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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현역]② 박근형 '꽃할배가 된 성격파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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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현역]② 박근형 '꽃할배가 된 성격파 배우'
  • 용원중 기자
  • 승인 2015.04.03 0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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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아니다. 평균수명 100세의 고령화 시대에 노병들은 여전히 전장을 누빈다. 지난 시간을 훈장삼아 머물러 있기보다 진격을 계속 한다. 공교롭게 박근형 윤여정 주연의 ‘장수상회’, 임권택 감독의 ‘화장’이 오는 4월9일 동시에 개봉한다. 60대 여배우 윤여정, 70대 꽃할배 박근형, 80대 거장 임권택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만들어가고 있다. 노장의 명료한 통찰을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어른이자, 열정 가득한 '청년' 3인을 SQ 피플 인사이드 석에 차례로 초대한다. [편집자 주]

 

 

[스포츠Q 글 용원중기자·사진 노민규기자] 효암 채현국 선생은 '생각한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어른이라고 했다. 밖으론 천진하게, 자신에겐 엄격하게 현장을 지키는 어른을 만났다. 요즘 ‘꽃할배’란 애칭으로 통하는 성격파 배우 박근형(76)이다.

◆ 예능·드라마·영화 ‘트리플 크라운’ 달성

인기리에 방영 중인 tvN 예능프로 ‘꽃보다 할배- 그리스’ F4의 로맨티스트, MBC 수목극 ‘앵그리 맘’에서 대권의지를 불태우는 비정한 교육감 강수찬 그리고 영화 ‘장수상회’의 까칠한 70세 노인 성칠. 예능, 드라마, 영화를 섭렵하며 젊은 배우들도 해내기 힘든 ‘트리플 크라운’을 너끈히 달성했다.

“요즘 시대 늙은이들은 발붙일 데가 없어서 불행하다. 나이가 드니 쓰임새가 없어져 버린다. 나 역시 불행했는데 지금은 너무 행복하다. 상이라든가 돈이 되는 건 싫고, 새로운 걸 계속 하고 싶다.”

서구 연극의 발상지인 아테네 디오니소스 야외극장 방문 때 무대 위에 서서 뭐라도 하고 싶은 불같은 열정이 솟구치며 평생 굿쟁이로 살아야함을 다시금 느꼈다. 수많은 사람이 알아봐 줄 때 놀라움과 더불어 ‘예능의 힘’을 절감했다. 당당히 영화 전체를 이끌어야 했던 ‘장수상회’는 그에게 사명감을 안겨줬다.

▲ 영화 '장수상회', 드라마 '앵그리 맘', 예능프로 '꽃보다 할배-그리스'의 박근형(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 ‘장수상회’ 70대 노인 성칠 맡아 철저히 계산된 연기 시도

‘장수상회’ 속 성칠은 장수마트에서 일하는 독거노인이다. 버럭하기 일쑤인 할아버지가 앞집으로 이사 온 꽃집여인 금님(윤여정)에게 설레는 감정을 느끼며 연애초보 행각을 벌인다. 성칠은 ‘국제시장’의 덕수처럼 격변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세대지만 또 다른 삶의 궤적과 얼굴을 보여준다.

“상업적으로 성공할지 여부가 불확실한 매우 위험한 실험이었을 거다. 외국에선 얼마든지 70대의 사랑을 다룬 작품들이 만들어지는데 우리만 없었다. 그래서 사명감이 생겼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강제규 감독이 함축적으로 이야기를 몰고 가서 감탄했다.”

이번 작품에선 연극학도 시절처럼 철저히 계산된 연기를 시도했다. 시나리오를 받고 6개월 동안 연구를 거듭했다. 시퀀스의 연결을 계산하면서 ‘신 바이 신(Scene By Scene)’의 연계 플랜을 세웠다. 성칠의 괴팍함을 강조해야 관객이 몰입하고 이후 반전으로 인해 더욱 가슴 아파하며 감동할 거란 생각도 놓치지 않았다.

재개발 서류용 인감도장을 둘러싸고 마트사장 장수(조진웅)과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에서 “폭발적으로 강하게 가겠다”고 제안하자 다칠 것을 우려한 감독이 만류했다.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장면이라 감독을 설득한 뒤 과격하게 움직이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 ‘내면을 외부로 표출’ 연극학도 시절부터 체화한 연기 철칙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연기는 내면의 느낌을 일궈내서 외부로 표출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로버트 드 니로, 말론 브란도, 알 파치노, 폴 뉴먼은 연극무대 경험을 바탕으로 내면을 외부로 잘 표출하는 액터즈 스튜디오 출신 배우들이다.

 

“연기의 3대 조건은 ‘일반인처럼 느껴라! 내가 그 인물이라면, 하고 이해하라! 상상력을 바탕으로 행동하라!’다. 성칠을 느끼고 이해한 뒤 유쾌하게 풀어냈다. 연기는 상상력으로 타인을 표현하는 창작행위다. 반복된 훈련을 통해 기초를 튼튼히 해놓으면 어떤 매체에서도 인물 표현이 가능하다. 지금은 장비, 시설 등 환경도 무척이나 좋아지지 않았나. 후배들이 기초를 튼튼히 다진 뒤 독창적인 연기를 했으면 한다.”

‘장수상회’에는 60~70대 어른인 박근형 윤여정을 비롯해 40대 조진웅 김정태, 30대 한지민 황우슬혜, 20대 엑소 찬열, 10대 문가영 등 세대별 배우들이 포진해 있다.

아이의 순수함부터 중견의 듬직함이 공존하던 현장의 중심에 섰던 노배우는 “우리 세대가 젊은 세대와 소통하며 되살아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 시대 앞서가는 ‘윤여정’, 거장의 풍모 ‘강제규’

금님 역 윤여정과는 50여 년의 세월을 선후배이자 동료로 함께해왔다. 드라마 ‘장희빈’ ‘꼭지’와 단막극, 영화 ‘고령화가족’ 등에서 공연했다. 그를 보는 시선은 각별하다.

“독서량이 풍부해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명석했다. 달변이었고.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귀국한 뒤 만났을 땐 무뎌지고 노쇠한 느낌이 나서 안타까웠다. 김수현 작가 드라마로 부활해 무척 기뻤다. 서로 어떻게 연기할 줄 알고 신뢰하니까 이번에 재미나게 연기했다. 시대를 앞서 가는 사람이다. 저런 사람이 서넛만 있으면 우리 세대의 배우군이 획기적으로 될 거다. 그런 면에서 존경하는 마음마저 있다.”

 

영화 ‘은행나무 침대’ ‘쉬리’를 보고 거장임을 직감했던 강제규 감독과는 첫 만남이다.

“처음엔 섬세한 드라마를 어떻게 할까 의아했다. 첫 미팅을 하자마자 ‘달리 거장이 아니구나’란 생각이 들더라. 자신의 콘티가 분명히 있을 텐데 배우의 생각을 존중해준다. 영화는 종합예술이라 여러 사람의 생각이 어우러져야 하는데 강 감독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보며 높낮이를 조율한다. 사전 연습과 테스트, 드라이 리허설을 치밀하게 해서 테이크를 많이 가지도 않는다. ‘다른 면이 이거구나!’ 싶었다. 항상 현장이 웃음과 느슨함으로 넘쳤는데 그만큼 자신이 있어서였을 거다.”

◆ “배우 탄생에 50년 소요...나 역시 70세에 진정한 배우 돼”

연극부로 유명한 휘문고를 다니면서 연극을 시작, 1959년 ‘꽃잎을 먹고 사는 기관차’로 데뷔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1기) 입학, 63년 KBS 공채 탤런트 합격으로 방송활동을 시작했다. 영화는 68년 ‘지하실의 7인’이 첫 작품이다.

이후 동아연극상·대종상·백상예술대상 남우주연상, 방송3사 연기대상을 휩쓸었다. 선 굵은 연기로 ‘성격파 배우’ ‘한국의 알 파치노’란 별명을 얻으며 연극, 영화, 드라마 각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50년대 후반에 연기를 시작했을 땐 학생극이 연극계를 주도하던 시절이었다. TV 초창기인 60년대를 거쳐 트렌디 드라마가 나오기 시작하던 70~80년대로 들어서니 과거의 자원들이 배제되기 시작했다. 현재 남아있는 배우들은 고작 10명 남짓이다. 모두 연극계를 이끌었던 주역들이다. 아까워하던 차에 최근 들어 어른을 비롯해 사회구성원이 어우러지는 이야기가 속속 등장하더라. ‘유나의 거리’ ‘미생’ ‘워낭소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등이 나옴으로써 장르가 확대되는 현상은 행운이자 사명감을 자극한다.”

연륜 있는 자원(배우) 위에 젊은 배우들이 가세하고, 감독들이 한 차원 높은 결과물을 창조하면 한류가 업그레이드될 거라고 전망한다.

“제대로 된 배우 한 명이 나오려면 50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나 역시 10대 후반에 시작해서 70세가 돼서야 진정한 배우가 됐다. 그런 과정을 거친 배우들이 젊은이들에게 플러스알파 역할을 해주고, 우리 문화계에 큰 도움을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 50대 접어들어 ‘역할 창조론’ 통해 악역 창조...'회장님' 전문배우

드라마 ‘인간시장’(1988)의 박회장부터 ‘야망의 세월’ 최회장, ‘젊은이의 양지’ 하회장, ‘모래시계’ 윤회장, ‘추적자’ 서회장, ‘황금의 제국’ 최회장, 최근 종영한 ‘전설의 마녀’ 마회장에 이르기까지 카리스마 넘치거나 악하고 비열한 회장 캐릭터를 줄곧 맡아왔다. 쩌렁쩌렁한 에너지의 연기로 인해 시간이 흘렀음에도 잔상이 강렬하다. 이런 인상적인 악역은 중년의 위기에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50대가 되니 젊은이도, 노인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라 발붙일 데가 없었다. 위기를 맞은 셈이다. 4~5년 공백기를 가졌다. 그때 계간지에 기고된 배우 출신 홍유진 박사의 ‘역할 창조론’을 일순간 ‘바로 이거야! 내가 가야 할 길이야’라고 무릎을 쳤다. 50세에 이르면 드라마의 주인공을 맡을 순 없게 된다. 하지만 주변 인물들도 절실한 감정을 극대화해 역할을 창조하면, 이야기들이 모여 재미를 자아낸다.”

91년 ‘여명의 눈동자’에서 고등계 형사 스즈끼(최두일) 역을 맡은 그는 김종학 PD에게 “일제의 앞잡이인 악역이지만 내면을 그려 넣으면 인간적 연민을 자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시청자 반응은 뜨거웠고, 배우는 확신을 얻었다. 역할 창조론은 ‘추적자’로 정점을 찍었다. 연극적 연기를 시도한 이 작품으로 인해 2012년 방송3사 PD들이 뽑은 프로듀서상을 품에 안았다.

[취재후기] 수 백편의 작품을 해온 중장년층 배우들은 대부분 “더이상 원하는 배역은 없다”고 점잖게 손사래치곤 한다. 노욕으로 비치는 것에 대한 우려일 수도, 실재 할 만큼 해서 여한이 없다는 표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박근형은 달랐다. 드라마 ‘킬미 힐미’에서 지성이 맡았던 다중인격체를 콕 집으며 “하고 싶다‘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작품 속 캐릭터 욕심은 여전히 크다“는 노배우와의 인터뷰는 의미 깊은 '연기학 개론' 수업이었다.

goolis@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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