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9 18:39 (월)
'역사저널 그날' 신라 최후 경순왕과 마의태자의 '엇갈린 선택', 그 배경과 평가 (예고)
상태바
'역사저널 그날' 신라 최후 경순왕과 마의태자의 '엇갈린 선택', 그 배경과 평가 (예고)
  • 류수근 기자
  • 승인 2016.01.31 14: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포츠Q(큐) 류수근 기자] ‘역사적인 그날’은 2016년 새해를 맞이해 ‘고대사 인물열전-선택’ 5부작을 마련해 주목을 끌고 있다. 그동안 영웅과 배신자의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백제말 흑치상지 장군을 첫편으로 방송한데 이어, ‘반란이냐 혁명이냐’로 논란을 제공한 신라시대 난의 주인공 김헌창, 2세기 고구려 왕실에 일대 파문을 일으킨 여성 ‘우씨 왕후’, 당나라에서 ‘격황소서’로 이름을 떨친 신라말기의 대학자 최치원 편을 방송했다. 역사적인 순간에 이들은 ‘선택’을 해야 했고, 그 선택은 개인은 물론 우리나라 역사에 큰 이정표를 남겼다.

31일 오후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의 ‘고대사 인물열전-선택’ 5부작 마지막 인물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과 마지막 왕위 계승 적자였던 '마의태자'다.

▲ 31일 오후 ‘역사저널 그날’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과 마지막 왕위 계승자 ‘마의태자’의 엇갈린 선택을 조명한다. [사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제공]

망국(亡國)의 길을 걸어야 했던 신라 제56대 경순왕(敬順王·재위기간 927~935)과 마의태자(麻衣太子)는 부자지간이다. 하지만 ‘망국의 한’을 해소하는 방법은 정반대로 엇갈렸다. 935년 경순왕은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게 바치기로 결심하고 귀족들과 함께 고려의 수도인 개성으로 떠나 스스로 왕건의 신하가 되기를 청하였다. 이후 고려 태조 왕건의 딸과 혼인하고 태자보다 높은 지윈인 정승공에 봉해지며 고려인으로서 영화를 누린다.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어찌 1천 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삼국사기’ 중)

반면 아버지 경순왕을 만류하는데 실패한 마의태자는 이처럼 통곡하며 개골산(皆骨山), 즉 금강산에 들어가 ‘마의’를 입고 나물을 입으며 생을 마친다.

▲ [사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제공]

그후 마의태자는 어떻게 지냈을까? 신라 멸망과 함께 마의태자의 공식적인 행적은 사라지지만, 강원도 인제 부근에서는 마의태자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전해온다. 마의태자가 의병을 일으켜 신라 재건을 도모했다는 맹개골, 의병 활동에 필요한 군량미를 모아두었다고 해 이름 붙여진 군량리, 국권 회복에 대한 의지가 담긴 다무리까지, 그의 행적들은 지역명이 되어 면면이 증언하고 있다. 마의타자가 실제로 신라 부흥운동을 주도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천년 사직’ 신라의 마지막 자존심과 명예를 죽는 날까지 지키려고 노력했음은 분명하다고 풀이할 수 있다.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은 어떻게 왕좌에 올랐으며, 왜 순순히 왕건의 신하가 되기를 작정했을까?

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수도 경주를 습격한다.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던 신라 제55대 경애왕은 갑작스러운 침탈에 제대로 대응 한번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후 견훤은 직접 왕위에 오르지 않고 새로운 이를 왕으로 세우는데 그가 바로 신라의 경순왕이었다.

▲ [사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제공]

당시 3대째 박씨(氏)계 인물이 왕위를 잇고 있던 신라는 이로 인해 김씨(氏)인 경순왕(본명 김부)이 뜻밖에 왕위를 차지한다.

이후 3년이 지난 930년, 고창 전투에서 승리한 고려는 한반도의 최강자로 떠오른다. 이후 고려의 태조 왕건은 경순왕의 청으로 3개월간 신라에 머무른다. 그는 경순왕과 신라 관료들에게 각종 물품을 선물하며 민심을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백성들은 “견훤이 왔을 때는 승냥이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았는데, 왕공(王公)이 오니 부모를 만난 것 같다”며 왕건을 칭송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고려와 화친을 유지한 신라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고려에 의존하며 망국의 길을 걷게 됐다.

당시 건사할 백성도 영토도 제대로 남아있지 않던 신라의 경순왕은 현실적인 선택으로 고려의 왕건에 귀부(歸附)하기로 결정하고 신하가 된 것으로 보인다. 경순왕이 신하의 예를 갖춤에 따라 얼마남지 않은 신라의 귀족과 백성은 그나마 목숨을 건지고 고려의 백성으로 살 수 있었을 터다.

현실을 직시한 경순왕의 선택과 대의명분을 쫓았던 마의태자, 둘의 ‘선택’은 어떤 쪽이 더 현명한 판단이었을까? 역사의 ‘선택’은 현재의 단순한 논리만으로 재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도전과 열정, 위로와 영감 그리고 스포츠큐(Q)

주요기사
포토Q