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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포인트] '풍문으로 들었소' 막장 대신 블랙코미디로 승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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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포인트] '풍문으로 들었소' 막장 대신 블랙코미디로 승부수
  • 용원중 기자
  • 승인 2015.03.14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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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Q 용원중기자] SBS 월화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는 그동안 안방극장에서 별반 시도되지 않았던 블랙 코미디 장르를 내세워 연일 화제를 뿌리고 있다.

촌철살인의 풍자와 해학의 블랙 코미디는 희극의 하위 장르로 밝고 쾌활한 웃음보다는 고통, 잔혹, 음울하고 냉소적인 유머감각에 기초한다. 천재 코미디 배우 찰리 채플린의 흑백 무성영화 이후 스탠리 큐브릭, 로버트 알트만, 우디 앨런 감독 등의 영화가 현대 블랙 코미디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한국영화로는 ‘칠수와 만수’ ‘세상 밖으로’ ‘넘버3’ ‘조용한 가족’ ‘반칙왕’ ‘그때 그 사람’ ‘간첩 리철진’ ‘킬러들의 수다’ 등이 있다.

 

◆ 정성주- 안판석 콤비, ‘막장’ 대신 ‘블랙코미디’로 갑을 키워드 요리

‘풍문으로 들었소’는 제왕적 권력을 누리며 부와 혈통의 세습을 꿈꾸는 대한민국 최상류층의 속물근성, 허위의식을 통렬한 풍자로 꼬집는 점에서 블랙 코미디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간 대부분의 드라마는 풍문으로만 들려오던 최상류층의 민낯과 내밀한 이야기를 ‘막장’ 코드로 풀곤 했다. 작가적 책임에선 자유로운 대신 신분의 차이, 양가 반대, 혼전 임신, 고부갈등과 같은 자극적인 에피소드는 시청률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성주 작가와 안판석 PD가 누구인가. 그들의 작가적 자존심이나 투철한 직업윤리는 막장 드라마를 용인하지 않는다. 이런 내용을 다룰 최적의 장르가 블랙 코미디다. 더욱이 편의점 사장 자살사건, 라면상무, 조현아 땅콩회항 사건 등 일련의 갑을논란이 사회적 관심사로 대두되며 시청자의 호응 등 드라마화의 물적 토대가 충분히 확보됐다.

전작 ‘아내의 자격’에선 대치동 사교육 현실을 드라마타이즈하고, ‘밀회’에선 클래식 음악을 불륜의 주제가로 과감히 안방으로 끌어들인 두 콤비 플레이어의 촉수에 갑을 키워드가 걸려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두 사람은 지난 2000년 MBC 코믹 홈드라마 ‘아줌마’에서 전업주부인 아내(원미경)에게 빌붙어 거들먹거리는 속물 교수 장진구(강석우)의 몰락사를 다루며 스노비즘의 단면을 보여준 바 있다. 따라서 ‘풍문으로 들었소’는 ‘갑의 세상’과 ‘갑질의 역사성’에 대한 정성주- 안판석 콤비의 진화한 ‘비판서’로 읽혀질 법하다.

 대 이은 기득권층 가문에 입성한 서민 여고생 며느리 스토리

법무법인 한송의 대표 한정호는 일제강점기부터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 기득권층으로 살아온 집안 인물이다. 논리의 제왕, 의전의 달인인 그는 절대 불법을 행사하지 않고, 대를 이을 수재 아들에겐 “귀족성을 내세우면 안 된다”고 타이른다. 기업가와 고위관료로 포진한 명문가 출신 우아한 아내 최연희(유호정)와의 슬하에 1남1녀를 뒀다.

 

균형감각을 지닌 젠틀맨으로 여겨질 법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법무부장관을 꿈꾸며 전직 총리를 얼굴마담으로 영입하고, 광범위한 정보 수집을 통해 집대성한 정·관·재계 요인들의 비리목록을 가장 큰 자산으로 간직한다. 법대 진학을 준비하는 인상(이준)이 서민 여고생 서봄(고아성)과 불같은 사랑에 빠져 아들을 출산하는 사고가 터지자 보안 유지, 친자 확인을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결국 돈으로 사후처리를 꾀하나 인상의 반발에 직면하자 플랜 C를 가동, “두 사람의 사랑을 지지한다”고 대외에 공표한다. 그리고는 몰락한 중산층인 형식(장현성)- 진애(윤복인) 부부와 사돈을 맺는다.

◆ 입체적 캐릭터 향연...적재적소에 배치된 캐스팅 강점

6회까지 방영된 드라마는 캐릭터들의 향연일 만큼 적재적소에 배치된 등장인물들과 캐릭터의 입체적 면모가 두드러진다. 캐스팅은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에서 허위로 가득 찬 지식인 역할을 맡았던 유준상은 합리적인 신사와 냉철한 야심가에 머무는가 하는 찰라, 몰래 손자를 보기 위해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가거나 사돈 앞에서 자신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인상을 향해 달려들다가 가랑이가 누각 난간에 끼어 괴성을 지르는 코믹연기를 능란하게 소화한다.

 

품위 유지를 생명처럼 여기는 우아한 귀부인으로 행동하다가 봄이에게 “여기가 감히 너 같은 게 끼어들 데야? 이런 뻔뻔하고 천박한...”이라고 고함을 지르며 천박한 속내를 드러내는 연희 역 유호정은 이번에도 야무진 연기력을 과시한다.

아역 배우부터 연기력을 벼려온 고아성은 신의 한수다. 과거 대배우들과 공연한 경험 덕분인지 쟁쟁한 연기자들에 전혀 밀리는 법 없이 당찬 여고생에서 재벌가 작은 사모님으로 변신하는 가운데 극의 중심을 확고히 잡아나간다. 아이돌 출신 이준은 ‘밀회’의 유아인에 이어 일탈을 꿈꾸는 불안한 청춘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이외 ‘정성주-안판석 사단’으로 불리는 장현성 서정연 김해연 장소연을 비롯해 새롭게 가세한 연극배우 김정영 김학선 이화룡 김호정과 앵커우먼 백지연, 가수 장호일이 가정부, 집사, 비서, 상류층 친구그룹을 이루며 풍성함을 더한다.

◆ 7억원 규모 세트, 어두운 조명, 기묘한 노래 등 완성도 높은 ‘프로덕션 디자인’

장르와 주제의식, 배우들의 연기력과 더불어 디테일까지 살려낸 프로덕션 디자인은 국내 드라마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한정호의 집은 거대한 규모의 개량 한옥이다. 1층 한옥에는 근엄한 구세대 한정호-연희 부부의 침실, 서재와 주방, 아기방이 배치돼 있다. 2층 양옥은 발랄한 신세대 인상과 봄의 공간이다. 이렇듯 한옥과 양옥을 결합해 작품의 메시지와 캐릭터를 효율적으로 전달한다.

 

1층 공간만 180평인 세트의 공사기간은 한 달, 비용은 무려 7억5000만원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강점기부터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 기득권층으로 살아온 한정호 가문의 자만심을 표현함으로써 풍자와 해학을 담는 공간으로 역할한다.

또한 이 한옥 세트가 등장할 때마다 조명을 최소화해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를 조성, 블랙코미디 장르의 효과를 증폭한다. “우~우우우~풍문으로 들었소”라는 1980년대 가수 함중아의 히트곡 ‘풍문으로 들었소’는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장기하와 얼굴들에 의해 리메이크돼 재조명받은 추억의 가요다. 드라마 제목과 주제가로 쓰이는 이 곡은 허세에 찌든 이들의 두려움을 가장 잘 표현하면서 기묘함과 코믹함이라는 효과까지 보탠다.

◆ 작가-PD의 견고한 팀워크, 안주 보다 '실험' 선택

희소성 높은 장르로 안방극장에 도전장을 던진 ‘풍문으로 들었소’. 초반 시청자 반응은 성공적이다. 오랜 세월 호흡을 맞춰온 작가와 PD의 단단한 팀워크는 수준급 만듦새를 창조했다. 보는 이들은 만족한다.

무엇보다 높아진 기대치에 부응하려는 정성주 작가와 안판석 PD의 고민이 충분히 전해지는 점이 포만감을 키운다. 두 사람은 안주 대신 실험을 선택했다. 이제 견고한 우리 사회 시스템에 맨몸으로 선 18세 부부 인상과 봄이가 어떤 도전과 실험을 벌여나갈지 흥미롭게 지켜볼 일만 남았다.

goolis@sportsq.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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