.

양학선 역시 광저우 아시안게임과 런던 올림픽을 제패한 '도마의 신'이었다. 양학선은 햄스트링 부상이라는 또 다른 요소가 작용하긴 했지만 그 역시 도전을 받는 입장이었다. 진종오도 올림픽 2연패에 이어 대회 직전 34년만의 세계기록을 세운 세계사격선수권 개인 종목 챔피언으로 수성을 하는 입장이었다.

'1등을 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챔피언 자리에 올라 수많은 경쟁자들의 도전을 받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도전자의 입장에서 경기를 치르는 것이 오히려 불안감을 없애는 방법일 수도 있다.

또 경기를 즐기라는 것 역시 중요한 포인트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

▲ 양학선이 25일 인천 남동체육관에서 열린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 기계체조 안마 결승에서 은메달을 확정지은 뒤 눈물을 짓고 있다. [사진=스포츠Q DB]

물론 아시안게임 같은 큰 대회에서 즐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해내고 즐긴다면 예상하지 못했던 기대 이상의 성과도 거둘 수 있다.

기대하지 않았던 종목에서 종종 좋은 성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민수(20·한양대)는 이번 대회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안마 종목에서 동메달을 땄다. 이에 대해 박민수는 "주종목에 아니어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메달을 따게 돼 기쁘다. 아직도 내가 동메달을 딴 게 맞나 싶다"며 "기대했던 종목이 아니어서 즐기는 자세로 했다"고 말했다.

남자 접영 50m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양정두(23·인천시청) 역시 "선발전 때 접영을 2등으로 통과했는데 부담이 없어 오히려 더 좋게 작용했다"며 "선발전에서 1등으로 뽑혔던 자유형이 더 욕심이 많았는데 오히려 그것이 부담으로 작용했고 접영은 순위를 떠나서 경기에 임해 좋은 성적을 거뒀다"고 말했다.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가 없다.

이미 국민들은 무조건 금메달을 따기를 바라지 않을 정도로 성숙했다. 오히려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에서 금메달 이상의 카타르시스를 얻고 행복감을 느낀다.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모든 국가대표선수들은 우리들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tankpark@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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